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초야 Oct 26. 2022

종이 위의 나

Prologue 1

나의 이야기는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시간에 시작한다.

이 시기의 나는 오직 일기장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곳은 타인에게 말하기 힘든 자기혐오와 자기기만과 같은 것들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2년 전 가을, 망할 코로나 때문에 심심해 미칠 것만 같은 날이었다.

 많던 유튜브 영상과 책들에 질려버린지도 오래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방 정리를 하다가, 몇 년 전에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익숙하고도 낯선 일기장을 천천히 넘겼다.

종이 위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다양한 시공간 속의 '내가' 일기장 위에 각인되어 있었다.


일기 의 나는 달 위를 날았으며,

토성 위를 걸었고,

다시 지구 위로 돌아왔다.

날아갈 듯 행복한 순간이 찾아온 뒤에는 어김없이 버거운 중력의 순간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평온의 길을 되찾아가길 반복했다. 



'과거의 나'에게는 무겁게만 느껴지던 순간들이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나 가볍게 느껴졌다.

나의 그릇이 '간장종지'에서 '밥그릇'까지는 커진 듯 했다.

나란 녀석의 내적 성장에 나름의 뿌듯함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나의 뿌듯함은 얇은 껍질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껍질 아래에는 뿌리 깊은 ‘오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만방자한 '현재의 나'는 일기장 속의 ‘어린 나’의 기쁨과 고통을 가벼이 여기는 중이었다.


불과 몇 년 만에 '어린 나'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행복과 같은 감정들은 완전한 타인의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이러한 감정들이 잘못되었다거나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곤 생각하진 않는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서 나타날 수 있는 흔한 현상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먼지가 쌓인 일기장을 덮으며, ‘과거의 나’보다 하루빨리 더 성숙해지고 싶어졌다. 동시에 조금은 더 천천히 멀어지고 싶다는 모순적인 욕심이 생겼다.


앞으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축적된 시간은 지속적으로 팽창하여 더 큰 간극을 만들어 낼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시에 느꼈던 감정들과 생각들은 더 무감각해질 것이 분명했다.

‘과거의 나’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건 ‘미래의 나’가 아닌 ‘오늘의 나’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다시, 일기를 쓰기로 다짐했다.

과거의 모습을 영원히 기록하는 사진처럼, 

그 순간의 감정들과 생각들을 기록하고 자주 들여다본다면 모순적인 나의 욕심을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날 이후로 대나무 숲에 불과했던 내 일기장은 만남의 광장으로 바뀌었다.

그날 나는 약속했다.

여러 시간과 공간 속의 '나'들을 종이 위에서 만나기로.



그 후로 꽤나 긴 시간이 흘러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제는 나만 고유한 경험과 감정들이 어느 정도 모인 것같다.

일기장 안모은 날것의 재료들을 다듬고 요리해서 이제는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고 싶어졌다.

그렇게 해만 다음 페이지의 ‘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이야기가 그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까진 바라지 않는다. 

단지 나와 비슷한 시간을 지나왔거나 지나갈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을 뿐이다.

들이 나의 이야기를 읽으며 한번이라도 피식 웃을 수 있다면, 다시 한번 달 위를 날 수 있을 것 같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