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친구에게, 서신(書信) 주신 거 감사합니다

인연이 맺어질 듯 싶어서

by 초들

미지의 친구에게


오늘이 1978.11.02.(목) 9:00 이니까, 이상스러운 편지를 습득한 지 어느덧 46일이 흘렀답니다.


발신인 정O자, 수신인은 기꼬마(O숙), 습득인은 묘한 여자 아닌 남자.

추측해 보건대 고등학교 1년 후배가 될 것 같군요? 내가 1977년 1월 중순에 졸업했으니까요.


가을이라서 문학소녀(文學少女) 흉내를 낸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앙상한(초가을→늦가을) 초겨울이 된 셈인데 무슨 소녀가 되었는지요? (실례) 괜스레 펜을 들어 당신에게 심려 끼쳐 드리는지 미안해지는 마음이 드는군요.


잠깐 제 소개를 하죠.

19OO. 9월 20일생, 170cm, 대학교 2학년생, 신앙인(기독교)으로 열심히 세상을 이기려고 버둥대는 풋내기랍니다.


좀 염려되네요. 경제적으로나 모든 여건으로 남자 친구는 ‘흥’하고 코웃음 짓던 J 씨?인데. 아무래도 좋아요. 그냥 부담 없는 펜 벗이 되고 싶으니까. 처음부터 긴 글은 생략하고 오늘은 이만 (인연이 맺어질 듯 싶어서).

주님의 은총을 기원하면서


1978.11.02.(목) 9:15 浩~




서신(書信) 주신 거 감사합니다



빨 노란 물이 든 도토리나무 그리고 떨어진 낙엽들이 동산을 가득 채워주고 있으며, 또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 하필이면 다 커버린 내가 막 웃으면서 뛰어다녀야 했던 이 계절 속에서 그래도 성의 있게 서신(書信) 주신 거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대 걸지 않고서 그냥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부담 없는 대화의 광장에 서보았으면 해서 막연히 두서없이 글을 띄웠는데, 잊지 않고, 그것도 늦어지지 않고 서둘러 답장 주신 거 다시금 감사드려요.


어느 정도 J 씨를 알고서 저를 소개합니다. 현재 광주교육대학교 2학년 생, 고향은 아주 먼 섬(신안군 도초도)이고, 이곳 광주에서는 두 동생(고3, 중3)을 데리고 자취하는 학생이랍니다.

편지는 우연히 습득했답니다. 오르간(organ) 실에서 도서관으로 가는 오르막길 계단에 굴러다니는 쓸쓸한 편지는 무척 신비스러운 세계를 노크(knock) 해 주었죠. 겉봉이 반 정도 찢어져 나갔고 많은 발길에 밟히고 채였는지 신(구두, 운동화) 밑바닥을 함지박처럼 안고 있더군요. 편지를 전해줄까 (기 꼬마 씨에게) 하다가 그날은 ‘너무 늦어서 내일 주인을 찾아 주어야지’라는 생각으로 가방에 넣어 집으로 가지고 왔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생인 제 동생이 ‘와’하고 환호성을 질렀답니다. 왜냐고요? 내가 그런 편지를 가지고 왔다는 중대한 사실(?) 때문이죠. 저는 허락도 없이 J 씨 편지를 소리 없이 읽어 내려가면서 오랜만에 짜릿한 전율, 호기심, 미소를 느끼게 되었죠.

아! 이분에게 편지해 보았으면.... 이상스럽게 막연히 피어오르는 그리움의 감정을 가져야 했답니다. 그러나 신앙(信仰)은 이런 나를 채찍질해 주었어요. 그럭저럭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갈등 속에 얽매인 마음속에서 ‘그냥 부담 없이’라는 조건으로 편지를 하게 된 거예요.

저는 두 번째 편지를 보내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사는 J 씨는 과연 어떤 사람이고 광신자는 되고 싶지 않다는 그 신앙의 정도는 어느 정도일까? 여러 가지 잡동사니 생각으로 재미나는 상상을 많이 해 보죠. 제게는 신앙과 음악이 전부랍니다. 많은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전도하며 열심히 찬양하며 충성되게 예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고픈 마음뿐이랍니다.

제게는 커다란 이 있어요. 그건 저 높은 주님의 세계에 가는 거죠. ‘쳇, 무슨 신(神)이람’라고 우롱하는, 믿지 않는, 믿으려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위대한 사업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뿐이랍니다.

대학교, 제가 가고 싶은 대학은 ‘공주사범대학교 영문과’였답니다. 그러나 현실은 광주교육대학교 학생이죠. 참 웃지 못할, 쓸쓸한 사연이 있어요. 고3 때, 저를 담임했던 김O택 선생님께서 부모님 마음을 읽고서 손수 광주교육대학교 입학원서를 써주셨어요. 마치 선생님께서 교육대학교 지망생처럼...

저는 5일 정도 남겨놓고 공부하는 열성파는 아니지만 ‘공부’라는 작업은 아주 친근했어요. 교육대학교 예체능 방면에서 점수를 빼앗겨서 1등은 못해요. 그렇지만 장학금을 받았어요. 이론 공부에는 그 누구 못지않게 자신 있거든요.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 그칩니다.

저는 그냥 기다리고 싶습니다. 답장하셔도, 안 하셔도 좋아요. ‘어느 섬에는 이런 사람이 살고 있는 거구나’라는 생각만 해 주셔도 고마운 일이니까요. 더 알고 싶거든 ‘기꼬마(O숙) 씨에게 물어보세요. 괜스레 그럴 필요가 없는지도 몰라요. 너무 많이 미안해서 오늘은 그만 쓸래요. 사실은 많이 쓰고 싶지만요.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꼭 함께하시길 두 손 모아 기도드리면서.


1978.11.16.(목) 도서관에서 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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