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도쿄 여행기
3박 4일 가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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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7. 2024
모처럼 출장 아닌 가족여행으로 도쿄를 방문했다. 성탄절 연휴를 낀 3박 4일의 짧은 일정. 아내의 권유로 초 경제적인 여비만 사용해야 하는, 문화 탐방이 주목적인 여행이었다.
20대에 회사에 입사하고서 처음으로 일본에 연수받으러 파견되어 왔었다. 도쿄에서는 어학연수를 받느라 6개월간 생활하였다. 그 뒤로는 출장으로 백 번은 더 왔던 도시. 하지만 공항, 호텔, 본사, 학회장, 식당과 술집만 다니느라 낮 시간의 한가로움과 유유자적(悠悠自適)은 꿈도 못 꾸었던 터. 말 그대로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출장의 연속이었다. 그에 비해 이번 여행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에 한 해도 뒤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출장 오면 편하게 택시를 즐겨 타며 다녔는데, 이번 여행은 전철 패스로만 움직이는 워킹투어를 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이번 기회에 매일 2만 보는 걸어보리라 다짐한다.
첫날
시나가와역(品川驛) 근처 프린스호텔에 체크인하고, 오래된 지인을 만나 사케를 곁들여 저녁을 같이 했다. 연말이라 500석의 자리가 만석이었다. 일본의 12월은 크고 작은 송년회 시즌이라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좋은 곳에서 만날 수가 없다.
본사 OB인 그는 60세를 마지막으로 미련 없이 퇴직하고(정년은 65세), 회사를 창업하여 자신의 업무 경험을 살려 현장을 누비고 있었다. 창업 3년 차에 매출은 없지만, 가능성을 보고서 몇몇 선배들이 출자도 해주고 아이템도 소개해주는 등 이런저런 지원을 받아 우선은 목구멍에 거미줄을 치고 있지는 않다고 한숨을 내쉰다. 누구나 사업 초기에는 고전하기 마련인가 보다.
일본은 베테랑 샐러리맨 출신 창업자들이 많고, 또 그런 소규모 비즈니스가 가능한 기반과 환경이 마련되어 있어 부럽기만 하다. 그는 한중일(韓中日)을 묶는 의료 비즈니스도 추진하고 있었는데, 한국 쪽 비즈니스에 협조를 당부하였다.
이튿날
본사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과 만나 점심을 같이 하며 격려해 주었다. 일본인들 틈에서 소수의 한국인들이 이끼나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긴 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 빽빽한 밀림 속에서 더 유연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정글을 헤쳐나갈 수 있는가 서로 지혜를 교환하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둘 다 똑 부러지는 사람들이라 질투심을 유발하여 직장 내 집단 따돌림이라도 당하면 어쩔까 걱정도 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하였다. 내 걱정과는 다르게 이미 조직에 동화되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자녀들도 꿋꿋하게 일본인 학교에 다니고 있고,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은 없으며 오히려 수줍어하는 일본 애들 틈에서 능동적인 한국 애들이 더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니 저으기 안심이 되었다.
오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유락쵸(有樂町)에 가서 대기업이 만든 미술관을 방문했다. 네덜란드 필립스 그룹의 창업주가 소장했던 피카소와 마네, 고흐의 그림과 로댕의 조각 등, 비공개 작품들이 전시된 갤러리를 돌아보며 우리보다 훨씬 나은 문화적 환경을 질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우리에게는 기업의 미술관도 많지 않지만,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명화를 모셔와서 전시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 아닌가? 기획력과 자금력, 협상력이 대단하였다.
밤에는 이자카야(居酒屋) 선술집에서 시샤모 구이와 꼬치, 어묵, 해산물과 육류를 곁들여 저녁을 즐겼다.
일본 맥주가 혀에 착 감기는데, 우리 맥주보다 훨씬 더 맛있다. 길가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돋우는 꼬마전구 트리가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젊은 여성들이 엄청나게 몰려나오는 것을 보니 근처에서 큰 이벤트가 있었나 보다.
셋째 날
오전에는 긴자(銀座) 거리를 거닐며 초밥집에서 허기를 달래었다. 1인당 2만 원의 코스요리로 점심을 즐길 수 있는 가성비 좋은 곳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주인장은 모처럼 한국 손님들이 왔다며 초밥 종류가 그려진 컵을 선물로 주었다.
점심 후부터 산보를 겸하여 긴자거리를 활보하였다. 즐비한 유럽 명품관 속에 당당히 자리 잡은 일본 고유 브랜드들, 쇼핑몰의 화려함과 섬세한 디스플레이, 옥상의 휴식공간, 그 안의 스타벅스에서 즐기는 여유, 한 층을 다 쓰는 엄청나게 큰 서점 속에 셀 수없이 많은 전통 문구류와 첨단 사물인터넷의 활약을 보며, 어떻게 신구를 조화시키고 있는지 느껴보고 감탄도 하였다.
일본의 야구 영웅 이치로가 술 선전을 하는 간판도 보였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여 안타제조기로 기록을 세운 실력은 인정하지만, 우리에겐 얍상한 언행으로 빈축을 사기도 했었다. 그도 이제는 50을 넘어서고 있었다.
떠오르는 야구신성 오타니의 대형 광고판은 이치로의 간판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우리도 메이저리거가 여럿 있었는데 일본만큼 광고모델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일본의 야구 열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경제적 효과까지 창출해 낸다. 스타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마케팅이 뛰어나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야구보다 축구의 손흥민이나 피겨의 김연아가 압도적으로 광고 노출 빈도가 높다.
저녁에는 에비스(惠比壽) 역으로 향하였다. 삿포로 맥주 공장이 있었던 곳을 개조하여, 프리미엄 에비스 맥주를 기념한 박물관과 전시관, 전망대와 오피스 빌딩 숲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기업이 문화사업을 하고 사회공헌을 하면서 어떻게 또 다른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하고 있는지 그 주소를 알게 해 준다.
돌아오는 전철 속에는 아직도 책을 손에 쥐고 있는 구세대 일본인들과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신세대를 만난다. 호텔에 돌아와 크로켓을 안주로 맥주를 곁들이면서 훌륭한 객실 내 디너를 만끽한다.
막간을 이용하여 2시간 동안 파친코에 빠져 최근에 바뀐 기종이 뭔지 살펴보고, 어디에서 당첨이 터지는지 옮겨 다니다 기어이 대당첨의 행운을 맛보기도 하였다. 모처럼 손맛을 느껴보았다.
넷째 날
아침 일찍 도쿄정원미술관으로 향하였다.
메구로(目黑) 역에서 은행잎이 깔린 포도(鋪道)를 거쳐서 들어간 곳에는, 파아란 하늘과 단풍잎으로 물든 연못, 거목들로 둘러싸인 정원이 있고, 잉어가 유유히 노닐고 있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30년대 황족이 거처하던 사저가 전시관이 되어있었다. 동시대에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지배했던 프랑스를 모방하여 온갖 럭셔리한 사치와 탐욕이 지배했던 공간을 만들어놓았다. 이곳을 구경하면서 당시의 우리 선조들은 어떤 일을 겪고 있었는가, 상념에 잠겨보기도 했다. 한쪽에선 군대를 앞세워 살육을 일삼고, 한편에선 예술을 표방하며 사치를 구가한 그들의 이중성에 할 말을 잃었다. 문득 '국화와 칼'이 떠올랐다.
오후 출국 시간을 의식하면서 점심시간에 맞춰 호텔로 돌아와 체크아웃을 하였다. 우리 국적기보다 값이 싸서 예약한 일본 항공기는 곳곳에 최첨단 기술의 흔적이 나의 기를 죽이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불편한 감정이 가장 큰 일본, 그런데 물건은 일제를 좋아하는 이중성이 항상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36년 전 그 모순을 타개하러 기업에 입사했으나 지금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음에 아직도 난처한 경우가 있다.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는 최근의 경제회복으로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우리가 미워했던 아베수상은 대졸자들이 서너 곳을 골라서 취직하게 만들었고 죽어가는 기업을 살려놓고 있았다.
아베는, 첫 번째 수상 시절에는 아마추어리즘으로 실패를 맛봤다. 이후 건강 문제로 쉬고 재기하여 다시 수상 자리에 올라 경제를 부흥시켰으나 끝내 피살당했다.
우리에게는 아무리 빨리빨리 정신이 있다고 해도 대통령 임기 5년 안에 뭐 하나 이루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짧다. 게다가 한번 대통령을 했던 사람이 은퇴 후 쉬었다가 또다시 집권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극히 보수적인 일본조차도 뭐든 도움이 된다면 재빨리 도입하고, 그 사람이 인물이라 판단되면 국민들이 나서서 밀어준다. 그 힘으로 정책을 만들고 나름대로 노선이 확실한 외교정책을 펼친다.
짧지만 많은 것을 느낀 여행이었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도쿄보다 춥고 거칠긴 하지만 역시 내 나라가 좋다.
앞으로는 어느 한 도시를 집중해서 탐방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