인터뷰―만나고 싶었습니다
안내견 ‘탱고’와의 동행을 통해 경북대 석사과정을 마친 김경훈 씨를 만나다!
기획 및 취재 최연신(하상매거진 인터뷰어)
아침에 눈을 뜨고, 산책을 하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는 일…. 행복은 어쩌다 한 번 주어지는 큰 행운이 아니라, 이처럼 평범한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감동으로부터 비롯된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너무 가까이에 있기에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종종 잊고 살 뿐이다. 김경훈(32세) 씨 역시 시련과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평범한 일상 속 숨어 있는 소중한 것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날 죽고 난 후 다시 살게 된 세상이 아닐까 생각해요.”
경훈 씨에게 삶은 곧 기적이다. 중2 때 ‘길랭바레 증후군’이라는 희귀병으로 쓰러져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했던 경훈 씨.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난 후 시신경 마비로 인해 시력을 잃고 힘든 시간도 보냈지만, 경훈 씨는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와 기적 같은 삶을 있는 힘껏 살아가는 중이다.
이야기 하나―빛을 잃고 다시 찾은 꿈
경훈 씨는 어린 시절 책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라는 말이 있듯이 경훈 씨는 늘 책을 가까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책 읽는 습관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특히 태양과 달과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천문 우주에 관심이 많아 관련 서적을 찾아 읽었다.
“아버지는 저를 자주 서점에 데리고 가주셨어요. 그리곤 마음껏 책을 고르게 해주셨는데 저는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면 늘 같은 책을 두 권씩 샀습니다. 한 권은 보관용이었고, 또 한 권은 낙서용이었어요. 낙서용 책엔 밑줄을 긋거나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고 짧은 생각도 적어 넣었습니다. 저에게 책은 재미있는 놀이였던 거죠.”
별을 사랑하고 책을 좋아했던 소년은 중학생이 되면서 예기치 않은 시련과 직면했다.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불청객의 정체는 참기 힘든 ‘두통’이었다. 두통은 시도 때도 없이 경훈 씨를 괴롭혔다. 멈추지 않는 두통으로 인해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일이 자주 생겼다. 그날도 경훈 씨는 극심한 두통으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 후로 3년의 세월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경훈 씨가 눈을 뜬 건 일 년 만이었다. 간신히 의식은 돌아왔지만, 전신마비 상태가 되어 2년을 병원 침대에 누워 지냈다. 병원에서 내린 경훈 씨의 진단은 길랭바레 증후군이었다. 길랭바레 증후군은 신체의 면역 체계가 말초신경을 공격해 손상을 주는 자가면역질환이다. 매년 10만 명 중 한 명꼴로 발생하는 희귀질환으로 주로 뇌신경과 말초신경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아버지는 병원에 누워 있던 저를 위해 책을 많이 읽어 주셨습니다. 그중엔 조선의 세조가 직접 편찬했다는 ‘팔의론’도 있었어요. 그 책에선 의사를 8등급으로 나누고 있는데, 마음을 잘 다스려 병을 치유하는 ‘심의’를 최고의 의사라고 했대요. 아버지가 읽어 주신 그 한 줄의 글이 무척 힘이 됐어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도 품었습니다.”
당시 경훈 씨는 아버지 외에도 또 한 명의 심의를 만났다. 경훈 씨를 돌보던 간호사였다. 오랜 병원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분이 쌓였다. 경훈 씨는 간호사를 누나라고 부르며 따랐고, 간호사는 그런 경훈 씨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보살폈다. 답답한 병실에 누워 지내는 경훈 씨를 위해 말동무를 자처한 간호사는 세상 밖의 소식을 들려주고 선물을 사주고 휠체어에 태워 드라이브도 시켜주는 등 경훈 씨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진심을 다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훗날 나도 간호사 누나처럼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심의가 되고 싶다는 새로운 꿈이 생겼죠.”
모태 신앙이었던 경훈 씨는 ‘마음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는 방법으로 성직자를 생각했다. 경훈 씨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독실한 신자였으며, 가족 중엔 신부님도 있고 수녀님도 있었다. 아버지도 신학교를 다니다가 중도 하차했던 경력이 있다. 어쩌면 경훈 씨가 성직자를 꿈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경훈 씨는 3년 만에 퇴원했다. 하지만,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다. 시신경 마비로 인해 중도 실명했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의 빛을 잃었지만 그만하길 다행이라 생각했다. 길랭바레 증후군 환자의 경우 하반신 마비로 인한 지체장애인이 되거나 최악의 경우 전신마비로 사망하는 예도 있으니 말이다.
“가끔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날 죽고 난 후 다시 살게 된 세상이 아닐까 생각해요. 실명을 하고 나니 그동안 제가 꽤 많이 시각에 의존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경훈 씨는 퇴원 후 고향 대구를 떠나 가톨릭 재단 시각장애 특수학교인 충주성모학교에 중학교 2학년에 입학했다. 그때 나이 열일곱이었다. 충주성모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5년 정규과정을 마친 경훈 씨는 2012년 한국교통대학교 국제통상학과에 입학했다. 2014년에 다시 성직자가 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을까 찾아보다 수도사제가 되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고 예수회에 문을 두드렸다. 그 후 예수회가 설립한 교육기관인 서강대학교에 편입해 신학대학에 가기 전에 갖춰야 할 철학 기초와 성소 모임을 하며 신학의 기본기를 갈고 닦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심의’에 대한 동경을 실현할 길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성직자가 되기엔 제 역량이나 성소가 부족했나 봐요. 대학 졸업 후 신학교를 가려 했는데, 신부님께서 제 나이 아직 젊으니 넓은 세상에 나가 사회 경험을 더 쌓으라고 권하셨어요. 처음엔 억울했죠. 성직자가 되기 위해 힘든 시간을 버텼는데 왜 내게 기회조차 안 주실까 원망도 했어요. 결국 신학대 진학을 미루고 다시 수능을 봐서 경북대학교에 재입학했습니다. 경북대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하다가 문헌정보학으로 전과했습니다. 그렇게 폭넓은 공부를 하면서 신부님의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한걸음 물러서서 세상을 보니 사제가 아니어도 의외로 할 일이 많더라고요. 덕분에 탱고도 만났고요.”
이야기 둘―안내견 ‘탱고’와의 만남, 탱고와 함께 한 2년
경훈 씨는 2022년 2월 경북대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3월 경북대 대학원 같은 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그 무렵 탱고와의 만남도 이루어졌다. 안내견 학교에 신청한 후 2년 만이었다. 새로운 가족이 생기자 경훈 씨의 삶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탱고를 만나기 전에는 친구나 부모의 도움으로 학교생활을 유지했지만, 탱고와 함께하면서 단독보행이 가능해졌다. 경훈 씨에겐 전에 없던 책임감도 생겼다. 탱고가 경훈 씨의 안전한 보행을 돕는 대신 경훈 씨는 보호자로서 탱고의 건강과 행복, 웰빙을 책임졌다. 이렇게 경훈 씨와 탱고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됐다.
“탱고는 이름값 하는 친구예요. 친근하고 활발하고 장난기가 넘치죠. 저에게 잘 삐치기도 합니다. 물론 일할 때는 열심히 해요. 탱고라는 이름은 안내견 학교에서 지어준 건데 저는 처음부터 그 이름이 무척 정겹고 마음에 들었습니다. 미군은 무선통신을 할 때 알파벳을 잘못 알아듣는 일이 없도록 알파(A), 브라보(B), 찰리(C) 등 포네틱 코드로 읽는데요. 탱고 역시 알파벳 T를 나타내는 암호라는 것도 재미있고요. 또 탱고를 보자마자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나오는 대사가 생각이 났습니다. 시각장애인 주인공이 레스토랑에서 만난 옆 좌석 여인에게 탱고를 청하잖아요. 실수할까 봐 걱정하는 여인에게 주인공이 “춤추다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예요.”라고 안심시키고 멋진 탱고를 완성하죠. 인생도 탱고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실수로부터 배우니까요.”
친근하고 활동적인 성격의 탱고 덕에 경훈 씨의 삶도 다이나믹해졌다. 탱고와 함께 산책하러 나가거나 외출을 하게 되면 사람들로부터 연예인 못지않은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탱고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귀엽다는 소리를 듣다 보니 자기 이름을 ‘귀여워’로 착각할 정도란다.
탱고는 경훈 씨의 보행만 돕는 것이 아니다. 학업 연구 과제를 수행할 때도 경훈 씨는 탱고 덕을 크게 봤다. 질적 연구를 주로 하는 경훈 씨는 많은 인터뷰 사례가 필요한데 탱고와 함께 부탁하면 사람들이 흔쾌히 응해주기 때문이다.
“탱고는 분위기 메이커예요. 강의 시간에도 연구실에서도 존재감이 넘치죠. 연구원생들 사이에선 탱고가 대장으로 통합니다.”
장애인복지법 제40조 3항에 따르면 정당한 사유 없이 안내견의 대중교통 이용을 거부하거나 식당이나 공공장소 등 건물 내 출입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법으로 안내견과 장애인의 이동권은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법과 현실 사이엔 간극이 있다.
“탱고와 함께하면서 단독보행이 조금 더 자유로워졌지만, 아이러니하게 탱고와 함께 갈 수 없는 곳도 많아요. 법이 보장하는데도 아직까지 안내견의 출입을 꺼리는 곳이 존재하거든요. 하지만 세상엔 좋은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앞으론 더 좋아질 거라 생각해요.”
이야기 셋―졸업, 그리고 새로운 시작
경훈 씨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돕고 싶어 학사·석사 모두 문헌정보학을 선택했다. 특히 장애인의 사회참여 활성화 및 정보 접근성 강화에 관심이 많았다. 석사과정 졸업 논문도 ‘저시력 시각장애인의 키오스크 사용 경험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를 주제로 썼다. 재학 중에는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의 연구개발지원으로 연구보고서를 작성하고, 과기부가 주최한 ‘2023 국민행복 정보기술(IT) 경진대회’에서는 예선에서 대구시장상, 본선에서 은상을 각각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2년 만에 졸업식을 맞았다. 2024년 2월 23일. 경북대학교 대강당에서는 학사와 석사, 박사를 대상으로 학위수여식이 거행됐다. 경북대학교 홍원화 총장은 박사 전원과 석·학사 대표들에게 학위기를 직접 전달하며 그간의 노고를 격려했다. 이날 학위수여식에서 경훈 씨는 일반대학원 석사 대표로 학위기를 받았고, 탱고 역시 2년간 경훈 씨가 석사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늘 함께 동행한 공을 인정받아 명예졸업증을 수여받았다.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어요. 특히 탱고와 함께 석사학위를 받게 되어 기쁨이 두 배입니다. 아마 한국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안내견은 탱고가 1호일 거예요. 졸업장에는 제 이름과 탱고의 이름만 적혀 있지만 저는 졸업이라는 이름 앞에 괄호를 남겨두고 언제나 의미를 새길 생각입니다. 그 괄호 안에는 제게 도움을 주신 많은 분의 이름이 생략되어 있거든요. 언제나 저를 믿고 뒷바라지해 주시는 부모님, 논문 작성에 도움 주신 연구실 선생님들, 저의 가능성을 믿어주시고 이끌어주신 지도 교수님과 총장님 등 모든 분의 도움이 조각조각 맞춰진 결과라고 생각하거든요.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한단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과정 없는 결과는 없다. 경훈 씨는 부단한 자기 극복의 과정을 통해 졸업이라는 하나의 결과를 이뤄냈다. 마지막으로 경훈 씨에게 10년 후의 모습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달라 청했다.
“이제 작은 산 하나를 넘었어요. 앞으로 박사 과정에서는 석사 과정에서 아쉬웠던 디지털 격차 부분을 보완하고 확립해서 좀 더 가시적인 연구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죠. 10년 후의 모습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다 보면 뭔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박사 과정을 마치고 연구원이 될 수도 있고, 대학에 남아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할 수도 있겠죠. 기회가 되면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에서 디지털 정보 격차 해소와 웹 접근성 관련한 정책을 만드는 일에 일조하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또 혹시 압니까? 사제가 되어 누군가의 아픈 마음을 치유하는 삶을 살게 될지도요.”
�출처: 시각장애인을 위한 월간문화교양지 하상매거진 2024년 4월호 (통권 제1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