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나는 무책임한 사람일까?
제주에서의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 시간은 벌써 서늘한 가을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마케터는 이 맘때쯤 크리스마스와 새해 프로모션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제 다가오는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 날도 크리스마스 프로모션 준비를 위해 정신없이 미팅을 했던 그런 날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일을 하고, 밥을 먹고, 회의를 했다. 유난히도 회의가 많았던 날, 그날의 마지막 회의였던 팀 미팅이 끝나려는 찰나 갑자기 팀장님이 불길한 멘트를 날렸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낼게요. 지현님은 잠깐 남아주세요."
팀 미팅은 화상회의로 진행되고 있었다. 팀장님의 마지막 발언을 끝으로 줌 회의 창에서는 나와 팀장님 얼굴만 남은 채,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 둘씩 사라졌다. 갑자기 소환된 나는 홀로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그런거지? 내가 뭐 잘못한게 있나?
"지현님, 제가 곧 그만둘 것 같아요."
"네??"
"갑작스럽죠? 미안해요. 그래서 다른건 아니고 지현님한테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요. 예상하고 있겠지만…혹시 팀장해 볼 생각 있어요?"
"아니요?"
팀장님이 그만둘 예정이란 말을 꺼내자마자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나에게 또 다시 불편한 제안을 하기 위해 잡은 미팅이었다는 걸. 이전에 한 번 예방주사를 맞은 덕분인 걸까? 예상치 못했던 제안에 당황할 겨를도 없이 내 입에서는 반자동적으로 ‘아니요’라는 답변이 튀어나왔다. 주인이 머리를 굴리기도 전에 주인을 구하려고 ‘아니오’라는 답을 바로 꺼낸 나의 기특한 입…이 미팅이 끝나면 칭찬을 해줘야겠다. 그나저나 이 미팅은 언제 끝날까? 끝나기는 할까? 이 상황은 또 어떻게 모면할 수 있을 것인가? 잠깐의 시간이 억겁과 같이 느껴지고, 내 두 손에서는 땀이 나기 시작했다.
"팀장은 제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리더 경험도 없고, 팀을 이끌면서 방향성을 제시할 자신도 없어요. 팀원들의 모든 업무를 잘 챙길 자신도 없구요. 그리고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팀장님 매일 야근하시는거 너무 힘들어 보였어요. 저는 매일 자정까지 일하고 싶진 않아요. 그건 제가 원하는 삶이 아닌걸요."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될까 싶었지만 솔직한 내 생각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최선의 방어라 판단됐다. 정제된 표현은 아니었지만 내가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팀장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야 겨우 겨우 나에게 주어진 일을 소화하는 수준인데, 내가 어떻게 팀의 모든 업무를 챙길 수 있을까?
"시간을 좀더 줄테니 곰곰히 생각해보는건 어때요?"
"…정말 솔직히 말하면 시간을 더 주셔도 제 생각이 변하진 않을 것 같아요. 죄송해요."
"하하 난 이제 나갈 사람인데 나한테 죄송할게 뭐가 있어요. 안그래도 실장님이 팀장 할 만한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셨는데 본인이 원하지 않을 거라고 말은 했어요. 아마 지현님한테 미팅 요청은 갈거에요."
"아…네…"
"잘 이야기해봐요. 하기 싫으면 지금처럼 명확하게 말하구요.
"네 알겠습니다. 근데 팀장님 갑자기 왜 그만두시는거에요…"
"나도 힘들어서 그만두는거지 뭐~"
팀장 경력만 수년째인 베테랑 팀장님도 그만두는 이유가 ‘힘들어서’였다. 그런 자리를 아무 경험도 없는 내가 어떻게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힘들어서'라는 네 단어가 단순히 '업무 강도'만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뭣모르고 그냥 저지르기에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눈치 챈 상태였다. 베테랑도 힘들어 하는 자리, 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지는 자리, 아래에서도 치이고 위에서도 치이는 외로운 자리, 그런 자리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갈 만큼 용감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감당하지 못할 직책을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상상 속 나는 부족한 능력을 노력으로 메우기 위해 매일 밤 야근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회의를 참석하느라 하루가 다 가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파악하느라 발을 동동 굴렀다. 매일 매일 감당 못할 일과 회의에 버거워하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할 줄 아는건 엉덩이 붙이고 앉아 노력하는 것밖에 없어서, 부던히도 노력하지만 팀장이 노력한다고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갈팡질팡하는 초짜 팀장과 그런 팀장을 바라보며 답답해하하는 팀원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상상만으로도 피곤했다. 뭐라도 하나 좋은게 떠올라야 할까 말까 고민이라도 하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나에게 팀장 제안은 한 쪽으로 기울어진 저울이었다. 팀장으로 얻을 수 있는 돈과 명예, 권력은 내 저울에선 너무나 가벼운 추 1개일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팀장님의 퇴사 소식도 혼란스러운데, 또 다시 원치 않는 제안으로 실장님과 면담까지 해야 하다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나 잘났다고 자기 PR을 하지는 못할 망정, 역량이 부족해서 팀장할만한 재목이 못된다는 이 우습고도 황당한 PR을 몇 명에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사회생활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나를 지킬 수만 있다면 이 황당한 자기 PR도 기꺼이 감내해내는 수밖에…내 저울은 이미 계산이 끝나서 조율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새로운 메신저가 도착했다.
- 지현님 안녕하세요? 처음 DM드려요. 잠깐 논의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내일 오전 10시에 30분정도 짧게 미팅할 수 있을까요?
피하고 싶었던 실장님과의 미팅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