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짧지 않은 시간을 잘 견뎌냈다. 누구를 만나 함께 했는지가 수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멈춰버려 더 이상 기능을 못하는 녀석을 버렸다. 오래 쓰기도 했지만 과부하가 결정타였다.
겨울 난방은 나무를 원료로 하는 화목보일러를 사용한다. 나무 중에는 참나무가 최고다. 참나무는 단단하고 잘 타며 오래간다. 겨울이 오기 전에 땔감 용 참나무를 구입한다. 잘 쪼개지지만 자르는 건 쉽지 않다. 기계톱이 아니면 엄두를 못 낸다. 10여 년 전, 시골생활의 경험이 많은 친구이자 선배농부의 강력 추천으로 기계톱을 구입했다. 고장도 적고 힘도 좋았다. 명성에 맞게 제 역할을 거침없이 해냈다. 늘 그런 줄 알았던 게 문제였다. 세월이 흐른 만큼 세심하게 살폈어야 했다. 주인이 힘을 잃어 가면 기계도 힘들어진다. 좀 더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는데 주인을 잘못 만났다.
기계도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 청결한 곳에 놓이고 싶어 하며 깔끔한 상태를 좋아한다. 게으르고 무심한 주인은 전반적으로 소홀했다. 청소를 자주 해주지 못했다. 깨끗하고 신선한 연료를 적정하게 넣어주는 데 부족함이 있었다. 먼지 없고 습도가 알맞은 곳에 보관하지 못한 잘못도 크다. 일과 휴식, 작동과 멈춤의 적절한 조절이 필요한데 막무가내 일꾼은 그마저도 조절이 안된다.
힘을 많이 쓰면 당연히 무리가 따른다. 말을 못 하니 동작으로 표현한다. 기계가 하는 가장 적극적인 표현은 멈추는 것이다. 몸살이 나듯 여기저기서 이상 신호를 보낸다. 처음엔 가볍게 수리가 가능하지만 점점 심해지면 심장인 엔진이 망가진다.
기계는 감정이 없다. 이성도 없다. 오롯이 이성과 감정의 소유자인 사람에 의해 조종된다. 사람이 멈춰야 기계도 멈춘다. 사람이 휴식을 취해야 기계도 열기를 식히며 숨을 고른다. 기계로 인해 사람이 다치는 건 온전히 사람 탓이다. 스스로의 이성과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 탓이다.
기계는 말이 없다. 무심하고 무념하다. 주인이 말하고 답해야 한다. 기계와의 대화는 자신과 나누는 속삭임이다. 몸과 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기계는 분신이고 거울이다.
기계의 움직임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 사람의 성격이 드러나고 생각이 나타난다. 부드럽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기계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소리마저 감미롭다. 음률과 동작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춤사위다. 육중한 포클레인과 트랙터도 미끄러지듯 이동하고 무거운 것들도 가볍게 들어 올린다. 미세하고 정확한 일처리는 예술의 한 경지다. 사람의 동작이 절묘하고 매끄럽다.
농부의 일은 필요한 장비를 적절하게 소유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 작물에 따라 요구되는 장비는 다양하면서도 전문적이다. 사람도 저마다의 개성과 능력이 다르듯 기계를 다루는 솜씨 또한 천차만별이다. 몸치, 음치, 박치가 있듯 기계치도 있다. 다행히 기계치는 아니지만 기계를 혹사시키는 악덕 주인이다.
일을 하다 보면 욕심이 난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일을 하지는 않지만 자꾸 무리하게 된다. 마음과 달리 힘은 떨어지고 의욕만 넘친다. 늘 몸 보다 마음의 소리가 크다. 머리는 몸과 마음의 중간에서 갈등한다. 이제는 몸의 소리를 듣고 움직이며 판단해야 한다.
농부에겐 특근이나 야근 수당이 없다. 어렵지만 적당히 일하고 꾸준히 쉬어야 한다.
농사는 아무나 짓는 게 아니다. 농부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돈을 버는 것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돈 보다 중요한 건 건강이다. 건강을 지키고 유지하는 게 농부의 사명이다. 적절한 휴식과 느긋한 마음이 필요한 이유다.
양을 정해 놓고 하지 말고 시간을 정해 놓고 일해야 한다. 한꺼번에 많은 일을 하기보다는 조금씩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수시로 일어나 앞을 가로막지만 그것도 나름의 중요한 이유가 있고 뜻이 있다. 긍정과 희망의 암시로 받아들인다. 지나고 보면 분명 그렇다.
사람과 기계의 운명은 비슷하다. 기계도 새것은 힘이 좋고 엔진소리도 부드럽다. 외관도 말끔하고 멋지다. 시간이 흐르면 벗겨지고 부식된다. 부품은 마모되고 부서진다. 수리하는 횟수가 많아진다. 그러길 반복, 어느 날 스스로 멈춘다.
기계의 멈춤을 소홀히 해선 안 되는 이유다. 그만큼의 일을 했고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다. 녹슬고 헐거워진 모습에서 나를 투영해 본다.
시작하는 사람보다 멈출 줄 아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낸다. 힘이 들어간 사람보다 보다 힘을 뻬고 다가온 사람에게 손 내민다. 짊어지고 가는 사람보다 내려놓고 가는 사람을 우러러본다. 악착같이 머무는 사람보다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에게 부러움의 눈길을 보낸다.
행복한 삶, 건강한 몸, 여유로운 일상을 위해선 멈추고 힘 빼고 내려놓아야 한다. 미련 없이 떠날 그날을 생각하며 오늘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