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나를 책임지는 사람은 바로 나
2024년 만다라트 계획표의 한 꼭지를 잡은 또 다른 키워드가 있었다. 바로 ‘기록’이다. 쓰지도 않으면서 매번 다이어리 사기 대회를 열면 내가 1등을 차지할 것이다. 매년마다 1월 한 달만 빼곡하고 나머지는 텅텅 빈 다이어리들을 보며, 올해는 절대 다이어리를 사지 않겠다 다짐하면서도 왜 사람은 늘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까? 난 올해 또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참이었다. 아니 사실, 만다라트 계획표를 쓰기 전부터 실수는 이미 저지른 상태였다. 새해 다이어리는 벌써 사둔 상태였고, 만다라트 계획표는 그저 이용당했던 것이랄까?
올해는 늘 실패했던 뻔한 다이어리 대신 새로운 방식으로 기록을 시도해보고 싶었다. 바로 불렛저널 다이어리다. 불렛저널 다이어리는 쉽게 말하면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다이어리에 나만의 방식으로 매월 레이아웃을 잡아 한달을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원하는 방식으로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기 때문에, 좀더 작성자의 취향대로 다이어리를 꾸밀 수 있었다. 나처럼 일정을 기록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과감히 다이어리에 일정을 기록하는 영역은 빼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1월 1일 새해, 다이어리 제일 첫 장에 만다라트 계획표를 그린 후 뒷장부터 나만의 불렛저널 다이어리를 셋업했다. 1월 한 달을 나답게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떤 내용을 기록하면 좋을지 상상하며 다이어리를 꾸몄다. 좀더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다이어리에 매일 그날 있었던 일과 감사한 점 3가지를 쓸 참이었다. 한 해 어떤 책들을 읽었는지, 그리고 그 책을 읽으며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 짧게 정리하는 칸도 마련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다이어리에 자를 대고 쭉쭉 선을 그으며 멋있게 탄생할 나만의 다이어리를 상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나는 미술 감각이 제로라는 점이었다. 나의 새 다이어리는 내가 꾸미면 꾸릴 수록 점점 더 볼품 없어졌다. 자를 대고 그었음에도 삐뚤어진 선과 구석 구석 묻어있는 볼펜 똥들을 바라보니 한숨만 나왔다. 내 상상 속 다이어리는 이게 아니었는데… 그래도 꾸미는 것보단 내용이 더 중요하니 1월 한 달간 잘 기록해보며 보완해보자고 나를 달래며 그렇게 완성했다.
그리고 한 달 후, 나는 불렛저널과 과감히 이별을 고했다. 나는 불렛저널 다이어리를 기록하기엔 미적 감각은 없으면서도 쓸데없이 예민하고, 무엇보다 귀찮은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자 대고 줄 긋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지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손재주는 없는 주제에 줄을 그을 수록 지저분해지는 내 다이어리를 보면서 마음 근력이 단단해지기는 커녕 스트레스만 더 받았다. 나는 그냥 잘 만들어진 다이어리를 하나 사서 쓰는게 내 정신 건강에 맞아보였다. 역시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게 나한테도 다 좋은건 아니다. 이 불변의 진리는 직접 해봐야 깨달을 수 있다.
그래도 한 달간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매일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출근 전 갖는 나만의 시간동안 책읽기 뿐만 아니라 기록도 꾸준히 하였다. 전날 있었던 일들, 내가 느낀 감정, 그리고 하루 중 감사했던 일들을 짧지만 꾸준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일정을 관리하는 용도 대신 내 생각과 감정을 담는 용도로 사용하니 그렇게 기록과 담쌓고 쌓았던 나도 아주 조금은 기록에 재미를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내 못생긴 불렛저널에 쓰느라 마음 한 켠의 스트레스는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불렛저널 다이어리와 이별을 고하자마자, 나는 연희동에 있는 소품샵에서 새로운 다이어리를 구매하였다. 먼슬리 캘린더와 데일리 노트로 이루어진 깔끔한 다이어리였다. 특별한 기교 없이 날짜와 밑줄만 그어져있는 이 다이어리의 심플함이 좋았다. 나도 새로 산 다이어리의 심플함처럼 예쁘게 꾸미려 애쓰지 않고 그저 하루 하루의 내 생각을 편안하게 담고 싶었다.
그리고 예쁘게 다이어리를 쓰고 싶다는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으면서 부터, 나는 마침내 솔직하고 담백한 기록을 하루 하루 남길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일기를 쓰며 하루를 계획하고, 리뷰하고, 느낀 점을 남겼다. 특히 가장 열심히 쓴 기록은 감사일기였다. 감사일기는 전날 나에게 있었던 일 중에서 감사했던 일 딱 3가지만 꼽아 짧게 기록하는 것이다. 감사일기를 쓰면서 나에 대해 새롭게 알게된 사실이 있는데 나는 감사함에 꽤나 엄격한 사람이란 점이었다. 회사에서 습관적 ‘감사합니다’를 남발하면서도 속내에는 ‘이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 하는거 아니야?’ 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내가 감사일기를 쓰려니, 초반에는 하루 중 감사한 일이 생각나는게 전혀 없어 3개는 커녕 겨우 하나 쥐어 짜내 쓰는 것도 힘들었다. ‘이게 진짜 감사한건가? 아냐. 솔직히 별로 감사하진 않았어’의 반복이었다. 감사일기를 일주일만 써도 삶이 긍정적으로 변한다던데, 나에게는 역시 통하지 않는 것인가도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일 아침 감사일기를 꾸준히 쓰면서 내 감사함의 기준이 관대해지기 시작했다. 점심먹고 산책을 나갔는데 날씨가 좋은 것에 감사하고, 오늘 하루 일찍 퇴근한 것에 감사하며, 푹 자고 일찍 일어날 수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을 만큼 관대함이 생긴 것이었다. 매일 감사일기를 쓰면서, 감사함의 기준에 관대해질수록, 일상의 소소함에 감사함을 느낄 수록 나의 행복도 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매일의 기록이 알려준 큰 깨달음이었다. 나는 점점 기록으로 내 스스로가 변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지금도 기록으로 나의 변화를 체감하고 있는데, 연단위로 보면 이 변화가 얼마나 더 크게 체감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1년 후의 나는 얼마나 더 크게 발전할지 궁금해졌다.
인터넷에서 수많은 검색끝에 5년 다이어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다이어리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5년 다이어리는 말그대로 하나의 다이어리를 5년간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5월 5일의 기록을 2024년부터 2028년까지 5년간 하나의 페이지에 기록하는 것이다. 한 해의 다이어리를 다 쓰고, 그 다음해에 다시 첫장부터 펼쳤을 때 1년 전에 했던 내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변화'를 어떻게 드라마틱하게 느낄 수 있을지 방법을 찾던 나에게는 가장 적합한 다이어리였다.
유일한 고민은, 이걸 1월 1일이 아닌 애매한 타이밍에 시작하는게 맞을까라는 점이었다. 1월 1일에 이 다이어리의 존재를 알았다면 참 좋았을텐데,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이미 지난 일인걸 어쩔 것인가? 약간의 망설임 끝에, 어차피 나만 보는 다이어리인데 1월 1일에 시작하던 4월에 시작하던 뭔 대수인가! 라는 결론에 이르고 인터넷에서 미도리 5년 다이어리를 샀다. 5년간 쓸 다이어리인데 비싸더라도 좋은 다이어리를 사고 싶었다. 장비 욕심은 끝이 없다.
그래서 2024년 4월 20일부터 5년 다이어리를 쓰고 있다. 매일 아침에 감사 일기를 쓰고, 5년 다이어리까지 쓰면서 하루의 기록을 마무리한다. 앞으로 1년 후, 1년 전 내가 남긴 기록들을 보며 내 모습이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궁금하다. 분명 긍정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있을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에 1년 전 기록을 읽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고 즐거울 것 같다. 그 모습을 상상하면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