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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지현 Oct 19. 2024

거절멘트.txt

3부. 나는 무책임한 사람일까?

실장님과의 미팅이 다음날 오전 10시로 잡혔다. 어떠한 이야기를 듣더라도 나의 답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내 생각을 정리해서 조리있게 잘 전달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나보다 한참 위인 상급자의 제안을 거절하는 상황이 부하 직원 입장에서는 여간 불편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실 회사에서 시키면 닥치고 해야지 안하고 말고가 어디 있냐는 꼰대같은 생각을 했던 회사원이 바로 나였다. 이런 꼰대 회사원이 직장생활 10년만에 처음으로 한참 위 상급자의 제안을 뿌리치고 거절하려고 한다니, 보통 배짱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정중하게 내 의사를 말하면서 잘 거절할 수 있을까? 내가 당장 그만둘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같이 일을 해야 하는 사이인데 거절을 하더라도 예의있는 거절이 필요했다. 나는 흡사 면접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머릿 속으로 예상 답변을 읊어보았다. 그러다 이내 안되겠어서 노트북을 켜 메모장을 켰다. 그리고 중얼중얼 머릿속에 떠오르는 답변을 써보기 시작했다. 예상 질문과 그에 대한 나의 답변 정리였다. 


이게 면접이라면 이보다 더 황당한 면접이 없다. 내가 능력이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면서 상대를 설득해야 하다니,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황당한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써서 말할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예의있게 거절 의사를 전달해야했다. 


말도 안되는 예상 답변을 쓰고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그리고 오지 않길 바랐던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 정리를 하고, 씻고, 책상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기 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 잡았다. 원래라도 실장님과의 미팅은 불편할 수밖에 없는데, 내가 불편한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 자리였다. 


'이번넘기면 괜찮을거야. 다시 내가 원하는 생활로 돌아갈 수 있어.'


그리고 미팅이 예정되어있던 시각, 오전 10시가 되었다. 

   

"지현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처음 이렇게 인사하게 되네요. 안그래도 실원들 한 명씩 돌아가면서 따로 미팅을 하고 싶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못하고 있었어요. 갑작스러웠을텐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처음 보는 실장님은 걱정과 다르게 상냥하고 친절한 분이셨다. 딱딱하고 불편한 시간이 될까 걱정이었는데, 상냥한 실장님의 모습에 긴장을 아주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네. 양해해줘서 고마워요. 오늘 미팅을 요청한 이유는, 이야기 들었겠지만 지현님 팀장님께서 다음달에 그만두실 예정이세요. 그래서 당장 팀장이 공석이 되어 새로운 팀장님 선임이 필요한데요. 외부에서 알아보기 전에 내부에서 할 만한 사람이 있을지 검토중이었어요. 제가 지현님께서 적임자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팀장직을 맡아줄 수 있을지 직접 물어보고 싶었어요."


드디어 나왔다. 면접 예상질문 1순위이자 유일한 질문, “너 팀장할래?”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 저장되어있던 파일을 열었다. 어젯 밤 작성하였던 답변이 담긴 파일이었다. “파일명 : 거절멘트.txt”


거절멘트.txt


네. 사실 어제 팀장님이 언지를 주셔서 미리 내용은 들은 상황이었습니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는데, 너무 죄송하지만 저는 팀장 적임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팀장은 업무 수행능력도 중요하지만 정말 조직을 관리하는 능력이 필수적이라 생각하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리더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팀장은 팀을 대표해 싸울 수도 있고, 어필할 것은 어필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한데 저는 그런 면도 부족하구요. 

지금 저희 팀엔 경험없는 저보다는 팀장 경험이 있는 사람이 와서 팀을 안정화시키는게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어제 밤 미리 적어둔 예상 답변 덕분인지 버벅이지 않고 차분하게 답을 할 수 있었다. 예의가 있어보였는지, 아니면 그냥 하기 싫다고 떼를 부리는 것처럼 들렸는진 잘 모르겠다. 솔직히 거절을 하는 상황이니 내가 아무리 정중하게 말한다 하더라도 좋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나쁘게 보이지 않았음 좋겠단 생각 자체가 욕심이겠지. 이제 미운털 박히는 건 어쩔 수 없다. 


"네, 지현님. 솔직하게 답변해줘서 고마워요.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회사에서 억지로 시키는 시대는 아닌 것 같아요. 회사 입장에서도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더 좋은 퍼포먼스를 기대할 수 있구요."


실장님의 말에서 뼈가 느껴졌다면 기분탓일까?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역할을 부여해야 더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은 진리다. 이 문장을 반대로 말하면 의지가 없는 사람, 즉 나같은 사람에게 맡기면 좋은 성과를 기대하기도 어렵단 뜻이겠지? 순식간에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조직원이 된 것 같아 마음 한켠이 씁쓸했다.


"이건 그냥 직장 선배로써 물어보는 질문이에요. 사실 지금은 팀장을 안할 수 있지만 연차가 조금 더 쌓이면 자연스럽게 직책자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을거에요. 지현님은 직책자를 맡을 생각은 있지만 지금은 너무 빠르다고 판단하는건가요? 아니면 관리자보다는 마케팅 업무 내 스페셜리스트로 커리어를 키우고 싶은 건가요?"


이건 면접 예상 질문에 없던, 그리고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나는 앞으로도 평생 팀장을 하지 않기 위해 도망다니며 회사생활을 할 것인가? 아니, 그렇게 계속 피해다니며 회사 생활을 할 수는 있을까? 


"그간은 팀장이라는 직책에 대해 깊게 고민해볼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요. 사실 팀장이라는 직책이 저에게 굉장히 먼 미래의 일이라 생각했거든요. 회사 생활을 하다보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나에게도 팀장의 기회가 올 수는 있겠단 생각을 막연히 했었지만 그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요. 아직 저에게 팀장이란 직책은 맞지 않는 옷이라 생각해요."


실장님이 아닌 직장 선배로서 물어보는 질문이라 하셨으니, 나도 직장 후배로서 두서없이 답하였다. 솔직한 생각이었다. 언젠가 막연히 회사생활을 하다보면 팀장을 할 때도 있지 않을까? 그때는 연륜도 배짱도 업무 능력도 지금보단 나을테니 내 저울도 조금은 단단해져서 팀장이라는 직책과 함께 주렁주렁 따라오는 업무들도 가뿐하게 쳐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의 유리 멘탈, 유리 가슴의 나에게 팀장은 무리다. 호랑이굴에 내 발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네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요. 지현님에게는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 있겠다 싶어요. 지현님 생각 이해하고 존중해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다른 대안을 생각해볼게요.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종종 이렇게 같이 이야기해요!"

"감사합니다."


걱정스러웠던 실장님과의 면담도 끝이 났다. 약 30분의 시간동안 나는 ‘내가 부족하다’는 자기PR만 주구장창 한 덕분에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그런데 마음 한켠이 어딘가 모르게 계속 찝찝했다. 이건 처음으로 팀장 거절을 했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달랐다. ‘거절’에 대한 죄책감도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다른 감정의 죄책감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바로 ‘우리 팀’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팀장 제안을 거절하면서 나는 살아남았지만, 우리 팀은 팀장을 이끌 적임자를 찾지 못한 채 여전히 표류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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