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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 Jan 09. 2019

나쁜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트라우마

스쿠버다이빙 도중 사고를 당한 사람이 차가운 바다에서 죽어가면서 꿈을 꾸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꿈에서 다이버는 무사히 구조되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차가운 몸을 녹이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보일러를 틀고, 이불을 몸에 칭칭 감아보지만 계속해서 느껴지는 한기는 몸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 다이버는 꿈에서 깼다. 그리고 심해로 끝없이 가라앉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런 착각이 나에게도 있었다. 건드리지 않으려고 머릿속 저 깊은 곳에 꽁꽁 싸매어 던져놓은 기억은 사실 복잡한 타래처럼 다른 기억들과 촘촘히 맞물려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덜컥 심장이 꺼져 내리고 백미터 달리기를 완주한 것처럼 쿵쾅대었다. 낮에는 완전히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정상적인 나로 돌아온 것 같이 느껴지다가도 밤이되면 호흡이 꽉 막히고 숨을 쉬기 어려워 곧 죽을 것 같기도 했으며 남들과 함께 있을 때는 한참 옛날의 일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지다가도 혼자 우두커니 있을 때면 마치 방금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그때마다 나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결국 여기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럭저럭 살아내는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내 마음 한 켠에는 계속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 '혹시 이 모든게 내 잘못은 아닐까?' 라는 작은 생각에서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지는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모든 것은 내 잘못이고, 내가 예민한 탓이고, 나의 노력 부족이고, 이 세상에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이런 생각들은 이불 속에서 또아리를 틀어 내 목을 옥죄어왔다. 좀처럼 쉬어지지 않는 숨을 그대로 틀어막고 세상에서 증발한듯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아이슬란드였다. 죽을 때 죽더라도 마지막으로 아이슬란드의 오로라와 빙하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시규어 로즈의 공연도 다시 보고싶었다. 아이슬란드에서 보는 시규어로즈의 게릴라 공연이라면 더할나위 없을 것이다. 죽음에 대해 유감은 없었다. 하루에도 수 없이 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죽을텐데 자연앞에서 인간의 목숨같은건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다. '왜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자기실현에 그렇게도 많은 의미를 부여할까? 사실 그런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하지만 아픈걸 유난떨며 싫어하는 겁쟁이에다가 의지도 약했던 나는 정작 죽음에 성공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나는 이전의 나로 돌아가기 위해서 심리에 관련된 책을 읽고 나쁜 기억을 떨치기 위한 거의 모든 시도를 해봤다. 책에서 나온대로 편지를 쓰고 소리내어 읽은 다음 태워버리기도 했으며, 눈을 감고 기억을 떠올린 후 나쁜 기억을 봉쇄해 묻어버리는 최면도 받아보았다. 명상을 하며 호흡으로 감정을 다스리려고도 했고 불교서적을 읽으며 용서하기와 흘려보내기를 연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간신히 잠재워놓은 것들은 표면 위로 올라오지만 않았을 뿐 내 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튀어나올 때를 시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내가 아주 조금만 연약해져도 그것들은 딱쟁이가 생겨난 상처들을 헤집고 나와 내 노력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렸다. 이런 과정이 되풀이 되자 나는 정신적으로 아주 연약해져서 사소한 것들로부터 상처를 받게 됐다. 예를 들어 면접을 볼 때 면접관이 나를 압박하기 위해서 한 질문도 나를 상처입혔고, 친구의 작은 불평이나 조언도 나를 상처입혔다. 나는 그런 자잘한 사건들이 나를 인격적으로 모독한다고 생각했고, 세상 모든 것들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따귀맞은 영혼> 저자의 말로는 우리가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 상처받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우리도 그 타인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타인이 우리를 상처줄 수 있도록 우리가 "허용"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본인의 요리실력에 아주 자신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그 사람의 음식을 먹더니 아주 형편없는 음식이라며 당신은 요리사도 아니라고 악평을 했다. 그럴 때 이 요리사는 기분이 나쁠지언정 "내 음식이 맛없다니, 음식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로군" 하며 코웃음치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사람이 본인의 요리실력에 자신이 없었고 항상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고 불안해했던 사람이라면  말에 크게 상처를 받고 분노하게 될지도 모른다.  경우에는 "음식솜씨가 없다" 라는 타인의 평가가 트리거가 된 것이다. 본인 스스로 감추고 있었던 허를 찔릴 경우에 가장 상처받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세상의 모든 것에서 상처를 받게  이유는  스스로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욕하고 경멸해도 나의 편을 들어주고 지지해줘야  부모님이, 나를 가장 상처주고 모욕했기 때문에 나는 자존감이 뿌리채 흔들리는 경험을 했으며, 나라는 사람에 대한 자기확신,  자기효능감도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작은 바람에도 뿌리채 뽑힐듯이 이리 저리 흔들렸다. 한번 잃어버린 자존감을 쌓아가는 과정은 무엇보다도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 이보다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부모님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 내가 한심한 사람이라면 이보다 덜 한심해지도록 노력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수 있었다.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한가지 믿음으로 나는 계속해서 상담을 받고 내 상처를 핥아주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의 나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것은 트라우마 제공자와의 '거리두기' 였다. '거리두기'는 물리적, 정신적 두 영역으로 나뉜다. 트라우마 제공자와는 반드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떨어져 있지 않으면 다쳐서 피가 흐르는 상처에 또 다시 칼집을 내고 또 다시 칼집을 내 계속해서 상처가 아무는 것을 방해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나를 상처 준 사람에게 사과를 받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현실적으로 트라우마의 제공자가 잘못을 뉘우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이 뉘우치고 사과를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치유의 주도권을 가해자에게 빼앗기게 된다. 내가 상처를 극복하고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가해자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트라우마를 극복하기는 커녕 감정을 추스리지도 못한채 가슴 안에 뜨거운 불덩이를 집어삼킨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트라우마의 제공자가 얼마나 뉘우치고 있느냐, 얼마나 변했는가와는 상관이 없다. 그 사람이 내 곁에 존재한다는 자체로 상처는 아물 기회를 잃는다. 상담선생님에게 "나를 구해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했을 때, 선생님은 "그 사람이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라고 물어봤다. 나는 "내가 좋은 사람이고, 멋진 사람이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진심으로 말해주는 사람이요. 그런데 나는 혼자라서 구원받을 수 없을거예요." 라고 하는 나의 말에 선생님은 잠깐 갸우뚱하더니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하는것도 가능해요. 그리고 혼자서 외로움을 극복하는것도 가능해요. 중요한건 주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않을만큼 자기확신을 가지고 자신을 사랑해주는거예요." 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질적으로 거리를 두었다면 정신적으로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 자꾸 그 시점의 기억을 되풀이해서 경험하는 짓을 멈춰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를 연민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겪었던 고통을 자꾸 재경험하려고 한다. 재경험은 그때의 감정을 강렬하게 다시 불러일으키고, 상처는 다시 벌어질 수 밖에 없다. 과거의 고통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발걸음을 잡는 나만의 몇가지 방법이 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계속해서 생각한 것이다. 나는 무력하지도 않고,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지도 않다. 불쌍하지도 않다. 이제 그만 좀 징징대! 그리고 현재의 느낌에 집중한다. 내가 누워있는 푹신하고 편안한 침대, 보송보송하고 따뜻한 이불. 내 곁에 있는 반려동물, 내가 듣고있는 음악, 피우고 있는 담배의 향 등등 현재의 느낌에 집중하면 과거의 기억에서 빠져나와서 현재의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물질적, 감정적으로 거리두기에 성공했다면 천천히 시간을 들여 상처를 열심히 핥아주면 된다. 말해두지만, 하루 아침에 상처가 아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신의 고통이 면역력을 뚝 떨어뜨렸기 때문에 자가치유에도 조금 더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느낌에 계속 집중하다보면 결국 그 때가 온다. 트라우마는 지워지지 않지만, 옅어지고 희미해져서 결국은 눈을 가늘게 뜨고 관찰해보려고 해도 잘 보이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다. 트라우마 자체를 지울 수는 없지만 그것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당신이라는 말이다. 당신의 마음에 따라 집채만한 블랙홀이 될 수도, 엄지손톱만한 먼지가 될 수도 있다. 트라우마가 당신을 덮쳐올때, 정면을 마주하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자. 당신의 생각과는 달리 실체는 너무나 희미해서 보이지도 않는 감정의 잔류 뿐이다. 나는 이럴 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가장 크게 튼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지금 안전하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기로 마음먹고 나 스스로를 격려하는 것은 생각보다 효과가 좋다. 이제 트라우마를 물리친 당신에게 상을 주어야 할 때다. 좋아하는 인형을 껴안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좋아하는 영화를 보도록 하자. 좋아하는 일로 마음을 가득 채울 때 나쁜 기억은 흩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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