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말을 했는데
J 씨가 원하기만 한다면
‘사랑’이란 말을 했는데
첫눈이 소리 없이 내렸군요. 엊그제 변덕스러운 날씨를 탓했는데, 보복하듯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어요. 바로 이럴 때 쉽게 감기 걸리는데 편지 속에서 건강한 J 씨를 뵙고서 ‘아직 겨울 손님을 맞이하지 않았구나’라고 다행스러운 생각을 하며 이틀 사이의 안녕을 물어봅니다.
조그만 하얀 눈! 이제 눈 오는 계절이 되었어요. 붉은 무등산에 흰 눈 가지런히 덮여 한결 청초로움 심어주는군요. 눈을 보면서 ‘추수감사절’ 기념 예배를 생각해 봅니다. 일요일 7:30~8:20까지 감사 노래극(작은 오페라)을 하나님께 바쳤답니다. 10일 전부터 주일학교 6학년 남학생들과 어린이 성가대를 동원해서 연습해 온 걸 하나님께 보여 드린 것이지요. 너무 부족한 점이 많고 연습 시간이 적어 몹시 걱정했지만, 교회의 행사는 늘 그렇듯 은혜와 기도 가운데 거룩하게 진행됩니다. 교회 2주년 기념 예배를 드릴 때도 나는 하나님께 시종(始終)을 온전히 주관해 주십사 간절히 기도드렸어요. 물론 이번 감사예배도 마찬가지이지만요.
나는 교회에서 이런 일을 합니다. 어린이 성가대 지휘 및 찬송 지도, 주일 학생들에게 노래 지도, 주일 밤, 삼일(수요일) 밤 예배 반주,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이 결석하면 대체 공과 교사를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어요. 2년밖에 안 된 교회라서 무척 할 일이 많은 셈이죠. 여기까지 두서없는 서두가 되었군요.
몹시 아끼고 싶은 J 씨!
즐거운 편지를 보내 주셔서 감사드려요. 혹시 오늘 하루가 우울했더라도 나는 J 씨 글월로 충분히 보상되었으리라 생각되는 재미나는 글이었습니다.
서울, ~~ 그리고 광주. 고속버스를 타면 몇 시간 만에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이곳 나에게는 너무도 아득히 먼 곳이네요. 도시는 제가 싫어합니다. 더군다나 서울 같은 대도시는 무척 싫어해요. 이 점 J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광주에 살고 있지만 공휴일이 되면 시내보다는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갑니다. 소담스럽게 피어나는, 평화스러운 저녁연기를 배경 삼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훈훈한 인정이 그득 오가는 향기로운 시골이 훨씬 정겹거든요. 촌놈이라 그런가 봐요.
J 씨!
이 글을 쓰면서 어제 읽은 홍성원 작 ‘광대의 꿈’이라는 소설을 기억해 내고 있습니다. 금력(金力)을 위한 한 청년을 합리적으로 묘사한 그 소설에 나는 몹시 비난의 마음을 가져요. 어디까지 ‘허구’라는 가공의 세계일지라도 오늘의 세상을 대변해 주는 대변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저는 화려하고 거창하고 원대한 꿈을 위해 현실을 외면하는 걸 싫어해요. '꿈 그 이상의 포부는 원대하더라도 나의 두 발은 현실을 굳건히 딛고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해요. 즉, 이는 내일의 발전과 향상을 위해서는 오늘을 알차게,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J 씨의 글을 세 번 읽으면서 재미나고 흐뭇한 착상을 했어요. 앞으로 J 씨와 아주 친해질 것 같다는..., 반면 극히 당연한 진통도 겪을 것 같아요.
J 씨!
계속 편지해 주세요. 앞길을 어렴풋이 그려보면, 저는 상당히 초라하게 진실을 위해 살아가려고 발버둥질 쳐야 할 것 같아요. 제 소신대로 세상을 살아가려고 했을 때, 부딪힐 난관은 너무너무 많을 것 같거든요. 연약하고 보잘것없기에 모든 것을 신앙 위에 얹혀두고 살고 싶어요. 이런 나에게 J 씨가 계속 편지해 줄지 다소 의아스럽군요.
묻는 말에 답변하겠어요. 나는 장남(長男)이고 둘째 동생은 전남고등학교 3학년, 제가 졸업했던 학교는 목포고등학교입니다. 장남인 사실만 밝히지 않았는데, 재차 묻는 걸 보니 어지간히 J 씨도 재미있는 분이군요.(농담) 또 질문이 하나 남았군요. “여자 친구 있냐?”라고 물으셨죠. 제게는 여자 친구가 생각하기에 따라 많을 것 같아요.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성도(聖徒)로서의 친구가 전부이지만, 여하튼 내가 아는 여자 친구는 많은 편입니다.
비밀 속의 J 씨!
약간 심각해져 보렵니다. 보내주신 글 속에 ‘사랑’이란 말을 했는데, 나도 여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확실한 사랑의 정수(精髓)는 몰라요.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건 예수 그리스도의 만인에 대한 사랑을 알고 있을 뿐이에요. 친구라는 말은 너무 어려울 것 같아요. 보배라는 표현을 해주셨는데, 다정스러운 친구가 된다면야 더 이상 바랄 수 없지만, 남자와 여자 사이(비슷한 동년배끼리의 남·여)는 친구로 시작하지 않는 예가 없데요. 그렇지만 친구로 시작한 남녀가 너무 쉽게 무너지는 걸 많이 볼 수 있어요. 즉, 이는 친구라는 허울 속에 가식과 허위, 갈등을 갖고 심한 대립을 하는 나머지 탈선하는 예를 일컫는 거예요. 요즘 사람들은 너무 자신 위주로만 살려는 것 같아요. 좀 동공을 확대하여 주변 사람들을 돌볼 줄 아는 아량과 관용의 미덕이 너무나도 아쉽거든요.
J 씨!
저는 자연인(自然人)이 되고 싶어요. 가식과 허식이 없이 부담스럽지 않게 만나고, 또 만나는, 신실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허영과 사치, 부귀영화가 깃든 흔한 사랑을 그 누구에게도 해줄 수는 없지만 따뜻한, 고귀한 심원(心源)의 사랑은 얼마든지 해주고 싶어요. 적어도 J 씨가 원하기만 한다면.
어휴. 양면지라 긴 글을 못 쓰겠어요. 건강을 빌면서 오늘은 이만 그칩니다. 안녕!
사랑의 주님! J 씨를 기억해 주시고 축복해 주소서.
1978년 11월 29일 수요일 오후녁에 浩야
추신: ① 내가 하는 얘기는 모두 상대적으로 J 씨에게 묻는 거예요.
② ‘임용고사’는 무사히 통과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