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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보리

<나의 보리>

epi 8. 땅콩 요정

by choi Boram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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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혹은 아주 늦게 잠자리에 든다.

보통은

책을 보다 책을 덮어놓지도 못하고 그대로 스르륵 쥐도 새도 모르게 잠이 드는 편이다. 아주 보통은.

그런데

가끔 아주 보통이지 않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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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봐도 봐도, 봐도, 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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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는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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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을 다 읽고 나서도 이건 뭐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고,

잠은 더더욱 오지 않는

말똥말똥한 그런 보통이지 않은 날.


불이 꺼져 처음엔 깜깜하다가 이내 깜깜함 속에 밝아진 천정을 보고 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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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난다.

뭉게뭉게 피어난 화는 화를 멈추지 못하게 하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화는 다음화를 부른다.

분하고 화가 난다.

화가 났다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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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게뭉게 피어난 생각들은 이내 곧 슬퍼지기도 하고...

아직도 생생한 순간의 오래된 장면들과.

그렇게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늙은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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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현재가 미래와 손을 잡고는 머릿속의 생각들이 모조리 한편이 되어,

순간 이렇게 밀어닥쳐 나를 벼랑으로 몰 때면

나는 도무지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이 초조하고 불안해서 눈물이 난다.


그 언젠가부터 차곡차곡 고여있던 눈물부터 지금 막 태어난 불안함의 눈물까지

이렇게 보통이지 않은 날 아무도 모르게 침대 위에서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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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가끔

보통이지 않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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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누워있던 나의 보리는

민망하리만큼 나를 빤히 쳐다보는 거 이외엔 딱히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다.

깜깜한 방 안에 익숙해진 나의 눈은 나의 보리의 눈이 보인다.

위로하는 눈일까. 비난하는 눈일까.





나의 보리는 쭉 마치 그림자 같이 있다가

이 정도 기다려주면 되었다~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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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 다가와 냄새를 맡는다.

닭똥같이 흐르던 내 눈물 냄새.


그건 아마도, '이제 그만해'라는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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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식이면


한참 잘 흐르던 눈물이 멈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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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보통이지 않은 날의

눈물은 마무리된다.


슥 다가와 냄새를 맡거나 내 얼굴에 발을 올리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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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나의 보리의 발 냄새.







나의 보리와 한 가족이 되기 전.

14년이란 긴 시간 동안 요크셔테리어 한 마리를 키웠었다.

나의 유년시절을 같이 보냈던 작고 앙칼지게 귀여웠던 '토니'

나의 꼬꼬마 시절.

꼬꼬마가 생각하기에 가장 세련되고 왠지 모르게 있어 보이는 느낌의 이름 '토니'


14년간의 익숙한 냄새.

나의 보리에게도 나의 토니와 같은 발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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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

꼬소한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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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발은 마법과 같은 발로

그러니까...

개의 발 냄새는 뭐랄까 텁텁하지만 꼬소하고 따뜻하고 포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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텁텁하지만..

꼬소하고..

따뜻하고 포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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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

땅콩 같은.

햇볕과 땅속 포근함을 품고 풍요롭게 잘 익은 땅콩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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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보리의 발 냄새는

맡고 있으면 묘하게 마음 구석 안쪽까지 안심되는 그런 냄새가 난달까.

말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 그런, 어떤 묘한 힘이 있다.

나의 보리 발에 코를 대고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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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토닥토닥.

다~괜찮다고 토닥토닥.

땅콩 요정들이

괜찮다....라고

마음의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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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괜찮다.. zzzzzz

괜찮다...라고..

괜찮아.... zzzzzz

zz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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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zzzzz









_언제 내가 울었었나..

꿀잠. 숙면. 딥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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