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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의 알바
01화
종이 위의 나
Prologue 1
by
초초야
Oct 2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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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는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시간에 시작한다.
이 시기의 나는
오직
일기장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곳은 타인에게 말하기 힘든 자기혐오와 자기기만과 같은 것들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2년 전 가을, 망할 코로나 때문에
심심해
미칠 것만 같은 날이었다.
그 많던
유튜브
영상과
책들에
질려버린지도 오래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방 정리를 하다가, 몇 년 전에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익숙하고도 낯선 일기장을 천천히 넘겼다.
종이 위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다양한 시공간 속의 '내가' 일기장 위에 각인되어 있었다.
일기
위의 나는 달 위를 날았으며,
토성 위를
걸었고,
다시 지구 위로 돌아왔다.
날아갈 듯 행복한 순간이 찾아온 뒤에는 어김없이 버거운 중력의 순간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평온의 길을 되찾아가길 반복했다.
'과거의 나'에게는 무겁게만 느껴지던 순간들이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나 가볍게 느껴졌다.
나의 그릇이 '간장종지'에서 '
밥그릇'까지는
커진
듯 했다.
나란 녀석의 내적 성장에 나름의 뿌듯함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나의
뿌듯함은 얇은 껍질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껍질 아래에는 뿌리 깊은 ‘오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만방자한 '현재의 나'는 일기장 속의 ‘어린 나’의 기쁨과 고통을 가벼이 여기는 중이었다.
불과 몇 년 만에 '어린 나'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행복과 같은 감정들은 완전한 타인의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이러한 감정들이 잘못되었다거나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곤 생각하진 않는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서 나타날 수 있는 흔한 현상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먼지가 쌓인 일기장을 덮으며, ‘과거의 나’보다 하루빨리 더 성숙해지고
싶어졌다. 동시에 조금은 더 천천히 멀어지고 싶다는 모순적인 욕심이 생겼다.
앞으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축적된 시간은 지속적으로 팽창하여 더 큰 간극을 만들어 낼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시에 느꼈던 감정들과 생각들은 더 무감각해질 것이 분명했다.
‘과거의 나’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건 ‘미래의 나’가 아닌 ‘오늘의 나’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다시
,
일기를 쓰기로 다짐했다.
과거의 모습을 영원히 기록하는 사진처럼,
그 순간의 감정들과 생각들을 기록하고 자주 들여다본다면 모순적인 나의
욕심을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날 이후로 대나무 숲에 불과했던 내 일기장은 만남의 광장으로 바뀌었다.
그날의 나는 약속했다.
여러
시간과
공간 속의 '나'들을 종이 위에서 만나기로.
그 후로 꽤나 긴 시간이 흘러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제는 나만
의
고유한
경험과
감정들이 어느 정도 모인 것같다.
일기장 안에 모은 날것의 재료들을 다듬고 요리해서 이제는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고 싶어졌다.
그렇게 해야만 다음 페이지의 ‘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이야기가 그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까진 바라지 않는다.
단지 나와 비슷한 시간을 지나왔거나 지나갈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을 뿐이다.
그들이 나의 이야기를 읽으며 한번이라도 피식 웃을 수 있다면, 다시 한번 달 위를 날 수 있을 것 같다.
keyword
일기장
종이
자기혐오
Brunch Book
흐름의 알바
01
종이 위의 나
02
회피성 결정장애
03
수능이 끝나고 난 뒤
04
추운 겨울 늦게 일어난 아가 새
05
첫 출근의 기억
흐름의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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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로 태어난 김에> 출간작가
10년째 여행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독립출판사 '초초'를 운영하고 있으며, 신간 에세이 <먼지로 태어난 김에>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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