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서로 사랑하게 됐으니 큰일이군요
나약한 사람이 무거운 짐을 들고 비탈진 길을 걸어갈 때, 그 마음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메우고 있을까? 우선은 무거운 짐을 없애고 싶고 비탈진 길을 원망한다든가 아니면 자기의 약한 몸을 미워한다든가 목적지까지의 길이 너무 멀다든가…. 이 사람은 오직 한 가지 만을 생각하지 않고 여러 가지 망상 속에서 가고 있을 것이다.
아! 지금의 承弟는 너무 무거운 짐이 몸과 마음을 온통 내리누르는 중압감을 느낀다. 지칠 듯 말이다. 그러나 지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약한 몸은 강한 내 마음으로 인해 굴복당하고 말 것이다.
꿈이 현실로 부각되어 오는 순간순간들이 가슴 벅차게 밀려오고 놀란 토끼 마냥 어리둥절해 버리는 초조하고 나약한 모습! 그 모습! 울고만 싶구나. 소리 내지 말고 그냥 흐느끼듯 울고만 싶구나.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게 가난해져 버린 텅 빈 마음, 공허감이 왠지 가슴을 떨게 하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리고 더욱더 호흡이 곤란해져 숨 막힐 것 같다. 질식이라도 할 것 같단 말이야.
나 자신의 울음·헤맴·궁리·고민·초조함에서 나 이외의 다른 또 하나의 세계로의 끝없는 몰입 → 그곳으로 온통 시선을 쏟아버리고 아니 그렇게 되면 내 눈이 멀어져 가고 있는 게 아닌지. 설마 내가 남들이 얘기하는 ‘사랑’이라는 세계에 발을 딛고 말았는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런 결론도 내리고 싶지 않을 뿐이다. 순간 두렵고, 무서운 차디찬 전율을 느낀다. 모든 실상을 해부하고 판단하려 드는 이성과 지성을 지금의 나 자신의 심령을 파헤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지금은 도움을 구한다. 그 누구에게나 온통 흩어지고 있는 가냘픈 심령을 하나의 의미로 뭉쳐지는 강인하고 온유함으로 나 자신을 탄생시킬 수 있는 따뜻하고 큰마음을 요구한다. 철저한 이기주의자·냉정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항상 내 생각을 내세우는데 고집쟁이다. 그게 순화되고 변화되는 순간들이다. 다른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안다. 나 이외의 다른 나! 너무도 엄청난 의미가 내포되어 새로운 나를 등장시킬 그런 것들인가. 힘들구나. 무척이나 혼자는 힘든 거로구나.
承弟를 도와주세요.
힘들지 않게 그리고 항상 웃는 얼굴로 살게 해 주세요.
어제는 이사를 끝내고, 오늘은 손님 접대를 끝마치고 뒷 일을 정리하고 씻고 텅 비고 너무도 큰 방에는 유달리 형광등 불빛이 그토록 흰 살결 위를 더욱 예쁘게 도와주고 있답니다. 11시가 지나고 있지만, 오늘은 편지를 안 쓰고는 배겨 나지 못할 것 같아서 꾹 참고 쓰고 있군요. 조용하고 차분하게 일어났던 일들을 기억해 내니,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몹시도 피곤해서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니, 浩兄 씨도 똑같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뿐이고 너무너무 고맙기도 합니다. 지독한 깍쟁이라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일지도 모르죠. 기뻤던 순간들을 알알이 엮어서 가슴 깊이 새기는 작업이 필요하리라 느끼고, 그것들을 붙드는 과감한 힘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많이 원하는 대로 사랑을 흠뻑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시간의 아쉬움만이 내 마음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고, 그리고 마구 무시해버리고 말았군요. 절대로 간절하거나, 애가 탄다거나, 들뜬다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또한 감정을 억누르지도 않아요. 얼굴에 비치는 모습을 보듯, 내 마음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은 항상 나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간절할 뿐입니다.
浩兄 씨!
몸과 마음은 하나로 의미가 있다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영혼과 영혼의 만남으로 몸과 몸이 만나야 그것은 뜨겁고 진지하고 진실한 만남이 되는 걸 거예요. 이것은 온통 사랑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약간은 차이가 있어서 4차원의 사랑을 생각한다고 전번 편지에 쓴 것 같아요. 承弟는 그런 것이 뇌리를 지배했어요. 열심히 마음과 영혼으로 사랑한다고 그러면 그 이상은 무의미할 거라고….
어려서 그렇다기에는 너무 속단일 것 같아요. 가끔 가다가는 엉뚱하게 인생을 설정하려 할 때가 많아서 나 자신에게 조심합니다. 애초에 만날 때는 그저 전혀 모르는 사람을 알려고 노력했고, 지금은 서로 사랑하게 됐으니 큰일이군요. 이렇게까지 상상도 해보지 못한 사건들이기 때문이죠.
浩兄 씨!
내가 浩兄 씨를 사랑하는 마음은 잘 불러대는 하모니카에 반한 그런 마음이 아니랍니다. 이런 마음이 확연해질 때까지의 시간과 갈등은 무진장하게 큰 것이었습니다. 사랑이나 결혼이나 그것은 달콤한 단어를 빌려 쓰기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내면에는 고통과 희생이 전부인 것 같아요. 浩兄 씨를 사랑하려 들 때는 주위의 어떠한 상황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며, 浩兄 씨 자신이 어떤 상태로 전락해 버리든,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큰 정신인 것 같아요. 걱정하고 염려하는 그 모든 것들을 承弟가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浩兄 씨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에요.
承弟는 浩兄 씨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고통도 감지할 수 있으리라 자신을 가집니다. 그 모든 것을 위해 사랑이 있기 때문이죠. 浩兄 씨를 사랑하고 받들기 위해서라면 연약하고 나약한 몸이지만 많은 일을 할 줄 알아야겠고, 그것들을 지탱하기 위해 의지가 남보다 강한 정신을 길러야 할 거예요. 나는 항상 의지는 남보다 강하고 의욕은 있지만, 건강이 항상 뒤떨어지고 말더군요. 고등학교 때 ‘사당오락(四當五落)’을 내세워 공부하는데, 8~10시간을 자야 학교생활을 유지했어요. 그렇다고 꼴등을 하지는 않았어요. 오기가 나면 열심히 했기 때문이죠.
浩兄 씨!
제게 원하는 모든 것을 낱낱이 얘기하세요. 나를 믿고 말이에요. 아직은 많은 할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 같아요. 각자에게 말이에요. 그리고 각자에게 ‘우리’라는 공동체에게나.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아름다운 성(城)을 구축하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온통 사랑해야 할 것이에요.
열차 소리만 가끔 귀를 자극하고 주위는 조용하군요. 벽 속에 온통 당신의 숨결이 숨어 있는 듯이, 그것들을 내내 쳐다볼 것 같군요. 우리는 온전히 주 하나님을 받드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렵니다.
1979.02.21. 12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