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들 seondeul Oct 02. 2020

2020과 3/4 승강장

7/8/9월의 일기

2020과 1/4 승강장   https://brunch.co.kr/@chocowasun/80
2020과 2/4 승강장 https://brunch.co.kr/@chocowasun/88








7.1.수

장마가 끝나고 날이 갠다. 더위를 각오했는데 벌써 지는 느낌이다. 마당이 예쁜 계절이다. 많이 기록해두자. 


     




7.7.화

그림 그리러 오는 친구 왈. “홍쌤은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셔. 오고 싶을 때 오시면 만날 수 있지만, 일부러 찾아가는 건 안 돼. 예의가 아니거든. 오길 바라며 기다리며 오실거야.” 나니아의 아슬란인줄! ㅋㅋㅋ





    

7.8.수

시간이 정신없이 흘렀단 말도 식상하다. 마스크 땜에 콧잔등이 반으로 나뉘었다. 춤추는 옥수수 잎만 봐도 평온해진다. 세상만사 초초할 게 뭐 있나. 세상 부지런한 엄마도 스스로 게으르다 하는데. 찐 게으름벵이인 나는 입을 조가비마냥 묶어둔다. 모쪼록, 많이 느끼고 때론 써놓을 것. 그거면 충분하다.      






7.13.월

쫌쫌따리에서 빵이 나온다는 걸 기억하자. 한방 빵은 사지도 않은 로또 같은 것. 티끌을 모아보자꾸나 에헤라디야. 


어제는 비가 어찌나 오는지, 집 잠기는 거 아닐까 잠기면 빨리 창고에 튜브 꺼내야지 생각하다 잠들었다. 비가 오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고양이들이 정성 들여 털을 다듬듯 마음을 돌봐야 한다. 잘 살펴보고, 습도 조절, 영양 섭취 체크!      






7.15.수

아빠: 네가 우리 집의 등불이다!

나: 등불까진 아니고 촛불... 근데 그 통통한 하얀 초 아니고, 케이크에 꽂는 가느다란 초에 타고 있는 촛불...ㅎ

    





7.21.화

가만히 있어도 등에 땀이 주룩주룩 흐르는 더위다. 초복이 지나더니 드디어 여름이다. 이제 햇볕의 각도가 다르다. 건강하게, 기준은 스스로에게. 벌써 곧 8월이네, 가을도 충만하길.      






7.28.화

어른이 되지 못한 채로 짐을 짊어지면 그 짐들도 힘들다. 모든 상황을 더 잘 이겨내어 괜찮아지길, 살얼음을 빌뿐이다. 


뭐 좀 읽고, 움직이고, 운동하고, 잘 챙겨 먹고. 건강과 마음을 돌보는 일이 점점 전부라 여겨진다. 과몰입으로 자기 연민에 빠졌던 때도 있지만, 화살표가 내면으로 향해있는 건 장점이라 생각한다. 섬세히 알아내고 거기에 시간을 붓자. 평생에 걸쳐해야 할, 어떤 업적보다 어렵고 중요한 일이다.      






7.30.목

어제는 비가 무섭게 왔다. 새벽에 엄마 아빠 깨우고, 버터에게도 의지해보려 했으나 북어만 먹고 튀었다. 암막 커튼 사이로도 번쩍번쩍 가까이에 번개가 있는 듯했다. 비가 총알 같아서 지붕이 그대로 체가 된다 하더라도 놀라지 않고 바로 도망가려 했다. 몇 해 전 폭우로 집 뒤에 논이 터져서 대문 앞까지 물이 찰랑거리던 장면이 반복 재생되었다. 잦아들다 쏟아지고를 반복했는데, 두려워하다 어느 순간 잠에 들었다.      



-

“매일 똑같지, 잘 지내고 하루 종일 사부작 거려.”

“매일 똑같다는 말과 잘 지낸다는 말은 양립하기 힘들지”     



-

습기에 물감이 녹아 젤리가 되어버린 우기지만 컨디션이 괜찮다. 몇 해 전의 나였다면 젖어버린 발에도 깊은 수심을 느끼며 모든 게 하기 싫어지는 기분에 좌절했을 텐데. 어느새 변한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 그 무엇보다 뿌듯하다. 드디어 비에 짜증 내지 않는 사람이 되다! 음, 잘 살고 있군.      






8.3.월

나는 휴가가 아닌데 휴가인 사람들이 많아 한가롭다. 여유가 있을 때 미뤘던 생각들을 정리해야 한다. 엄마 왈, 밥을 차리고 먹고 치우는 일이 수행이자 고행이다. 공감했다. 그것이 인생의 전부일 수 있다. 어차피 연료를 넣어 작동되게끔 프로그래밍되어있는 동물인 이상 다 같다.     

 

템플스테이 했던 절은 신입 스님들이 다 도망간다 했다. 일을 하도 시켜서. 일상이 수행이고, 또 고행이다. 그걸 잘 치러내는 것만으로도 멋진 하루!     






8.4.화

번개 맞은 에어컨을 고치고 시원한 바람 아래 습기를 말리며 일기를 쓴다. 모든 종이와, 심지어 책상도 눅눅하다. 틀면 콧물 나고 끄면 땀나고, 아 어쩌란 말이냐! 4월에도 눈이 오는 제천 키즈로서 추위는 자신 있었는데 골았는지 더위 추위 다 탄다. 강해져라!     


아빠는 정말 가-끔 총명한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그제는 갑자기 우울증 이야기를 꺼냈다. 인생에 누구나 한 번쯤 오며, 시계 같아서 힘들 때는 그저 한 시일뿐이라 생각하고 넘겨야 한다. 그래야 세 시, 네 시가 오는 거라며. 너에게도 올 것이고, 극복 혹은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넘겨라. 


힘들 때 넘길 수 있는 장치를 많이 설치해야겠다 생각했다. 보험비만 꼬박꼬박 낼 게 아니다. 건강할 때 마련한 구석이 벼랑 끝의 나에게 안전장치가 되어줄 것이다. 그림, 운동, 식물, 책, tv, 음악... 그런 게 코너에 몰렸을 때도 유효 할까. 그때는 일기를 쓰지 않아야지. 그저, 넘기자.      






8.5.수

지겹게x2 비가 온다. 오늘은 입추. 허무하게 더위가 갔다. 하지만 가을볕에 곡식과 과일이 익는 만큼, 아직 완전한 끝은 아니다. 콧잔등에 타는 것도 항상 가을이었다. 밤 줍고, 벼 노래지는 계절이 벌써 성큼, 긴 비 끝에 올 사랑하는 가을을 손꼽아 기다린다.     






8.14.금

한국기행 다큐멘터리 중; “수박 속을 알겠어요, 사람 속도 모르는디!”     

비가 그친 틈엔 풀벌레와 매미가 운다. 며칠간 안예은의 ‘편지’가 맴돈다. 수만 번 구간반복된다. 오~ 멈춰버린 시간 속에~ 선풍기 바람 아래 잠을 청할 때에도, 생각할 때도, 밥을 먹고 기대어 있을 때도. 지나간 시간들을 되짚어봐서 그런가. 그렇게 추억형 인간이 아니라 여겼는데 꽁쳐놨던 기억 감정 사람 다 뒤섞여 밀려든다. 그 파도 거품에 발을 얕게 적실 수밖에.      





8.16.일

온앤오프 심은우 편 “매트 위에서 기른 힘과 유연함이 하루의 힘과 유연함이 되길.”     




8.22.토

“제가 꿈 해석 잘하거든요, 기억나는 꿈 있어요?”

“맛있는 거 먹는 꿈!”

“음 그건 앞으로 선생님이 더 크면요~”

“나 다 컸는데 더 커야 돼?”

“그럼 할머니가 되면요~ 지금 있는 걸 소중히 여기며 더 기록하게 되는 꿈이에요.”

(속으로 용하다 생각함. 복채 줄 뻔)

“오 그래? 마음에 든다! 할머니 되어서 진짜 맞는지 알려줄게!”

“넹”     






8.26.수

더위, 약한 두통, 비염, 성취감, 평온함이 공존하는 8월 말. 여름의 끝자락이라고 하기 머쓱하게 덥다.      

이소라의 노래가 좋은 내가 어른이 된 것만 같다. 아빠가 입에 댈 일 없던 칼국수를 먹게 되거나, 고기를 먹는 엄마 등, 입맛은 변해온단 걸 목격하며 자랐지만, 나의 상황이 되니 낯설다. 덥고 흐느껴서 졸린 노래라 생각했는데. 한 적도 없는 이별을 겪게 하는 절절한 가사, 현악기 같은 목소리 모두 이 여름에 녹아들었다. 역시! 오래 해야 해. 스위치가 눌릴 때까지!      






9.4.금

안 쓰니 편해서 어느새 금요일이다. 일기만 들고 왔다 갔다 하고 펴진 못했다. 틈을 내서 쓴다.      

그 사이에 인생 최초로 살을 꿰맸다. 끔찍. 내가 내 흉터를 못 본다. 병원에 가면 다들 어디 하나 감고 있어서 아픈 게 보통인 세상이다. 휘릭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반나절이 간다. 나약한 인간이여. 

그리고 완연한 가을이다. 행복! 빨리 발이 나아 부지런히 가을 공기를 만끽하고 싶다.      






9.10.목

글씨와 서늘한 바람, 적당한 따뜻함은 평온함을 준다. 할 일을 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 잘 자고 일어나, 자기 전 책을 읽고, 하는 일들이 평화롭다. 자주 써야 쓸 말도 생기는구나. 여하튼, 날씨가 좋아 좋다.   





   

9.15.화

새벽에 일어나니 좋다. 그러나 전 날의 굳은 다짐+옅은 잠으로 인한 말도 안 되는 악몽 후에야 가능... 꿈을 오십만 개나 꿔서 상큼함과는 별개로 피로했다. 


날씨가 매우 좋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일 년에 몇 안 되는 귀한 공기. 좋다 좋다 말해야 기억에 남는다. 날씨가 좋네요.      






9.16.수

부슬비가 오는 수요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소란스럽다. 이 또한 복이다.  








작가의 이전글 2020과 2/4 승강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