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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Jun 06. 2023

궤도 이탈 1

230606


  오늘날 사고는 고도의 기술과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발생한다. 최선을 다해도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수사 기관은 "누구 짓인가" "누구의 잘못인가"를 가려서 처벌하려 한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오히려 모호해진다. - 262p


  <궤도 이탈>의 저자 마쓰모토 하지무가 대규모 사고를 다수 취재한 논픽션 작가 야나기다 구니오를 인터뷰한 내용이다.

  마쓰모토는 대규모 재난 발생 이후 사회 각 영역에서 내놓는 해법을 모두 기각한다. 크게 두 방향으로, 사고 발생 책임을 추궁당하는 기업 측은 실무선의 개인이 저지른 과실을 묻는다. 다른 한 축은 경영진의 책임을 묻는 진보 사회파식 접근이다.

 

  기업에서 문제가 생기면 경영진은 실수나 잘못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일선에서는 경영진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언론은 무슨무슨 '거악'을 지목해 비판하고, 개혁파 정치인들은 '기득권'을 지탄하며 비판 여론을 선동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해 책임을 떠넘기는 경향에 사고 조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 264p


  마쓰모토가 찾는 해법은 이보다 '좁은 길'이다. 유가족 모임의 주축인 아사노 야사카즈를 수년 간 밀착 취재하며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근본 원인이 있다. 그것을 파헤쳐야만 사고를 사회화할 수 있다. 사고의 사회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유가족으로서의 내 책임은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아사노의 말에 집중한다. 근본 해법은 어떻게 찾나. 기업 측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조직 보호에 치중하고 책임 회피에 급급한 기업 임원 내지 실무진을 설득해야 겨우 사고 당시 기업 내부 상황과 관련한 증언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 작업이 간단하겠나. 마쓰모토의 취재가 수년에 걸친 까닭은 아사노의 설득 작업이 수년에 이른 탓이다. 아사노의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재발 방지 대책의 마련이었다.




  아래는 같은 회사 박은하 선배가 2022년 11월15일 페이스북에 쓴 글. 재난 상황에서 '과학 보도'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이 인상깊다. 마쓰모토의 책에서 아사노가 피해자, 유족 측에서 이같은 접근법을 보인 것이라면, 박 선배의 글은 사태를 보도하는 언론 수준에서 어떤 접근을 취할지를 다룬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a9UnTURrFA4Zv2ou5PS4CuqTYJUXm3i3oW2GU1RkcbG3L18wq37mu65aNnZRiXBwl&id=100003070251271&mibextid=Nif5oz


  명명과 관련해 이태원이냐 10·29냐보다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다. ‘이태원’ 혹은 ‘10·29’와 ‘참사’ 사이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을까.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나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사고의 붕괴, 방화, 화재에 해당하는 개념을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가 하는 부분이다. 재발방지를 위해서는 이 가운데 개념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어째서 당연하다는 듯이 이태원 혹은 10·29를 논쟁할 뿐 이태원 혹은 10·29와 참사 사이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을까.
  외신은 Itaewon crush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참사냐 사건이냐보다 더 중요한 건 이태원 ‘군중압착 ’ 사고 혹은 참사라는 점이다. 일본 언론에서는 잡도사고(雜蹈事故)라고 부르며 ‘군중눈사태’로 설명하기도 한다. 잡도는 섞일 잡, 밟을 도로 군중이 섞이고 밟히며 일어난 사고라는 점을 전달한다. 어느 쪽이든 사고가 일어나는 과정, 매커니즘을 설명한다. 이 매커니즘을 잘 설명하고 이름을 잘 붙여야 한다고 한다. 그에 따라 책임이 공공일 수도 있고, 어리석은 군중이 될 수도 있다.
 ... 외신에서 인상적인 점은 충격적인 사고 발생 스트,  희생자 면민, 정부 책임을 묻는 기사와 더불어 이런 군중압착사고의 개념에 관한 기사들이 함께 나온단 점이었다. 군중압착사고란 무엇인가, 왜 일어나는가, 만약 이런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 선후를 따지자면 발생기사 제외하면 이런 과학에 관한 기사와 심리치유에 관한 기사가 먼저 나오고 정부 책임을 묻는 기사가 오히려 나중이었다. 이건 한국 언론의 통상적 정의관과 다르다. 외신의 정부 책임 기사도 누가 뭘 했는지 행적을 세세하게 캐낸 한국 언론보다 훨씬 두루뭉실했다. 물론 외신과 내신(?)의 역할이나 독자 특성, 접근역랑 차이에서 비롯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의 성질을 규명하지 않으면 진상규명 요구는 오로지 정치적 요구로 비춰지게 된다. 그래서 정치적 이유만으로 숨진 이들을 짓밟는 데 서는 이들도 나온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애도를 시도할수록 사회가 분열된다면 애도의 방식을 부르짖는 이들의 책임도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더 잘 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이란 이태원/10·29 (  ) 참사/사고 사이 (  )안에 들어갈 적절한 말을 찾는 것이고, 찾아낸 개념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론이 중요하다. 통상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방향과 다르지만 중요하다.
  그런 식의 접근이 가능하다면, 합동분향소와 명단공개는 진상규명과 사건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유가족을 배려할 여지가 훨씬 넓어지고, 유가족을 최전선에 세우지 않아도 된다. 세월호 참사 때 언론의 실패, 그리고 사회의 실패, 정치의 실패 결과가 유가족을 최전선에 내세우게 된 것 아닌가.
  ... ( )를 채우는 작업을 언론사의 관료조직에서 한다면 누가 해야 할까. 과학 담당의 역할이 필요한데, 국내 언론사들이 대체로 과학 담당을 많이 두지 않는다. 또 과학 담당은 특별한 주제나 이벤트를 위해 있다고 생각하지 이런 참사에 접목할 생각을 못 한다. 반대로 과학적 현상을 먼저 취재할 생각도 잘 못한다. 과학은 과학담당만의 일이라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한국사회 전반의 과학에 대한 인식이나 과학이 생활에 스며든 방식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누구를 강렬하게 질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분명히 알고 가야 한다.
  반증가능한 것이 과학이라고 한다. 어떤 방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면, 즉 선/악의 문제로 접근한다면 (  )를 발견하고 채우는 과정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태원이냐 10·29냐보다 이태원도 10·29도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더 나은 것을 골라내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합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명단과 영정사진도 공개하느냐 마느냐보다 공개가 하나의 선택지라는 것을 합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다만 명단과 사진 등 인격에 관한 권리는 당연 언론이 당사자보다, 당사자와 가까운 이보다 우선권을 가질 수 없다.
  ... 정의로운 내가 악과 싸운다는 마음을 버리면 말이다. 절대선이 아니라 더 나은 대안을 찾으려는 사람만이 과학을 찾아보고 대화를 유의미하게 여긴다.




  <궤도 이탈> 서평을 몇개 찾아보니, "이건 과학기술 논쟁이다. 감정론으로만 얘기하다보면 안전으로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는 말을 꽤 인용해뒀더라. 이 문장이 유가족의 감정적 태도를 겨냥하는 의미로 읽혀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아사노는 "유가족의 책임"을 말하지만, 그 책임은 유가족 스스로 짊어져야할 무게여야지 누가 그들에게 지우는 짐이 돼서는 안된다.




  책 속 '2.5인칭'이란 표현은 기억해두고 싶다.


  보고서 말미에 야나기다 구니오가 인상적인 글을 썼다.
  지금까지의 사고, 재해, 공해 문제에서는 피해자의 존재가 너무 가볍게 다뤄졌다. 원인을 제공한 기업에서는 피해자를 손해배상과 보상을 청구해오는 상대라는 이해관계로밖에 보지 않았다. 사고 조사에서도 전문 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피해자는 경시됐고, 오히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거리를 둬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재발 방지와 안전성 향상을 지도하는 정부도 피해자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말하자면 피해자를 '건조한 3인칭'으로 봤던 것이다.
  그렇게 설명한 끝에 야나기다는 이렇게 기록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풍부한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피해자(1인칭)나 사회적 약자(1인칭) 및 그 가족(2인칭)에 가까운 관점을 지녀야 한다고 느낀다. '이게 우리 부모님, 배우자, 자식들이었다면'이라고 생각하는 자세다. 물론 전문가나 조직의 관점(3인칭)에 요구되는 객관성과 사회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피해자와 유가족을 위한 대응을 나는 '2.5인칭 시점'이라고 부른다." - 3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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