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몹시 기다리기 힘든 셈이죠

내 인생의 소로(小路)를 확 트이게

by 초들

어쩌면 몹시 기다리기 힘든 셈이죠



이 글을 쓰는 쓰며 달력과 시계를 쳐다봅니다. 1978년 11월 21일(화) 12:45, 15분 전에 집배원 아저씨 손으로부터 참 재미난, 알찬 J 씨 글월 받고서 세 번째 나의 글을 쓰고 있어요.

‘어제부터 기온이 2~3°가량 예년에 비해 떨어졌다’라고 중앙관상대 통보관 서정갑 씨가 예보하더니, 오늘 아침은 마음부터 춥기 시작해 버렸습니다. 둘째 동생을 깨우면서 아침밥 지으라고 부탁하기가 약간 미안했습니다. 실은 내일 ‘학군단 임용고시’라는 시험을 치러요. 그 때문에 새벽기도회에도 참석 못 하고 동생을 깨워 밥 지으라고 부탁했어요. 너무 유치한 얘긴 그만하고요. 오늘 쓰는 글은 두서없는 글이 될 것 같아요. ‘내일 오후쯤 편지 쓸까?’ 생각하다가 조그만 기다림의 감정도 소모하고 싶지 않아 즉시 답장을 한답니다. ‘기다림’은 적어도 제 자신의 경우, 내가 답장하기 무섭게 J 씨 글월을 기다렸으니까, 어쩌면 몹시 기다리기 힘든 셈이죠. 물론 J 씨 경우는 다를지도 모르지만요.

교육대학교와 저의 꿈에 대해 좀 더 얘기하겠어요. 저는 ‘외교관 아니면 교육자가 되고 싶다’라는 가졌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냥 막연하게 외교관을 하고자 했어요. 하지만 냉혹한 가정 형편과 현실이 나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말았답니다. 가난, 너무 가난했죠. 우리 집이. 중3 때, 나는 ‘졸업하면 괴나리봇짐 싸서 상경해야지’라는 생각을 가져야만 했죠. 현재의 나는 행운아인 셈이죠. 학창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남에게 쉽게 인정을 받고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이는 장학금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랍니다. 제가 다닌 중학교는 사립이었기에 장학제도가 있었어요. 이 때문에 저는 장학생이 되어 학비 감면 혜택을 받았어요. 주위 사람들은 이런 나를 그냥 두지 않고 고등학교 진학을 시켰어요.

고등학교 시절, 어쩌면 가장 소중하고 아쉬운 시절인 것 같아요. 노동일, 튀김 장사... 저는 아르바이트(arbeit)를 한답시고 막 닥치는 대로 이런 일, 저런 일을 했어요. ‘차 한 잔의 우수’(중류 이상 사람)에서 ‘막걸리 한 잔의 우수’(노동자). 이 철학을 폐부 깊숙이 체험할 수 있었어요. 노동판에서 온종일 막일에 시달리면서도 자식에 대한 소망을 갖고서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하는 그분들 틈바구니에서 저는 ‘노동의 신성함과 교육’을 생각하게 됐죠. 자식에 대한 한결같은 희망, 기대는 공부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염원임을 알고서 저는 ‘그 교육의 사명을 내가 가져 봐야지’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노동자, 쉽게 ‘가난한 사람들’은 아니 이들의 자식들은 부모님의 높고 크신 뜻을 진정으로 알고 있으며, 또 안다손 치더라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때, 그 답은 너무나 쉬운 얘기가 되었어요.

고2 때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y)의 ‘가난한 연인’이란 책을 읽었어요. 또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라는 책도 읽었어요. 이 두 권의 책은 제게 무척 많은 감명과 조그마한 내 인생의 소로(小路)를 확 트이게 해 준 책입니다.


‘학군단 임용고시’라는 것은 남자 교육대학생에게 병역 감면의 혜택을 주기 위한 절차 중 하나입니다. 2년간 하계 병영 훈련, 학교 내 군사 훈련(주당 7시간)과 임용고시를 무사히 통과하면 졸업할 때, ‘예비역 하사관’ 제대증을 받습니다. 즉, 군대 안 가는 것입니다. 제 경우, 4년제 대학보다 5년(군대 3년, 대학 생활 2년)이나 빠른 점을 감안해서 고3 담임 선생님께서 교육대학을 가게 이끌어 주었지요. 당시의 원망이 이제는 고마움뿐이랍니다. 빨리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싶네요. 티 없이 맑고 순수한 동심 속에서 교육자로서의 인생을 펼쳐보고 싶기에.

J 씨! 저의 글이 되고만 걸 미안스럽게 생각해요. 다음 글부터는 젊은이의 얘기를 하기로 해요. 계속 쓰면 너무 두서없는 장황한 글이 될 것 같아서 오늘은 이만 그치겠어요. 하나님의 축복을 빌면서. 浩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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