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얼마 남지 않던 10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잠이 덜 깬 몽롱한 아침 1교시, 몇 주 뒤면 끝날 수능에 긴장과 들뜸이 뒤섞인 분위기였습니다.
당시 문학 선생님은 무섭지만 따뜻한 분으로 인기가 많았어요. 은퇴한 맹수 같은, 낭만을 간직한 선생님이셨죠. 선생님은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창밖을 바라보며, 수능이 끝나고 성인이 되면 두 가지를 꼭 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아르바이트를 할 때 근로계약서를 꼭 작성할 것. 둘째, 혼자 여행을 떠나볼 것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혼자여행에 대한 로망이 생긴 게. 혼자 여행을 하고 오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고, 독립적인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렇게 저는 20살 여름, 제주도로 첫 혼자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럼 첫 혼자 여행은 어땠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100점 만점에 50점이었습니다. 혼자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는 것도 어려웠고, 낯선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자는 것도 불편했으니까요. 혼밥과 혼술이라는 신조어가 막 생겨나던 시절이라 더 어색했던 기억이 납니다.
뚜벅이로 한여름 제주도 여행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카카오택시가 활성화된 것도 아니고, 여행 루트도 잘 짜지 못해서 30분 넘게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였죠. 지금 같았으면 숙소에 짐을 맡기고 가볍게 다녔겠지만, 당시엔 여행 초보라 하루 종일 짐을 들고 다니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가곤 했어요.
무엇보다 아쉬웠던 점은 멋진 풍경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그래서가족과 친구들에게평소에는 하지 않던 영상통화를 걸고, 단톡방에는 쉴 새 없이 사진을 올렸습니다. 해가 지고 숙소에 도착하면 할 일은 더 없어졌어요. 씻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다 잠들 뿐이었죠. 그때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던 것 같아요. 혼자 있는 시간이 낯설고 어색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기억이 납니다.
여행 마지막 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같은 방에 있던 언니에게 용기를 내 말을 걸었고, 함께 동행하게 됐습니다. 저보다 여섯 살 많은 그 언니는 혼자 여행도 척척 해내고,혼자 액티비티도 잘 즐기는 제가 되고 싶은 어른이었어요. 하지만 여행에서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었다는 생각에 신이 나, 거리 조절을 못하고 언니를 피곤하게 했던 기억이 나네요. 올레시장에서 헤어지던 언니의 개운한 표정을 보고 나서야, 하루 종일 저를 맞춰주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깨달았어요.
혼자 여행을 다녀온 것에 대한 성취감은 있었지만, 그 과정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주도 이후로 몇 년 동안 혼자 여행을 가지 않았고, 저는 혼자 여행이 맞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죠.
몇 년 뒤, 진로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던 시기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전공 수업이 휴강되었고, 금요일 공강까지 이용해 장기여행을 떠날 기회가 생겼습니다. 아쉽게도 시간이 맞는 사람이 없어 홀로 떠나게 되었죠. 그렇게 별 기대 없이 떠난 여행에서 혼자 여행의 즐거움을 깨닫게 되었어요. 이번엔 혼자 있는 시간이 정말 재미있었어요.그동안 친구들과 다양한 곳을 다니며 경험을 쌓은 덕분이기도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는 법도 조금씩 익히고 있었기에 더욱 즐겁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혹시 여러분도 혼자 여행을 해보고 싶거나, 이전에 혼자 여행을 했는데 만족스럽지 않았던 기억이 있나요? 그렇다면 별건 없지만, 저의 혼자 여행 노하우를 공유해 드릴게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1. 여행일기 쓰기
- 하루가 끝나고 숙소에서 씻고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채 일기를 써보세요. 또는 여행 중간에 카페에서 쉬며 적어도 좋습니다. 오늘 무엇이 좋았고, 싫었는지, 왜 좋았는지 하나씩 적다 보면 나와의 여행이 더 즐거워질 거예요. 저는 이때 쓰던 여행 일기가 계기가 되어, 일기 쓰는 습관이 몸에 배었습니다.
2. 책 읽기
- 아무래도 최고의 여행 친구는 책인 것 같습니다. 기차나 비행기 등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에 좋고, 언제든 펼쳐볼 수 있으니까요. 물론 우리에겐 스마트폰도 있지만, 독서가 주는 멋이 있잖아요. 특히 인터넷이 안 되는 여행지에 가거나 디지털 디톡스를 하고 싶을 때는 독서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거나 이국적인 경험이 가득한 여행에서는 자극이 많아 책에 집중하기 어려울 때도 있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늘 한 권씩은 가지고 다닌답니다.
3. 노트북 하기
- 일주일 이상 여행할 땐 늘 노트북을 챙깁니다. 현지에서 살아보는 듯한 여행을 즐기는 편이라, 동네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별다른 작업을 하지 않아도 기분이 좋더라고요. 사진이나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도 좋고요. 노트북만 있으면 시간이 정말 잘 가는 것 같아요.
4. 새로운 사람 만나기
- 혼자 여행하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가 쉬워집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사진을 부탁할 일도 많고, 숙소비를 절약하려고 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할 때도 많아서 자연스레 사람을 만날 기회가 늘어나죠. 물론 좋은 사람도 있고 안 좋은 사람도 있지만, 운이 좋게도 저는 대부분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 같아요. 놀 때는 다들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나이가 들수록 나와 맞는 사람 또는 나와 비슷한 인생의 사람만 만나게 되는데, 여행은 정말 다양한 인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거든요. 저는 이 세상에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았답니다.
5. 혼자 있고 싶을 때까지 있기
- 혼자 여행의 최고 장점인 것 같아요.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고 싶은 순간까지 있어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나와 내가 집중하는 외부세계에만 신경 쓸 수 있어요. 저는 혼자서 전시를 보거나 바다를 보는 걸 좋아하는데, 이때야말로 현재를 온전히 느끼며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혼밥도 잘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혼자서도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혼자 여행의 고수가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이 모든 행위 뒤에는 혼자서도 잘 해내고 잘 살아가는 제 자신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는 것 같고요. 여러분도 혼자 여행을 해보셨다면, 그 경험이나 꿀팁을 공유해 주세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