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잘 안다. 칼로 물을 베는 게 낫지, 거대한 제군들 앞에 나는 결국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왜 나는 풋풋했던 그 시절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을까?
차라리 화를 내면 나도 화를 낼 텐데 은근하게 돌려서 얄밉게 말하는 ‘시어머니’
그런 시어머니 보다 더 얄밉다는 ‘말리는 시누’
누구 집에 먼저 가니, 선물은 무얼 할까? 이야기만 시작해도 털이 쭈뼛할 정도로 살벌해지는 ‘남편’
눈치 없이 시댁에서 자고 가자고 조르는 ‘아이들’
어느 집이나 꼭 하나씩 있는 예의 없는 ‘조카’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살면서 늘 돈, 돈하고 남들보다 아이들에게 용돈은 가장 적게 주면서 생색은 제일 심한 배가 산더미처럼 나온 ‘이모부’
이 모든 상황이 TV에만 나오는 것이라고 왜! 왜!!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건 코딱지만큼의 현실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막장 드라마는 가벼운 맛보기랄까.
지금부터 다양한 명절의 모습을 이야기하려 한다.
물론 나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건 철저히 나의 지인과 다른 사람의 일임을 강조한다. 나의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단 한 번도 명절에 가족 여행을 가 본 적 없는 A씨. 그녀의 시부모님은 따로 계신다. 차로 30분 거리에 시아버님의 가족들이 모여 산다. 반대 방향으로 30분 거리에는 시어머님이 계신다. 그로 인해 A 씨는 명절 때마다 이 집, 저 집, 요 집을 다니다 시간을 모두 보낸다.
항상 빈손으로 간 적도 없고 싫은 내색 한 번 안 한 A씨는 어른들께는 늘 예의 있게 대했고 힘들어도 티 내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세월이 15년에 이르자 불만이 터질 대로 터진 그녀는 남편에게 내가 이러려고 당신과 결혼한 게 아니라고 으름장을 놓지만 남편은 A씨를 이해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너는 남들 하는 거에 반도 안 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번 명절도 잘 보낼 수 있을지 걱정하는 A씨. 그녀는 그저 “네네~”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녀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친정이라고 예외일까? 그렇지 않다. 시댁은 괜찮지만 오히려 친정에 서운한 B씨는 명절 때마다 스트레스로 인한 두통에 시달린다고 한다. 딸이라고 자신을 너무 편히 대하는 엄마를 보면 남편에게 부끄러워 말도 못 하겠다고 하는 그녀. 친정엄마의 부정적인 말투를 듣고 있으면 자신까지 우울해지고 신세한탄의 끝은 늘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 탓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손주들에게는 집안에 ‘사’ 자 직업 한 명은 있어야 한다며 볼 때마다 아이들에게 의사, 검사되라고 이야기를 하고, 사위는 아들이 아님에도 ‘아들’이라며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시키는데, 장모님에게 불평 한 번 없이 묵묵히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착한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아이들에게 용돈 얼마 주면서도 항상 생색을 내는 자신의 엄마를 보며 그녀는 자기도 먼 훗날 자신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그럴까 봐 겁이 나, 자녀들이 모두 외국에 나가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의 친구 C는 아직 아이가 없는 결혼 3년 차 직장인이다. 이 말만으로도 친구가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모두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일이 더 하고 싶은 친구는 아기를 낳아야지만 끝날 이 고통을 꾸역꾸역 버틴다. ‘아기’ 이야기만 나오면 대역죄인이 된 것처럼 “네, 네...”만을 하며 고개 숙이는 친구는 어차피 시부모님을 뵈러 가던, 안 가던 안 좋은 소리 듣긴 마찬가지니 명절만큼은 차라리 회사에 출근할 일이 생길 것을 간절히 바란다고 한다. 그러면서 직장을 그만 둬야지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도 덧붙였다.
D씨는 몇 해 전, 아빠와 이혼한 엄마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그로인해 집에 가기가 망설여진다고 한다. 자신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이런 상황을 인정해달라며 강요하는 엄마에게 서운하고, 명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하소연했다. 둘이 좋으면 둘이 만났으면 좋겠는데 D씨는 마음이 복잡하고 힘겨우면서도 엄마의 바람대로 하지 않는 자신이 속이 좁은 못난 딸인 것 같다며 자책했다. 그러면서 엄마 남자친구의 선물까지 준비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슴 아픈 고민을 한다고 한다.
E씨는 제사가 끝나면 서러운 눈물이 난다고 한다. 남자들은 껄껄대며 고스톱을 치고, 시누는 아이들 본다며 쏙 빠지고, 남은 여자들은 하루 종일 제사상 준비에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그중 가장 막내인 E씨는 시어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형님과 딱 붙어 기름 냄새가 온몸에 배길 때까지 쭈그려 앉아 전을 부친다. 가지 수는 또 얼마나 많은지 동태 전, 육전, 깻잎 전, 동그랑땡, 꼬치 전 등등 땀이 뻘뻘 나는 데, 중간중간 와서 하나씩 빼먹는 조카들을 보면 꿀밤을 때려주고 싶다고. 허리는 끊어질 것 같고, 다리는 감각이 없지만 그래도 엄격한 시아버지께서 뒷짐 지고 지켜보니 정성 들여 부칠 수밖에 없다. 조상님에게는 항상 예쁘고 반듯한 음식을 올려야 한다며 바깥 음식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E씨의 시아버지라고. 하지만 가장 미운 사람은 고생했다,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는 시아버지를 똑 닮은 남편이라고 한다.
명절의 모습이 이리도 다양하지만, 막상 또 보면 고충은 어느 집이나 비슷하다는 걸,
청춘일 땐 미처 알지 못한 나는 방패도 칼도 아군도 없이 9년의 결혼 생활을 버텨냈다.
낡은 나무 지팡이 하나 짊어지고 안간힘으로 버티며 깨달은 것은
'그래, 이번 생은 처음이라... 내가 엄청난 착각을 했구나.
다음 생은 부디 홀로 잘 먹고 잘 살길 미래의 나에게!!! 텔레파시를 쏜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