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 아세안 국가에 출장이 많았다. 아세안은 최근에도 매년 5%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고, 14년 정도에 경제규모가 2배로 커지는 성장엔진이라는 보고서도 있다. 최근 중국과 인도의 고전에 비하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빅 마켓이다.
6억 명 인구에 평균 연령 30세의 젊은 지역이기도 하다. 2015년에 아세안경제로 통합되었고,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미얀마 등등, 민족도 많고 종교도 다양하다. 태국은 불교,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과 힌두, 필리핀은 가톨릭...
도시에는 와이파이가 보급되어 핸드폰 사용이 용이하나, 교통 등 인프라 구축은 미흡하여 아직은 약간 우리나라 수준과 차이가 있다. 거리에는 일제차와 오토바이, 한국산 가전과 모바일폰 선전이 넘쳐나지만, 아직은 인간적인 정을 나눌 수 있는 지역으로 꼽힌다.
그 아세안 국가 중, 필리핀 출장길에서 느낀 점을 써보았다.
한국에서 학회에 후원한 제품의 행사를 치르느라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쳤으나, 이전부터 준법경영 교육프로그램으로 마닐라지사에 출장이 예정되었기에 단숨에 날아갔다.
호텔에 픽업을 부탁했더니 필리핀 기사가 도요타 차를 끌고 나왔다. 피부가 시커멓고 키가 작으며 어두운 색 유니폼을 입은 전형적인 필리핀 남성이다.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본다. 출장지의 기사들은 현지 실정에 정통한 훌륭한 정보원이다.
마닐라의 극심한 교통체증, 이제야 착공한다는 지하철, 부패한 관리들과 대통령의 단호한 마약범 단속 등으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길가 교통경찰의 두툼한 참치뱃살이 눈에 띈다. 뒷돈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라고 묻자 아마도 그랬을 거라며 낄낄거린다.
자동차는 현대나 기아차도 많이 팔리고 성능과 디자인이 좋지만, 문제는 서비스센터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 단점이란다. 일제차와 일제 오토바이는 도입 역사도 길지만 성능과 애프터서비스가 좋다며 엄지 척이다. 슬쩍 비위가 거슬린다.
핸드폰은 단연 삼성 제품이고, 가전제품은 LG가 최고란다. 한류드라마 영향으로 한국 화장품과 먹거리가 인기라고 한다.
한국인들이 필리핀에서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들도 익히 알고 있으나 그런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 한국인들은 비즈니스 면에서 성실한 모범생이라고 평한다.
마닐라에만 한국인이 20만 명은 있다고 한다. 필리핀 이미지가 어떨지 모르지만, 세부와 보라카이를 포함한 유명 여행지에는 한국인들이 바글바글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자신이 쓰는 물건의 국적을 말하다가 한국산이 중국산보다 낫다고 한다. 여기서 내가 펀치를 날렸다.
"아니, 어디 감히 한국 제품을 중국산에 비교해? 굳이 비교하려면 일제와 비교하라!" 말해놓고 생각하니 이런 근자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싶다.
어렸을 때 필리핀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살았다. 하지만 이제 필리핀은 우리랑 경제규모에서 비교 상대도 되지 않고 경쟁조차 되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화제는 바이든과 시진핑, 주변 국가의 정치 이야기까지 확장되었다. 상당히 쾌활하고 유식한 운전기사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필리핀 사람들은 마르코스 독재에 항거한 저항정신도 있고, 더운 나라 특유의 낙천적 기질, 음악을 사랑하는 낭만주의적 성향 등, 우리의 신바람 문화와도 닿는 구석이 있다.
생김새가 맘에 안 들어도 개인적으로 친해지면 인간적이고 붙임성도 좋다.
대부분 여행이나 출장을 선진국으로 다녀오길 원하고 또 그래야 어디 가서 큰소리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도 아직 연탄을 준비하는 달동네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동남아 사람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본사에 가면 아프리카 케냐의 친구가 순흑색 얼굴에 하얀 치아를 보여주며 나를 반겨주곤 하였는데, 그는 어엿한 미국 유학파로 IT전공 박사님이었다.
우리의 배타주의 껍데기만 벗겨내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친구들이 지천에 깔려있다. 다 똑같은 인간들이고 잠재적인 고객들이다.
*이미지: 네이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