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 더위는 더 길고 무서웠다. 순간순간 아찔하고 섬뜩했다. 더위를 이기는 방법을 찾지 못해 불안 속에 허덕거렸다. 지치고 무너지며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인간의 무지와 오만이 불러온 기상이변은 첨단 예측 장비들을 비웃으며 보란 듯이 심술을 부렸다. 예보된 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퍼부었다.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던 극서의 시간이 마지 못해 힘을 잃어가고 있다.
지난 시간, 폭염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던 것들이 있었다. 덕분에 마음의 여유를 찾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배롱나무 붉은 꽃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도 오래오래 피어났다. 여름을 못 견디는 누군가를 위해 위로와 희망으로 다가왔다. 꽃 댕강 하얀 꽃도 뙤약볕을 벗 삼아 거뜬히 피어나더니 여전히 생생하다. 푸르른 대나무 잎의 사각거림과 청량함은 여유와 충전의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빼곡하게 들어선 대나무숲은 그늘이 되어 지친 누군가를 다독였다. 누르기만 하면 나오는 한 줄기 시원한 물줄기는 흐르는 땀을 씻어 주고 타는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메마르지 않고 약속한 듯 뿜어져 나오는 당연함이 다행이고 고마웠다.
가을 축제의 주인공이 될 대추나무도 주렁주렁 열매를 매달았다. 혹서의 시간을 견뎌 냈으니 더 굵고 알차게 영글어 지역의 자존심을 드높여 주리라 믿는다. 축제가 한창일 그날을 모두가 설렘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힘겹게 여름을 밀어내는 가을바람에 담아 보낸다.
땀 흘린 농부를 위해 들판의 벼들도 안간힘을 쓰며 버텼다. 길어진 불볕더위에 병들어 제 몫을 못하는 벼들이 안쓰럽다. 예년만큼의 수확을 기대하기 힘들지만 마지막까지 쓰러지지 말고 제 몫을 다해 주길 바랄 뿐이다.
여름의 절정에도 우리 주변의 삶들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어김없이 배달되어 온 택배를 보며 기사님들의 굵은 땀방울을 생각했다. 이른 아침 더위에도 누군가의 소중한 물건들을 분류하고 나르며 차곡차곡 쌓아 올려 전해주는 마음만 덜컥덜컥 받았다. 시원한 음료수 한 잔 건네지 못한 미안함에 마음이 무겁다. 선선한 바람이나마 그분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살포시 어루만져 주었으면 한다.
집집마다 우편물을 배달하느라 한여름을 쉼 없이 달린 집배원분들의 노고에도 감사드린다. 햇빛 가리개 없이 헬멧을 쓰고 푹푹 찌는 거리를 가로지르는 수고는 서로와 서로를 연결하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비록 반가운 편지와 기다리던 소식은 오지 않아도 조그만 우체통에는 늘 꼭 필요한 무언가가 담겨져 있었다.
일정한 시간에 맡은 곳들의 쓰레기를 말끔히 치우는 환경미화원분들의 마스크와 젓은 조끼도 보았다. 줄이려 해도 버릴 것들은 왜 그리 많이 나오는지 내놓을 때마다 자책했다. 버리기 위해 내놓은 저 물건들이 결국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우리가 마주할 재앙의 원인이 된다. 그분들의 수고를 덜어 드리기 위한 작은 실천들이 지구를 지키는 최소한의 의무다.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며 무너져 내리지 않은 것들로 인해 혹독한 여름은 가고 가을이 오고 있다. 가을을 마중 나간 지는 이미 오래. 절기가 돌아오고 달이 차오르는 날이 반복돼도 열기를 잃지 않는 여름의 기세에 잔뜩 주눅 들어 있었나 보다. 성큼성큼 와주면 좋으련만 자꾸 눈치를 보며 다가온다. 멀리서 더딘 걸음으로. 이제 가을은 약속된 날에 와주지 않는다. 계절은 더 이상 물리적 시간으로 오지 않기에 기다림은 그만큼 길어졌다.
이곳저곳으로 가을을 찾아 나선다. 폭염의 시간을 넘어선 모두의 노고와 결실을 위한 가을이 성큼성큼 다가오길 바라는 마음 담아 자연이 들려주고 보여주는 소리와 변화에 귀 기울이고 집중하며 간절함으로 불러본다. 창문 밖에 가을이 왔다.
어렵게 찾아온 시원한 가을바람과 햇살은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