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글은 에세이 '모든 요일의 여행'에 나오는 운문입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기 때문에 같은 여행은 없다는 의미이죠. 이 글을 읽고 나자 반대로,같은 여행지만큼 변화한 나를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제주도의 세화리인데요. 학교 다닐 때 매년 했던 건강검진처럼, 제 마음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측정할 수 있는 신장계 같은 곳이었죠.
그래서 오늘은 세화리에서 적어둔 일기들을 모아 왔어요. 나를 더 잘 알게 해 주고, 좋은 추억을 남겨준 세화리에서의 기록들을 여러분과 나누자 합니다. 2016년부터 여행 일기를 쓰기 시작한 탓에, 스무 살 때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후의 순간들이라도 함께 느껴보시면 좋겠습니다.
2020년 6월 - 친구들과 종강여행
대학 친구들과 종강여행으로 제주도에 왔다. 첫 일정은 세화리였는데, 가는 날이 장날인 건지 세화시장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수많은 농수산물과 꽃무늬 옷들을 신기하게 구경하다가 소품샵을 발견해 귀여운 소품들을 구경했다. 그러고 나서 세화해변에서 사진을 찍다가, 맑고 파란 바닷물에 매료되어 한참 동안 발을 담그고 있었다.
2020년 11월 - 취업 전 제주도 2주 여행
오늘, 스무 살 때 걸었던 길을 다시 걸었다. 나무 사이로 붉은 노을빛이 스며들던 늦여름 날의 풍경이 지금도 생생하다. 오늘은 초겨울 대낮이라 그런 감성은 없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이 길은 고요하고 아름답다.
스무 살의 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도 외로워했는데, 오늘의 나는 행복하기만 했다. 그때의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어색해했던 것 같다. 예쁜 당근밭을 지날 때마다 친구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풍경을 보여주고, 계속 전화를 걸곤 했다. 오늘은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나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왜 그런 날 있지 않은가? 노래가사가 유독 잘 들리는 날. 그날이 그랬다. 아이유 팔레트의 "이제 좀 알 것 같다"는 가사가 꼭 내 이야기 같았다. 20살이었던 내가 25살이 되었기도 하고, 노래가사처럼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조금 더 알게 된 덕분일까?
5년 후의 내 모습이 기대된다. 지금처럼 꿈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은 30대가 되었으면 한다.
2022년 11월 - 연차 쓰고 제주도
작년에 이어 올해도 지원이와 함께 제주도에 왔다. 오늘은 동쪽을 돌아보기로 해서, 오전에는 우도를, 오후에는 세화리에 갔다. 작년에는 렌터카가 없어서 불편했는데, 올해는 지원이가 운전을 해 준 덕분에 편하게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2년 전 혼자 세화리에 왔을 때 마음에 들었던 가게, ‘여름문구사’에 지원이를 데려갔다. 다행히 지원이도 이 가게를 좋아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어울릴 만한 엽서를 골라 편지를 쓰기로 하고, 세화 해변이 보이는 카페로 향했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편지를 썼다. 아래는 지원이에게서 받은 편지다.
To. 27살의 초초
27살의 초초야 안녕~ 27살의 지원이야ㅎㅎ 우리가 알게 된 지도 벌써 10년, 햇수로는 11년째다. 이렇게 긴 시간이 지났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우리 같이 늙어가고 있다! 그렇지ㅎㅎ
17살의 초린이도 정말 멋있었는데, 27살의 초린이는 더 멋있어서 만날 때마다 자극을 받아ㅎㅎ 37살의 초린이는 어떤 모습일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해♥ 그러니까 그때도 우리 함께 하자!!
17살 때의 우리가 이 정도로 가까워질지, 이런 소중한 인연이 될지 몰랐던 것처럼 37살의 우리 관계도 참 궁금해. 그래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우리가 함께할 거라는 거지! 지금 너와 함께 있는 이 순간도 너무 소중한걸! 계획 없는 여행이지만 어떻게 모든 순간이 다 마음에 들 수 있지? 너와 함께여서 더 좋았던 것 같아. 카페 밖에는 청청으로 옷을 맞춰 입은 가족들과 거대한 레트리버, 그리고 물놀이를 하는 노부부가 보여. 너무 예쁘다ㅎㅎ 남들이 보는 우리도 저렇게 귀여웠겠지??? ㅋㅋㅋㅋㅋ 내년도, 내후년에도 함께하겠지만, 리니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다 소중해… 우리의 젊은 시절을 더 많이 봐주고, 더 많이 기억해 주자!! 어제 게스트하우스에서 얘기했던 거 기억나? 좋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사람들이 모인다고…ㅎㅎ 너희라는 좋은 친구들을 만난 건 나도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히히 10년 뒤에도 꼭 같이 제주도에 오자!
from. 27살의 지원이가♥
지원이의 편지를 읽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지금은 직장이 멀어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오랜만에 만나도 늘 편안하고 좋은 친구다. 지원이 덕분에 세화해변에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이 쌓였다.
2024년 06월 - 퇴사 후 제주 1달 살기
예상치 못한 순간에 세화리를 지나갔다. 이번엔 혼자도, 친구도 아닌, 엊그제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함께였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바람에 아주 잠시였지만, 4년 전 핸드폰에서 아이유의 '팔레트'가 나왔던 그날처럼 오늘은 아이유의 '블루밍'이 흘러나왔다.
차는 골목길을 빠르게 지나 시원하게 펼쳐진 세화해변으로 향했다. 창문을 모두 내리고, 음악 소리가 바람에 묻힐 만큼 크게 틀어둔 채 해안도로를 달렸다. '블루밍'과 함께 펼쳐진 세화리의 푸른 바다는 숨이 멎을 듯 아름다웠다. 바람, 파도, 그리고 음악이 하나로 어우러져 영원히 기억될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평소의 나와 친구들이라면 이렇게 큰소리로 노래를 듣거나 창문을 열지 않았을 텐데, 다른 사람 차를 탄 덕분에 새로운 경험을 해봤다. 여행은 늘 나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벌써 1년 뒤면, 2020년에 다짐했던 5년 뒤 그날이다. 그때 나는 이곳에 누구와 있을까?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단골 카페나 단골 술집처럼, 나만의 단골 여행지가 있다는 건 큰 힘이 됩니다. 도시와 사람에 치여 잠시 나를 잊더라도, 그곳에 가면 다시금 나를 찾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저에게 세화리가 그런 곳이었듯, 여러분에게도 몇 번이고 다시 찾게 되는 여행지가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