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가 만난 사람들-10]
사람마다 인생의 전환점이 있다. 그 시간은 다양한 형태로 찾아온다. 사람을 만나 전환의 계기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건이 동력이 되어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책을 통해 근본적 변화의 기회를 찾기도 한다. 어느 순간 삶의 길에 길잡이가 된 것은 사람과 사건과 책, 모두였다.
만나고 경험하고 읽어 내려갔던 무수한 날들의 조각들이 큰 줄기의 흐름을 형성한다. 그 흐름에 온몸을 내던지고 치열한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준배형의 1막은 1등 인생이었다. 학창 시절 내내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었다. 자연스레 S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촉망받는 경제 학도의 미래는 밝고 뚜렷했다. 거침없이 질주하던 그의 삶을 멈추게 하는 만남이 찾아왔다. 우연히 만난 선배의 한마디가 그의 삶을 흔들어 놓았다. "뼈 빠지게 일만 하는 농부인 아버지는 왜 평생 가난한지 모르겠다."라는 고민이었다. 가벼운 화두처럼 던져진 그 말은 책과 토론을 통한 학습을 통해 더욱 깊은 고민으로 이어졌다.
'앞으로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물음 앞에 준배 형은 고뇌에 찬 결심을 했다.
정해지고 보장된 길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삶이다. 다 같이 잘 사는 삶을 추구할 때 자신도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까지와는 반대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2막의 시작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실천은 숭고하다. 공동체와 타인을 위한 삶을 살고자 다짐한 준배형의 시간은 거침이 없었다. 낮은 곳으로 향했다. 어두운 곳으로 뛰어들었다. 현장에서 밤낮으로 몸을 던져 부대끼고 싸우며 개척해 나갔다. 그럴수록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의 순간들이 찾아왔다.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체득했다. 무조건 1등 만을 추구했던 시간이 하찮은 삶이었음을 자연스레 알게 됐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할 때 느끼는 만족과 희열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준배형이 꿈꾸고 계획했던 2막의 삶과 세상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로 멈춰야 했다. 세계사의 큰 변혁이 몰고 온 충격과 혼돈은 동방의 빛나는 청년들의 발목을 잡았다. 단단하고 무쇠 같던 고리들이 느슨하게 풀어지고 끊어졌다. 사람이 아닌 사건이 또 다른 전환을 요구했다.
준배형의 3막은 자본주의 핵심에서 시작됐다. 화려한 간판으로 대기업에 어렵지 않게 입사했다. 일탈에 속앓이 하시던 부모님은 대기업을 다닌다고 좋아하셨다. 구매부에 근무하는 동안 직장 생활의 양면을 생생하게 경험했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어색하고 불편했다. 10여 년의 회사 생활은 세기말 IMF라는 국가부도 사태의 파도에 휩쓸려 뒤집혔다. 대기업과 은행, 증권회사 등 자본주의 첨병이자 상징들이 속수무책으로 흩어지고 무너져 내렸다. 화려할수록 더 빠르고 쉽게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달콤한 자본의 민낯은 거품이고 안갯속이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은 오히려 회사를 그만둘 수 있는 공식적 핑계가 되었다. 3막이 막을 내렸다.
4막의 인생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났다. 도시가 아닌 농촌이었다. 순수하게 땀 흘리는 일을 하고 싶었다. 공장에서도 일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찾았다. 농부로서의 삶이었다. 청춘의 한 시절을 달궜던 그 열정과 희열이 다시 솟아났다. 그렇게 이곳으로 왔다.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준배형의 최종 선택은 양봉이었다. 자연에 깃들어 살면서 좋은 먹거리를 생산하며 맛보는 일의 가치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최고의 농사였다. 양봉 교육에서 만난 분을 사부로 모셨다. 직접 일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재미있었지만 배울수록 의문은 커졌다. 모든 농사가 그렇듯 사부와 대부분의 양봉농가들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관행농법으로 벌을 키우고 꿀을 채집, 가공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벌이 죽는다는 명확한 교육도 받았다.
벌통을 구입해서 교육받고 전수받은 방법으로 양봉을 시작했다. 배운 대로 실천했다. 항생제는 물론 벌에게 해를 입히는 진드기와 벌레를 잡기 위해 벌통에 살충제를 뿌리는 게 당연했다. 어느 날, 벌통에 약을 하다가 심각한 문제를 발견했다. 약 냄새 때문에 제대로 숨 쉬고 일하기가 힘들었다. 벌 보다 내가 먼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본적인 회의가 들었다. 무모하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항생제와 살충제를 버렸다. 벌의 본성을 살리고 자연의 힘을 믿는 농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욕심껏 생산하기 위한 기술이 아닌 제대로 된 꿀을 만들어 내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다. 나름 여러 종류의 먹거리 생산에 대한 과정과 방법에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형님이 들려준 양봉업계의 현실은 충격이었다. 믿고 먹을 수 있는 좋은 달걀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된 귀농 전의 시간이 떠올랐다. 우리 농업의 생산과 유통 방식은 자세히 알고 나면 먹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자연 그대로의 식품이라 믿고 먹었던 꿀도 벌과 자연의 힘보다는 인위적으로 가공된 식품이 대부분이었다.
준배 형의 꿀은 진짜 꿀이다. 무농약, 무항생제의 숙성 꿀이다. 수분을 낮춰 보관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인위적인 가열을 하지 않는다. 생산량은 관행으로 만들어진 꿀의 1/3 정도다. 당연히 가격은 비싸다. 어찌 보면 바보 농부다. 누가 제대로 알아주지 않고 찾지도 않는 꿀을 벌과 함께 혼을 담아 우직하게 만들어 내고 있다. 좋은 꿀의 유통 기한은 4천 년도 가능하다고 한다. 준배형이 만든 꿀이 그럴 거란 믿음이 생긴다.
어릴 적 외삼촌이 벌을 키우셨다. 자연스레 꿀을 많이 먹었다. 주로 아카시아 꿀과 밤 꿀이었다. 아무리 추운 겨울도 추운 줄 모르고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 중에 하나가 어릴 적 꾸준히 먹었던 꿀이었음을 믿고 있다.
준배 형은 성장 발육에 좋은 꿀을 성장기 아이들과 임산부들에게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게 꿈이다. 그래서 더욱 좋은 꿀을 생산하기 위한 농부의 길을 당당하고 거침없이 가고 있다.
준배 형은 뜻을 같이 하는 활동에서 조금 늦게 평생의 동지이자 반려자를 만났다. 서로에게 굳건한 믿음이고 든든한 힘이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도 아빠로서의 기본을 지키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한다.
준배형의 취미는 근력운동이다. 틈만 나면 근력 강화 운동을 습관적으로 한다. 60대를 훌쩍 넘어선 몸이 단단하고 탄력이 넘친다. 강단 있는 철학의 바탕에 건강한 몸까지 양수겸장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벼르고 벼르던 삶의 가치와 이상을 찾고 실현해 나가는 준배형의 달달한 인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준배형의 인생 5막은 생명의 먹거리를 향한 4막 여정의 완성에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