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번의 헤어핀 로드를 지나고 몇 킬로를 달린 끝에 드디어 'ooty'라는 곳에 도착했다.
'ooty'는'Udhagamandalam'의 약칭이다.
남인도의 타밀 나두 주에 위치한 인기 있는 힐 스테이션으로, 영국 식민지 시대에 여름 휴양지였다. 이 지역은 서부 가츠 산맥에 자리하고 있으며, 고도가 높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하다.
특히 'ooty'에서는 영국 식민지 시대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그중 하나가 증기기관차 'toy train'이다.
출처 - 구글 이미지
나와 휘진, 성민 형제들은 현지 보호자가 되어 주실 선교사님을 만나기 위해 그분의 자택에 도착했다.
하루종일 인도 사람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나는 처음 본 한국 선교사님의 얼굴이 그렇게도 반가웠다.
선교사님께서 조금 늦은 점심을 차려 주셨고, 입맛이 없어 깨작대던 나를 형제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15년 살면서 그렇게 밥을 많이 먹는 사람들은 또 처음 봤다.
당시 입이 짧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달까
후식으로 선교사님께서 망고도 잘라 주셨는데, 처음 먹어 본 망고의 맛이 난생처음 먹어본 충격의 맛이어서 아직도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은 망고를 무척 좋아한다. 인도에 살면서 망고 맛에 길들여졌다.
이제 학교로 들어갈 시간이 다가왔다. 전학 가는 길이 이렇게도 오래 걸리는지, 드디어 학교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해졌다.
학교는 'ooty'가 아닌 'coonoor'에 위치하고 있다.
'ooty'에서 'coonoor'까지 차로 1시간 정도 걸린다.
ooty와 coonoor의 공통점은 바로 차 밭이 유명한 지역이자, 집들이 특이하게 지어져 있다는 점이다.
부산의 감천마을처럼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풍경이 신기했다.
'coonoor'는 타밀나두 주의 휴양 도시라 불리며 닐기리 구릉 해발이 무려 1800m나 된다. 그곳에는 내가 앞으로 유학하게 될 학교 Stanes 가 있다. 1858년에 영국 선교사인 Tomas Stanes가 지은 Nilgiris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이다.(150년 넘음)
학교에 들어가기 전 선교사님과 함께 시장에 들렀다. 나의 학용품과, 책 커버, 잉크팬 등등을 사기 위해서이다. 새 교복을 맞추기 위해 상인이 치수를 재 주시는데 새 학기 기분이 나는 거 같아 신기했다.
물건을 보관할 큰 트렁크와 과자를 담을 tuck box를 구매했다.
tuck의 뜻은 옛날 영국 영어로 표현된 Snack, 즉 과자를 의미한다.
선교사님께서머리끈과 검은색, 흰색 리본을 사시길래 왜 구매하냐고 여쭤봤다. 학교 복장 규제라 내게 꼭 필요하다고 답변하셨다.
전통 학교라 그런지 학교에서 복장 규정을 엄격히 시행하는데 그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바로 여자들은 머리를 양갈래로 하고 리본을 묶는 것이었다.
게다가 학교 이름이 적힌 양말과, 학교 구두 그리고 운동화 bata shoes를 따로 구매해야 했다.
내가 신고 싶은 양말이나 신발을 신지 못하다니.. 그때부터 갑갑함을 느꼈다.
시장 내부
모든 준비를 마치고 학교 입구에 들어섰다.
출처 - 페이스북
'Stanes School' 앞으로 이곳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니! 설레는 마음 보단 걱정하는 마음이 더 앞섰다.
여자 기숙사는 두 개로 나뉘어 있는데, 'Junior dorm'과 'Senior dorm'이다.
당시 7학년으로 들어가야 했던 나는 주니어 기숙사에 배치를 받았다. 기숙사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이 펑 터지면서 내가 어떻게 이런 곳에서 부모님도 없이 생활을 할 수 있냐며 엉엉 울었다.
선교사님께서는 우는 나를 두고 가기에 마음이 쓰이셨는지 계속 달래주셨다.
그때 동양인 얼굴을 한 소녀가 주니어 기숙사에 들어왔다.
선교사님께서는 그 친구를 붙들고 나를 잘 부탁한다며 하셨다. 그 소녀는 나를 보며 "안녕하세요" 라며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고, 울고 있던 나는 순간 너무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한편으론 이 소녀가 한국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알고 보니 그 소녀는 티베트인이었고 이름은 'Lhadon' 나보다 한 학년 위인 선배이자 Senior 기숙사에 지낸다고 했다.
선교사님은 울음을 그친 나를 보며 안심이 되셨는지 내게 작별 인사를 하고 기숙사를 떠나셨다.
작별인사를 함과 동시에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소리죽이며 트렁크 위에 앉아울고 있었다.
짐을 어디에 둬야 할지, 영어도 모르는 내가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하고 있을 찰나
시니어 기숙사에서 티베트인 'Buthi'라는 아이가 찾아와 나의 짐 정리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에게 'Come here'을 한국말로 어떻게 표현하냐고 물어봤다. 당시 영어를 할 줄 몰랐던 나는 대충 그것만 알아들을 수 있어서 일로와!라고 가르쳐줬고, 그때부터 부띠는 나에게 일로와! 일로와! 하며 나의 짐들을 정리해 주기 시작했다. 또 같은 주니어 기숙사에 티베트인 'Pema'라는 아이도 있어서 옆에서 짐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낯선 외국 땅에 같은 동양인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너무 반갑기도 하고 새삼 고맙기도 했다.
기숙사, 식당 들어가는 입구
기숙사로 들어가는 계단 맞은편에 시니어 기숙사가 있다
주니어 기숙사 내부
화장실
기숙사에는 총 20~30명 정도의 사람들과 함께 합숙을 한다.
당시 한국인을 처음 만나 본 아이들은 그런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았고, 이것저것 질문 하였으나 영어를 몰랐던 나는 대답은커녕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물론 우느라 정신도 없었지만
학교를 적응하기도 전에 집에 가고 싶어 지니
마음이 쉽사리 놓이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기숙사 룸메이트들은 나를 챙겨주었다.
어느덧 기숙사에서의 첫저녁식사시간이 되었다. (식당은 기숙사 건물 1층에 있다.)
친구들을 따라 식당 앞에서 기숙사별로 줄을 섰다. 그곳에서 더 많은 기숙사생들을 만날 수 있었고, 다들 내가 신기한 듯 빤히 쳐다보며 쑥덕거리기 바빴다. 당시 사춘기였던 나는 그들이 나를 욕하는 거 같아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기숙사별로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었고, 나는 친구들을 따라 자리에 착석했다.
처음 맛본 인도 음식은 정말 최악이었다.
그런데 나만 싫어하는 게 아니라 옆에 있던 인도 친구들도 다 싫어하는 눈치였다.
주로 먹던 점심
음식을 남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인상을 오만상 찌푸리며 밥을 인안에 욱여넣었고, 음식을 씹고 싶지 않아서 물과 함께 삼키기를 반복했다.
'진짜 최악이다.. 핸드폰도 없고, 밥도 맛없고, 의사소통도 안 되고.. 집에 가고 싶다'
라는 생각만 온종일 머릿속에 맴돌았다.
식사 시간이 끝난 후 다시 기숙사로 올라왔다.
기독교 학교다 보니 매일 밤 각 기숙사마다 기도회를 작게 한다.
기도회 중 나는 속으로 '주님 제발 내일이 오지 않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드렸다.
취침 시간이 다가왔다. 하루종일 정신이 없고, 에너지를 많이 쓴 나는 피로가 쌓인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