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1/12월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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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4.목
새소리마저 음악 같은. 믿기지 않는 날씨의 연속이다. 책상을 밖에 빼두고 그늘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상. 애기들은 초흥분 상태로 소리를 지르며 좋아한다. 잘 먹고 잘 자고, 그림도 더 그려봐야지. 긴 겨울 주어지는 짧은 행복이 평온하고 좋다.
9.29.화
추석이라는 긴 휴일을 앞둔 날. 평소와 같은 일주일을 닫아본다. 유난히 힘들게 지나간 듯하다. 그냥 지치는 면이 있었다. 언제나 즐거울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매일 날씨가 좋다면 그건 또 사랑스럽지 않으니까. 인생이야 랄라라.
10.6.화
노니까 시간이 금방 간다. 연휴 동안은 잘 먹고 잘 자고 조금 그리고 만들고 했다. 계속 이렇게 살라고 해도 살려나? 어른도 방학이 필수다. 작년엔 가을 방학을 했는데, 올해는 일주일의 연휴로 충전한다. 발이 차가운 게 긴 겨울이 올 차례다. 예전엔 당연히 겨울이 더 좋았는데, 문을 열어두고 창밖을 내다보는 하늘을 보내다 보니 여름이 낫다. 이제는 추위 더위 다 타는 슈퍼 개미 할미!
어제 읽은 책이 너무 아름다워 여운이 남는다. 카야를 보고 몰입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자연 풍경의 묘사가 끝이 없는 늪지의 지평선과 같았다.
나도 여기의 풍경을 좀 묘사해볼까. 오늘의 풍경. 곶감을 널어놨을 때 몰려왔던 갈색 나비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덕분에 버터가 풀 사이의 공중으로 1미터씩 뛰어오른다.
10.7.수
틈틈이 따놓은 콩을 까서 말려서 골라서 페트병에 담았다. 아빠가 많다고 두부 만들자고 했는데 한 조각 먹을 수 있을 듯 ㅎㅎㅎ
멜란포디움 가지치기하고 항아리에 가득 담아놨더니, 몰랐던 향기가 내려온다. 그 아래서 일기를 쓴다. 굴려 굴려 일상~~~
10.13.화
자잘하게 신경 쓸 일들이 잠자기 전 시간을 괴롭힌다. 이불 두 겹을 덮고 댕굴거리는, 하루의 보상 같은 시간이 잘게 찢어지는 안타까움. 이럴 땐 얼른 잠에 든다거나 책 속으로 도망가 버리는 게 상책인 걸 알지만 잘 실현되지 않는 날도 있다. 손에 없기에 귀하다. 기억할 필요도 없어서 흔적도 남지 않는 날, 스르르 잠드는 평화로운 순간. 그러므로 있을 때 잘하자는 싱거운 결론. 슴슴한 하루를 한약 삼키듯 잘 삼켜보자.
10.15.목
추운 듯하다가도 움직이면 따사롭다. 잘 자고 일어나 밥을 먹고 어제 그리던 그림을 고민했다. 백일홍도 몇 송이 데려다 놓고, 아빠가 주워온 모과와 함께 뒀다.
10.16.금
자석으로 애기들이 그려준 그림을 붙어두었는데 없어졌다며 어디 갔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바람에 날아갔다고 전했다. 친구들 왈, ‘바람도 제 그림이 마음에 들었나 봐요!’
10.20.화
그림 그리러 오는 애기가
“저는 요새 아침부터 저녁까지 빠져있는 취미가 있어요. 종이 한 장을 두고 시를 쓰는 거예요.”라며 벌써 4권을 채운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옆의 다른 친구가
“저는 종이 접기요. tv를 보다가 따라 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좋아하게 되었어요”
“선생님의 ‘요즘’ 취미는 뭐예요? 매일 하는 게 아니어도 요즘 자주 하는 일이면 취미예요!”
취미? 자주 하는 일? 대답하기 어렵다.
“나는 일기 쓰고 책 읽은 걸 써둬. 요새 자주 하려고 해.”
“글 쓰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맞아 맞아. 그럼 그럼.
10.27.화
정신을 차리기 전에 날씨가 앞지른다. 뭐든 처음은 어려운 법. 모든 처음은 보랏빛 안개! 잘 챙겨 먹고, 움직이고, 많이 그리자. 역시 장치가 있어야 한다. 시스템 안의 인간. 자책 말고 구조를 만들자. 귯잡 걸!
10.30.금
평화로운 금요일. 힘든 순간마다 ‘이렇게 나약해서 순례길을 갈 수 없어’ 암시한다. 먼 미래의 로망 중 하나. 몸통만 한 배낭을 메고 긴 길을 걸으려면 강해져야 한다.
서리가 내리는 아침이 돌아왔다. 줄기가 까매진 꽃을 볼 때마다 뽑는다. 하루아침에 날씨는 바뀌는데, 시간은 왜 이리 빠른지. 좋아하는 노래, 그리려고 펴 둔 흰 종이. 엇결이 없는 괜찮은 하루다.
11.3.화
저녁만 먹으면 체한 지 2주째. 건강이 최고야 아구구... 몸과 마음을 보살피는 겨울이 되길.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새로운 계획도 좀 세워보길. 하던 걸 그대로 잘 해오며!
11.6.금
오늘 그림 그리러 온 친구가 벽에 걸어둔 그림들을 한참 구경하고 말하길,
“선생님 행복하죠?”
“응 괜찮지!”
“좋아하는 게 일이니까 너무 행복해 보여요.”
대답하고 보니 괜찮은 게 아니라 행복한 거구나
11.12.목
아빠 왈,
외모도 나이 들면 똑같다.
주름 안 생기는 놈 있냐.
건강이 최고다.
사십에 죽는 사람,
팔십에 정치하는 사람.
건강을 챙기자.
11.20.금
20일이라니! 이 다이어리의 끝이 보인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잘 챙겨 먹고 운동하고 일하고. 올해의 키워드는 아무래도 ‘건강’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독서일기도 겨울 편이 다가오고 일기도 2020과 4/4, 그리고 결산 28까지. 연말 루틴이 다가오는 게 실감이 난다. 하던 거 잘하고, 스스로를 돌보자. 가벼운 생각들, 빠른 행동, 한 번 더 인내하기.
12.4.금
깜짝하니 12월이다. 무탈했고, 아주아주 잘 지내고 있다. 요즘의 생활에 만족한다. 오전에 운동하고 오후에 일하고 밤에 쉰다. 잘 먹고, 잘 잔다. 균형추가 중앙인 아주 귀한 현상. 오늘 스트레스받는 거 있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정말 없어서 없다고 했다. 좀 소름 돋았다. 남극에 간 친구의 친구가 요새는 제일 부럽다. 뭘 먹고 어떻게 지내고 어디서 시간을 보내는지. 전해서라도 붙잡고 묻고 싶을 뿐이다.
창밖으로 파스텔 그림보다 아름답게 해가 진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여유가 있음에 감사했다.
12.9.수
추워지는 날씨가 낯설기만 하다. 졸린 눈으로 깜깜할 때부터 해 뜨는 모습을 보며 운동하는 내 모습도 믿기지가 않는다. 이제야 보통 사람들만큼 건강해지고 보니 지난 시간들이 아깝다. 매일 돌보고 잘 먹여야지.
12.14.월
드디어 부츠를 개시했다. 수족냉증에게 한줄기 빛... 스물여덟쯤 된 어른이면 또각거리는 구두에 타자를 막 두드리는 모습일 줄 알았는데. 그대로인 게 놀랍지도 않다. 슬슬 결산 28을 생각해보는데, 희미하다. 사진, 글 부스러기들을 뒤적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