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오후 11시 47분. 시간을 확인한 해주 씨는 포근한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리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오늘은 꼭 일찍 잠들고 말 테다. 해주 씨는 굳게 다짐하며 가습기 소리를 백색 소음 삼아 편안한 상태에 이르려고 노력했다. 희미한 빛이 어둠에 잠겼다가 초록색으로 변하기를 반복하자 해주 씨의 숨소리가 점점 편안해졌다. 코끝에 살짝 닿은 이불에서 새로 바꾼 섬유 유연제 향이 났다. 해주 씨의 마음에 쏙 들었다. 정말, 오늘만큼은 꿈도 안 꾸고 깊게 잠을…….
"그 빨간 자국은 뭐야?"
누군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주 씨의 한쪽 눈썹이 움찔거렸다.
"아, 이거. 부대찌개 국물이 튄 거야. 사람들한테 나눠주다가. 멀리 앉아 있었는데, 그냥 가만히 있지."
"그래도 의도는 좋았잖아."
"대리님 옷에도 튀었어."
아이고……. 여기, 저기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해주 씨는 애써 옆으로 몸을 돌려 누워 한쪽 귀를 막고 가습기 소리에 다시 집중했다. 쉭, 쉬이이익. 가습기가 한숨처럼 수증기를 내뿜었다.
"너도 만만치 않은데?"
"이건 보드 마카야. 회의 때 발표가 있었거든."
"고생했네."
"고생했지. PPT 파일이 날아간 순간부터 해주가 땀을 엄청나게 흘리기 시작했거든. 겨드랑이 만큼은 안 보이게 막아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어."
해주 씨는 이불을 마구 뭉쳐 끌어안고 얼굴을 완전히 묻어 본격적으로 냄새를 맡았다. 오늘은 절대로 눈 뜨지 않을 거야. 잘 수 있다. 난 내일도 출근해야 한다고. 자자. 자야 한다.
"청바지, 너는 세탁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 왜 또 왔어?"
"비가 오던 날 해주가 날 입고 낮은 운동화를 신고 다녔어. 종로구 일대를 내가 다 쓸고 다녔지. 청소부를 왜 뽑나 몰라."
"그래서 쟤도 잔뜩 구겨져서 저기 바닥에 널브러져 있구나?"
"안타깝게도 수명이 얼마 안 남은 거 같아."
아, 운동화 또 사기 힘든데. 너무 세게 빨았나? 해주 씨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냐. 난 안 들려. 자야지. 자야 한다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애석하게도 해야 한다고 하면 하기 싫고, 하지 말아야 한다면 괜히 하고 싶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날 운동화와 함께 축축하게 젖었던 양말이 떠오르자 해주 씨는 괜히 불쾌해져 발가락만 이불 밖으로 살짝 꺼냈다.
"그쪽은 처음 보는데? 해주가 새로 샀나 봐?"
"난 2주 전에 소개팅 나갔을 때 입었어."
헉! 해주 씨가 두 눈을 번쩍 떴다. 바쁜 일상 덕분에 겨우 잊었던 기억이 다시 스멀스멀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왔다.
"어땠어? 데이트에 나가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네. 우린 출근할 때나 입는 데 말이야."
"넌 사람 구경이라도 하지, 나는 잠옷 된 지 오래야."
흥분한 목소리들이 점점 커졌다. 안 돼. 제발 말하지 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마…!
"인간의 3대 욕구가 뭔지 아나?"
트위드 원피스가 담배라도 피웠는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욕구? 욕구가 뭐지? 셔츠와 잠옷 바지가 팔랑거리며 고민했다. 야한 거 얘기하려는 거 아냐? 눈치 없는 운동화가 설렌다는 듯 환호성을 질렀다.
"식욕, 수면욕, 배설욕."
뜻을 이해하지 못한 주변 빨래들이 잠시 침묵했다.
"해주는 그날 배설욕에 패배했다."
트위드 원피스가 천천히 뒤를 돌며 완전히 망가진 지퍼를 영광의 상처처럼 보여줬다. 주변에 걸려 있던 옷들이 몸을 마구 흔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늘어난 티셔츠는 너무 심하게 웃은 탓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야! 너희 다 조용히 해!"
결국, 참지 못한 해주 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불을 켰다. 그러자 방정맞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베란다에 걸려 있던 빨래들의 그림자는 시치미를 떼듯 미동도 없었다. 해주 씨가 씩씩거리며 창문을 벌컥 열고 걸린 빨래들을 노려봤다. 한낱 허물들 주제에. 바닥에 떨어졌던 티셔츠는 어느새 다시 올라와 얌전히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짜증 나."
해주 씨는 맨 끝에 걸려 있는 트위드 원피스를 신경질적으로 집었다. 만지기만 해도 그날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버리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큰마음 먹고 산 비싼 옷이라 함부로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는 없었다. 해주 씨는 대충 구겨서 옷장 안에 쑤셔 넣었다.
"이러면 너도 별수 없겠지."
마지막으로 경고하듯 빨래들을 노려본 해주 씨는 다시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이젠 정말 자야 해. 시간이 좀 흐르자 해주 씨의 가슴팍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열심히 일하던 가습기는 목표한 습도를 맞추고 잠시 멈췄다. 그러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커튼 틈새로 조용히 들어온 달빛이 해주 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근데, 해주 내일은 뭐 입는데?"
누군가 작게 속삭였다. 번쩍. 해주 씨의 두 눈이 자동차 쌍라이트처럼 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