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2월 11일 오후 8:35가 되고 있으니 하루를 정리하기 위해 열심히 생각에 잠기고 있을 겁니다.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모든 것을 적어 보낼 테니 너무 크게 웃지는 마세요. 웃는 소리가 들리면 혼낼 거예요.
오늘 아침은 한 주일의 피로함을 보상이라도 한 듯 8시 지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새언니 덕분에 식순이 신세를 모면했다는 기쁨도 크지만, 우리 오빠를 도둑질해 갔다는 데에는 불만이 많아요. 보름이라고 찰밥을 먹었어요. 떡보라서 찰밥도 좋아해요.
10시 30분까지는 교회에 가서 성가대 연습해야겠는데, 지저분한 기분으로는 교회에 갈 수 없어서 머리를 잽싸게 감고 빈손으로 뛰어갔어요. 왜 성경책도 없이 갔냐고요? 그것은 우리가 이사 갈 집에다 모조리 갖다 두어서 행방불명이랍니다. 교회에는 많이 있으니까요.
열심히 예배를 마치고 <제목: 흰 눈 사이로 음악은 흐르고>의 거대한 타이틀을 걸고 행사를 하는 돌샘 다방으로 달려갔어요. 9시까지 집합해서 서비스(차를 나르는 데에서부터 마담 행세까지)를 해야 하는데, 교회 때문에 늦어 버렸죠.
음. 그러고 보니까, 왜 하는지 이유를 언급해야겠군요. 우리 회사 기사님이 폐렴으로 고생을 하시니까, 자선 찻집을 하기로 했어요. 그 수입은 20만 원이 거의 되죠. <일일 찻집> 하루를 빌린 다방에서 티켓(ticket)을 팔아준 사람에게 커피 한 잔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130원짜리 커피를 250원짜리 티켓으로 먹으니까 손해야 크겠지만, 도와준다고 다들 오시네요.
1,000장을 팔기 위해서 거의 한 달 동안 고생했으니까, 실은 저는 서울에서 아는 사람이 없으니 팔 수가 없죠. 오빠에게 모두 맡겨버렸어요. 많은 직원들이 티켓을 사준 손님에게 가서 얘기하고 그랬는데, 제게 오는 손님은 없었으니까, 의자에 앉을 기회가 없게 된 거죠. 혼자 주방장이 되었으니 얼마나 피곤했는지 몰라요. 조금만 오래 서 있어도 금세 눈이 핑 돌아가는데, 정말이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머리가 아파와 혼났으니까요. 그러니까 늦게 온 보상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했고, 친구가 없어서 또 쉬지도 않았으니, 녹아진 거지 이건. 후훗. 저는 왜 쉽게 피곤한지 모르겠어요. 남들은 그렇지도 않은데.
회사에서는 생산부→영업부로 인사 이동됐어요. 그래서 순전히 돌아다닌답니다. 사람들 구미에 맞는 갖가지 차를 끓인 것도 힘들지만, 시청이나 구청이나 호텔이랑 어휴 정신없이 쏘다니다 보면, 내 몸이 내 몸 같은 느낌이 없어요. 탁한 지하철이며 정신없이 달려가는 교통의 혼잡 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는 나 자신에게 ‘어이구 고생 작살나게 한다’라면서 중얼거리고,약도 하나 쥐고 가보지도 못한 곳을 찾아가서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생활이죠. 전에는 앉아만 있는 답답함이 무척 싫었어요. 워낙 밖에 나가길 좋아한 사람을 감옥처럼 가둬두니까. 지금은 너무 돌아만 다녀서 마음이 안 놓이고 있어요.
하루를 지내다가 슬픈 일이 생기면 식당에 들어가서 눈물만 흘리면 끝나버리죠. 나는 어찌나 눈물이 많은지 눈만 봐도 울고 음악을 들어도 우는 그야말로 울보죠. 카타르시스 적인 눈물이 참 좋은 것 같아요. 집에서 잠자고 일어나려면 땅 밑으로 점점 파고드는 느낌이죠. 아무리 피곤해도 일할 때는 잊어버리게 되죠.
79년부터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기로 했으니까 그냥 열심히 살려고 해요. 다들 나보다 나은 사람이니 반항해 보았자 건방지다는 소리 외엔 하지 않아요. 하도 건방지거든요. 전에는….
직장에 새로 들어온 사원처럼 일할 생각이에요. 78년은 없었던 것으로. 저절로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복잡하게 생각만 하기를 좋아했지만, 쉽게 그냥 생각하려고 노력을 해요. 내가 직장에 다닌다는 건 큰 고통이에요. 그냥 시키는 것만 해야 하니 자존심 상하고, 알고 보니 별것도 아닌 내가 건방지니 속상하고 그래요. 두 눈을 딱 감고 잊어버리고 있어요. 모든 것을. 새롭게 많은 것을 시작하려 들거든요.
다시 찻집으로 가서.
좋은 음악만 특별히 준비해 달라고 DJ에게 부탁했기 때문에 좋은 음악을 종일 듣게 돼서 참 좋았어요. 영혼으로 노래하는 조영남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노래를 많이 들을 수 있었고. 아니 그런데 어찌나 슬퍼지던지 혼났어요. 그냥 외롭고 쓸쓸한 생각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내가 만든 함정에 빠져버렸어요. 집에서 엄마하고, 친구들 만나고 사는 건데. 끌끌. 서울의 소외된 외톨박이 같은 느낌 때문에, 고개를 쳐들면 눈물이 가득 고이고 말더군요. 가만히 생각하니까 나는 지역적으로 집시거든요. 광주도 싫어했고, 서울은 아직 모르고 싫어하진 않았어요. 우리 오빠와 내내 둘이 살다가 앞으로 혼자 자야 한다는 생각이 끔찍하게도 무섭거든요. 지금은 염치없이 셋이서 자요. 혼자 자면 추워서요.
오빠 사장님에게 혼났어요. 나 더러 “니 몇 살이지?” “21살이에요.” “떽” ‘어머나 저 사람 왜 저래’ 속으로 미워했어요.
오빠 혼자 믿고 지냈는데, 이건 장가가니까 혼자가 됐으니 그냥 신경질 난 게 많아요.
설교 시간에 ‘주 안에서 살면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습니다’라는 걸 기억해 내고 세상 유혹을 뿌리쳤어요. 내 생각·생활과 정반대가 세상 사람들의 생각·생활이라 생각하면, 감히 생각도 하기 싫어요.
浩兄 씨는 남자라서 여자들과 대화를 해도 조금도 경악스럽게 여기질 못하겠지만, 난 어떤 세상 사람과 얘기를 가만히 하다 보면 그쪽에서는 ‘할 말이 없군요’하고 거리감을 가져버려요.
며칠 전에는 어떤 총각 녀석이 “데이트하자”라고 하기에 “무엇 데이트냐?”라고 묻자, 曰 “명동 사교 클럽에 가서 고고를 추자”, “맥주 마시자”라는 거였어요. 어찌나 코가 막히던지 “다시는 그런 소리 했다가는 큰일 날 거다”라고 했더니, 도망쳐버렸어요. 서울은 무서운 곳이에요. 광주는 아주 적은 편이죠. 하지만 검은손의 무리는 어디에나 산재해 있으니까, 정신 까닥 잘못하면 추방당해요. 난 춤추고 싶으면 집에서 동생들과 흔들지, 고고장은 구경도 못 했어요.
요즈음 청춘남녀의 사귐에는 순수한 사랑에서보다는 감정의 충족 이용물로 삼는 예가 많아요. 남자의 양상군자 같은 마음이 저는 정말 저주스럽거든요. 여자는 생각하는데 남자보다는 차원이 높지만, 남자는 아주 어린이 같으니까?
내 주관대로 사는 사람이에요. 남 얘기는 절대 듣지 않아요. 회사에서는 퇴근하면 그냥 집으로 돌아와서 내 할 일하는 사람이니까요. 남자 친구를 사귄다는 건 큰 모험이고, 무서운 오빠를 존경하고, 돈도 없어서 데이트 비용을 갖고 있지 못해서 못 사귀고, 눈에 드는 사내는 하나도 없어요. 사람은 끼리끼리의 뜻이 있어요. 자기와는 너무 거리가 있으면 그건 사랑을 이루지 못하니까요. 이렇게 저렇게 살다 보니 浩兄 씨를 만나고 浩兄 씨를 사랑하게 됐으니 줏대가 사라졌는지 어쩐지 ….
아니, 이상의 것은 오늘 일기네요. 재미가 하나도 없죠?
浩兄 씨!
주만을 믿고 의지하고 산다고 했지만, 사실은 알고 보면 浩兄 씨를 많이 의지하려 하거든요. 浩兄 씨처럼 주만 위해 살기를 바라요. 사람도 사랑해야 인간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으니 큰일 났어요.
염치없이(염치 불고하고) 浩兄 씨를 좋아해요, 사랑하고.
浩兄 씨가 내 곁에 항상 있어 주길, 두 손 모아 기도하거든요.
아니 저번 편지에다 ‘承弟 씨 외모를 구경하는 게 아니랍니다’라고 했는데, ‘언제 구경시켜 드린다 했는지’ 물어보겠어요. 화나면 한 번도 만나지 말 걸 후회해 버릴 테니까. 그렇게 쉽게 쓴 말도 난 화를 내버리니까, 앞으로 조금만 조심하세요. 그리고 전혀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 대해서 의아해하지도 마세요. 그거야 사랑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 쉽게 생각하세요, 많은 도움을 주고 싶은 데 사실 대가 없이 浩兄 씨는 나를 너무 많이 돕고 있으니, 난 많이 약한 가 봐요.
그만 쓸게요. 지루하죠. 꼭 북한 군인이 상관에게 1일 보고하는 것처럼. 그럼 그만 보고하겠어요.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