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태안 사창리
서울에서 아침부터 짐을 챙겨 부랴부랴 태안으로 왔다. 소개를 받아 온 곳인데, 마을 굽이굽이 돌아서 포장도 되지 않은 길을 따라가니 이미 네비의 명령은 끝났다.
'어, 여기가 맞나?'
분명히 이 차박지를 소개해주신 분은 이곳이 물도 있고, 산도 뒤에서 포옥 감싸 안듯이 있는 곳이라 굉장히 아늑하다고, 분명히 차박 좋아하는 내가 마음에 들어 할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러나, 정작 차를 몰고 들어오니 전혀 물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3년 전, 내 생일날이었다. 경남 산청에서 마고할매 바위를 찾아간답시고 산 위를 무턱대고 운전해서 가다가 진짜 땀 줄줄 흘리며 후진해서 죽을 뻔하기 직전 내려온 경험이 있어서(초입에서 어떤 양치하던 할매가 나보고 저 산, 그냥 운전해서 올라가도 된다고 했는데, 아니었다. ㅠㅠ 그런데 그렇게 고생해서 수십 분 만에 내려오니 그 할매가 계속 양치하고 있어서 소름 끼쳤던 기억. 혹시 그 할매가 마고신 아니신가!?) 그런 연유로 나는 포장되지 않은 길, 산길 좁은 길에서 운전하는 것이 무섭다. 앞에 차를 돌려 나올 길이 없을까 봐서.
그러나, 꾹 참고 앞으로 좀 더 전진해 들어가니 다행히 깔끔히 포장된 길이 나왔고, 해안가 바닷길을 따라서 옹기종기 차를 세워놓고 옆에 텐트를 친 차박객들이 보였다. 반가웠다! 어떻게 이런 '비밀의 화원' 같은 캠핑지가 있을까. 대학교 1학년 때던가 봤던 영화 <비밀의 화원>에도, 이야기는 다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장면이 있었다. 아픈 소년이 방안에만 갇혀 있다가 어느 소년, 소녀들의 도움을 받아서 처음으로 아름다운 화원을 보았을 때의 환희!
차박 세팅을 하고, 처음으로 테이블과 의자를 펴서 차 옆에 두었다. 그리고, 물은 많이 빠졌지만, 노을이 지는 바닷가를 바라보며 의자에 몸을 맡기고… 뽁, 뽁 하고 조용히 터지는 갯벌 소리가 좋다. 이제 조금 있으면 물이 찬다고 트럭 몰고 다니시며 만 원씩 걷고 다니시는 아저씨가 말씀해 주셨다.
차박지에 들어오기 전, 그래도 이 동네에서 제일 번화한 곳에서 저녁거리를 사들고 오려고 보니 눈에 딱 띄는 '분식집'이 있어서 김밥, 순대, 포장해 가도 불지 않는다는 쫄면을 포장해서 가지고 왔다. 집에서도 매 끼니 해 먹느라 부엌 앞에 종종 대며 서 있는데 뭐 하러 밖에까지 나와서 끓이고 굽고, 거기다가 먹고 나면 정리하고 설거지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차박 형태 자체를 아예 스텔스 차박으로 하고 음식을 포장해 오거나, 음식점이 근처에 있으면 가서 먹는 것으로 계획했다. 그러니 약간의 발품만 조금 팔면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와서 이렇게 바다내음 맡으며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차박하는 이들이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예전에 한참 통영이나 강원도 고성으로 여행 다닐 때, 숙소를 정해야 하는데 '뷰'를 어떻게 잡느냐, 그것이 참 고민이었다. 숙소 창문이 작거나 앞이 턱 막힌 것을 못 참아하는 터라(물론 이렇게 꽉 막힌 숙소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지만) 되도록이면 앞에 자연이 펼쳐진 곳으로 공간을 보는데, 바다뷰는 평균 5~10만 원을 더 줘야 했다. 거기가 고민 포인트... 아, 바다를 보면서 회를 포기할 것인가, 회를 마음껏 즐기면서 바다를 포기할 것인가. 그럴 때마다 바다를 포기했다. 오늘 하룻밤 좀 참으면 바다야 나가서 볼 수 있으니까. 한정된 예산에서 알뜰하게 여행을 다녀야 하는 언니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차박은 그냥 차가 가 닿는 곳이 이렇게 바다뷰이니 얼마나 좋은지. 아직까지 새벽에는 춥지도, 덥지도 않다. 너무나 쾌적한 차박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봄, 꿈의 5월이다.
세븐 일레븐에서 너무나 맛있는 라임 하이볼을 우연히 만나 두 캔 얼른 집어왔다. 내 입맛에 달지도 않고 굉장히 훌륭한 하이볼이었다! 이들을 순대와 함께 즐기고 있는데, 아들 수영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시계를 보니 8시가 다 되었다. 놀라서 전화를 받으니 오늘 혜성이를 데리러 와주시는 분이 누구냐고 물으신다. 나도 기억력이 이제… 오늘 활동지원 선생님이 혜성이 수영 데려다주시고 일찍 퇴근하시는 걸 깜빡한 것이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활동지원 선생님께 이야기를 뭔가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동안 아이 어딘가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일만은 남편 일정과 합쳐 스케줄을 짜서 단 한 번도 어긋남이 없었던 터라 더욱 난감했다. 요즘 진짜 왜 이러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단기 기억력도 점점 질이 낮아진다. 어떤 분은 내가 하는 일이 많아서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애써 위로해 주셨지만 걱정은 조금 된다. 이 '걱정'마저도 또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데에 일조하겠지만… 설마 치매는 아니겠지.
차박지로 오기 전에 '태안 마애삼존불'을 영접했다.
삼존불, 세 분의 부처님을 모신 상으로 가운데 본존불과 양 옆으로 협시 보살을 가리킨단다. 태안 마애삼존불은 가운데 보살님께서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는 보주(불교에서 여의보주 또는 여의주라고도 하고 산스크리트어로는 마니(摩尼)로 불리며 모든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구슬을 의미)를 들고 있다. 오늘도 그 가운데 보살님 두 손 앞에서 두 눈 꼭 감고 또 소원을 빌었다. 다 빌고 나니까 조금 부끄러운 것이 오늘도 '드라마 잘 되게 해 달라'라고 빌고 있더라. 다들 가족들 건강, 아이가 고3이면 아이 대입 필승 이런 것 기도하던데… 이마저도 오롯이 3년 넘게 빌어온 불변의 소원인지라 몇 년만 더 빌면, 이거 보기도 민망한 '노욕'으로 변모하는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밤이 어두워지고, 차 안에서 느긋하게 가져온 와인을 따서 마셨다. 차박을 하는 데에서 가장 멋진 일은 자연과 함께 한다는 것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아늑한 실내를 만들어주는 랜턴의 은은한 불빛이다. 나만을 위한 작은 공간을 밝혀주는 랜턴. 벌레 잡는 랜턴만 하나 은은하게 켜놓고, 불을 다 끄고 잠자리에 들려고 딱 마지막으로 문을 닫다가 그만… 넷째와 새끼손가락이 자동으로 닫히는 문에 끼었다. 어라? 하는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행히 손가락을 움직일 수는 있는 것을 보니 어디가 금이 가거나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자주 듣는 소리가 이것이다. 우리 나이 되면 이제 뼈 조심해야 한다고. 이제 잘 붙지도 않는다고. 한 해, 한 해 내가 나이가 드는 것을 몰랐는데, 그래서 그냥 함부로 뛰어다니고, 별생각 없이 몸을 쓰곤 했는데 요즘은 조금씩 사리게 된다. 그렇게 조심해도 이런 자잘한 사고가 터지는 것이다.
역시 손가락 두 개 불편한 것이 다음 날 차박 짐 정리할 때, 몹시 거슬렸다. 게다가 보상성인지, 오른발 엄지 뼈도 얼마나 아프던지… 수년 전, 왼팔 팔목이 부러졌을 때 며칠 동안 오른발등 통증이 지속되어 왔던 터라 거기에 기인한 통증이 아닐까 하고 예측해 보았다.
다음 날 아침, 손가락과 발가락 아픈 것을 제외하고는 아주 개운한 컨디션으로 산책을 시작했다. 아침 산책은 꼭 차박을 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하룻밤 차 안에서 푹 자고 일어난 후의 산책이야말로 그 맛이 아주 다르다. 선물 같다. 새로 만나는 동네, 우리 집 앞에서는 매일 볼 수 없는 강, 바다, 산… 이 모든 것들이 아주 충만한 행복감을 준다.
특히 이곳은 어느 사이트도 예외 없이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꼭 와봐야 할 가장 큰 이유다. 게다가 캠핑하시는 분들도 조용하고, 나이스해서 좋았다. 천천히 산책을 하면서 다들 어떤 텐트를 쳤는지, 타프는 어떤 걸 쳤는지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직 이른 시각인지라 다들 꿈나라에 가 있어서 어젯밤 '광란 음주의 현장'을 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이기도 하고. 테이블, 의자, 코펠, 버너, 물품 걸이대(감성 캠핑의 끝판왕!), 랜턴, 랜턴 걸이대, 불멍용 화로 등등 어떤 것을 가지고 왔나 꼼꼼하게 매의 눈으로, 아이 쇼핑하듯 둘러보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는 차 주변을 거의 부엌으로 만들어서 음식을 해 먹는 정성까지는 못 짜낼 것 같다. 그저 랜턴 걸이대 하나, 구이바다 하나 사고, 원터치 텐트 작은 것 하나 사서 시선 방해 안 받고 사 온 음식 즐기다 가는 게 맞을 듯. 그러나, 화로대는 좀 욕심이 났다.
'황섬 차박'의 가장 크고도 높은 목표가 바로 '멍 때리기'다. 불멍이든 물멍이든 산멍이든 '멍 때리기'도 연습이 필요하다. 뭐든지 동동거리면서 늘 열심히 하려고 하고, 원래 내가 가진 능력과 용량보다 1.5배에서 2배까지 일을 끌어안고 있어야 안심했던 나는 이제 인생 자전거 바퀴가 내 뜻과는 달리 모터를 달고 마음대로 돌아다녀서 이제는 그 모터를 떼야할 때가 온 것 같았으니까. 빨리빨리, 얼른얼른, 어서어서… 내 입에서 이제 안 나왔으면 하는 말들이다. 그리고 찌그러진 미간도 좀 펴고… '멍 때리기' 연습을 하는 데에 불멍만 한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넷플릭스에서 모닥불이 탁, 타닥 타는 영상만 내보내는 방송이 있는데, 사실 그것도 조금 보다가 '에이~ 소리만 듣지 뭐.'하고 또 다른 일을 집어드는 바람에 '불멍'에 실패했었다.
바다 마을 태안에 왔으니 아침 겸 점심으로 수제비 어죽을 골랐다. '태안 서부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오뎅 두 꼬치와 옥수수를 출출한 김에 간식으로 먹었는데, 그래도 점심은 든든하게 먹고 서울로 출발해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제는 시장에서 옥수수를 한 봉지 5천 원에 판다. 여행할 때 먹는 우동, 라면, 옥수수, 알감자 같은 휴게소 음식들이 참 낭만인데, 가격 보면 후덜덜하다. 인심 좋은 시장에서도 옥수수 5천 원… 이렇게 높이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서울 물가야 말할 것도 없고.
<순천만 어죽>이라는 곳에 왔다. 일단 식당 테이블 하나도 안 끈적거려서 만세! 반찬도 이게 고들빼기김치인지 잘 모르겠는데, 푹 깊게 잘 익었다. 수제비 어죽을 주문해서 한참을 기다렸다. 수제비 모양을 보니 주문을 받고 바로 반죽을 떼어 넣으신 모양이었다. '요즘 어죽을 이렇게 1인분으로도 파시는 분이 있구나.' 하는 것도 반쯤 먹었을 때 알았다. 지방 어디를 가더라도 '어죽'이라고 쓰인 간판만 보이면 꼭 찾아 들어간다. 따끈하고 매콤한 어죽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나면 뱃속이 평안하다. '편안'이라는 느낌도 좋지만, 왠지 '평안함'은 내게 정신적인 안정감도 가져다주는 것 같아서 더 든든하다.
혼자 여행인지라 점심을 먹으면서 김호연의 신작 <나의 돈키호테>를 옆에 두고 읽었다. 재미있다. 김호연 작가는 자기의 에피소드를 살짝 자기 아닌 척 꼬아서 잘 쓴다. 영화판에서 오래 무명으로 있다가 <망원동 브라더스>로 개화했다. 그러다가 <불편한 편의점>으로 만개하고. 차라리 소설로 활짝 핀 것이 이분께는 나았을는지도 모르겠다. 판권 팔고… 그다음은…. 상상만 해도 내가 다 좋다.
영화판 돌아오지 마라. ㅋㅋㅋㅋ 몸값 엄청 높아져서 사례야 심심치 않게 받겠지만, 어디 판권만 하겠나. 그만큼 기대치도 높아졌겠고, 물어뜯는 이들도 많겠지. 어휴, 부럽고, 소설 재밌고, 어죽은 맛있다. 딱 든든한 소주 안주, 가볍고 파리한(피노누아 계열의 예민한 애들…?) 화이트 와인의 마리아쥬로 적당한 어죽이다.
이렇게 나의 충남 태안에서의 1박 2일은 마무리되어 간다.
충남 태안군 이원면 사창리 2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