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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Sep 03. 2020

에로스의 농간에 놀아나봅시다

사랑과 욕망의 경계에서

누군가를 간절히 원했던 경험이 있나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감각 말이죠. 잔뜩 차오른 마음 탓에 그 사람, 혹은 주변에서 스치기만 해도 속절없이 쏟아질 것 같은 커피잔 같은 상태가 되죠. 그 사람이 근처를 지날 때면 그에게만 반응하는 결계가 형성되는 기분이 듭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했던 순간은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됩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 속 국수를 사러 가는 길목에서 스치는 첸과 차우처럼요. 주고받은 말과 눈빛을 머릿속에 몇 번이나 돌려볼 때면 황홀한 기억과 나를 괴롭히는 트라우마를 분간할 수 없게 됩니다.       

        

영화 <화양연화>는 쉬이 가까워질 수 없는 두 남녀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영화입니다. 이들의 관계는 자신의 배우자가 상대 배우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차우와 첸은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과정을 역할극을 통해 추적하죠.     


하지만 배우자의 외도를 뒤쫓던 차우와 첸은, 아이러니하게도 서로에게 빠져듭니다. 그들이 언제부터 서로에게 마음을 뺏겼는지는 저마다 의견이 다를 겁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공고한 듯 보이지만, 찰나에 전혀 다른 방향으로 번지니까요. 마치 원자핵을 둘러싼 불안정한 전자와 같죠.        



       

미숙하고 어리석었던 제 지난날을 떠올립니다. 몸과 마음이 오로지 한 사람을 향했던 시간을요. 그 사건으로 인해 온 신경이 한 사람을 향한다는 표현을 이해하게 됐죠. 속수무책으로 번지는 감정을 걷어내려 했던 행동들은 쏟아지는 물을 손으로 막아내려는 그림에 흡사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성적 긴장감이었던 같습니다. 추측형 어미를 붙일 수 밖에 없는 건 애정 비슷한 감정도 싹텄기 때문입니다. 온몸과 정신이 그에게만 반응하는 자기장이라도 생긴 양 감응했죠. 저는 몸 안에 흐르는 정체불명의 감정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추종하고, 또 질타했습니다.      


제 이야기는 과거완료형이지만, 성적 욕망에 대한 많은 의문을 남겼습니다. 세상은 자신의 욕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분별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종종 사랑과 욕망의 숲을 헤맵니다. 온몸의 신경세포가 한 사람을 향할 때, 이것이 사랑인지 성욕인지 분간하는 일은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당신은 사랑과 욕망을 뚜렷이 구분할 수 있나요? 사랑과 욕망 사이에는 뒤틀린 미끄럼틀이 자리합니다. 둘은 유동체처럼 움직입니다. 욕망이 사랑으로 번지기도, 사랑이 욕망으로 추락하기도 하죠. 둘의 증상은 쌍둥이처럼 닮아있습니다. 성애는 둘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하죠.         

       



에로틱한 사건은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사랑과 욕망은 명확한 것들 사이에서 경계를 흐리며 질서를 교란합니다. 키스를 한층 깊은 관계로 가는 길목으로 보는 건 입술이 안과 밖을 가르는 신체 부위이기 때문이라고 하죠. 흔히 누군가와 연인이 될 수 있는지 가늠할 때 키스할 수 있는지 묻는 건 이런 이유일 겁니다.  

   

에로스는 무딘 정신을 부드럽게 파고들고, 때론 날카롭게 급습합니다. 에로틱한 사건은 언제나 모호한 지점에서 탄생합니다. 성애는 예술 혹은 외설로 딱 재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본래의 야한 성격을 드러내죠.      


확실한 건 에로스를 논함으로써 희뿌연 정신을 닦아낼 수 있다는 겁니다. 몸은 당연하고요. 예술과 포르노를 정연하게 분별하는 건 오히려 무모한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자고요. 야한 이야기만큼 정신이 또렷해지는 소재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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