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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담 Jan 30. 2024

2평에서 누리는 행복과 풍요

공간의 힘

누구나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 한다. 크기나 형태, 위치는 중요하지 않다. 언제든 찾아들고 머무를 수 있는 곳, 위안이 되고 쉼이 되는 공간이면 충분하다. 


청춘의 한 시절을 보듬어주고 다독여준 곳이 있었다. 길을 잃고 헤맬 때 어서 오라 손짓했다. 흔들리고 삐걱거리며 막막한 날들을 벗어나고 싶을 때도 조건 없이 반겨주었다. 좋은 사람 만나도 함께 가고 싶었다. 고독과 자유를 사랑하라는 오랜 친구의 가르침을 실천하기에도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넓은 잔디밭과 가지런하고 정연하며 울창한 메타세콰이어, 잣나무, 은행나무 길을 걸으며 나를 찾았다. 둘레 산책로는 침잠의 길이었다. 선물처럼 주어진 공간. 기차와 버스, 배를 번갈아 타고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곳. 북한강에 있는 '남이섬'이다.


특별한 행사 때 말고는 조용하고 한적했던 육지 속의 섬. 

2000년 대 초반, 드라마 ‘겨울연가’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관광객이 폭주했다. ‘주식회사 남이섬’이 ‘나미나라 공화국’이란 콘셉트로 이 섬을 대대적인 관광지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섬은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인산인해였다. 숙소와 식당과 놀이시설이 급증했다. 넘쳐나는 인파와 음식냄새, 매캐한 연기와 소음으로 뒤엉킨 섬은 유흥과 레저의 첨단으로 달려갔다. 가족과 다시 찾은 그곳에서 탈출하는데도 세 시간이 걸렸다. 허탈하고 야속했다.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할 수도 없기에 상실감은  더 컸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 금단의 땅이 되었다. 소중한 공간을 잃어버린 공허한 마음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개인이나 가족이 행복하고 편안한 일상을 보내기에 적정한 공간은 어느 정도일까?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서로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친 몸과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는 곳, 존재 자체로 위로가 되는 장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다.


어렸을 땐 조그만 상자 안에서도 재밌게 놀았다.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 마냥 좋았다. 산에도 나만의 아지트가 있었고 들판 어딘가에도 은밀히 숨어 쉴 수 있는 공간이 존재했다. 고향 마을 곳곳에 자리한 나만의 작은 영토는 늘 나를 품어 주었다. 그 공간에서 꿈이 자라고 희망이 솟아났다. 때론 푸념을 들어주고 뿔난 마음도 달래주었다. 


시대의 흐름을 거부할 수 없다는 듯 고향마을과 사람들도 흔들리고 변했다. 작은 영토는 추억의 한편에 꼭꼭 숨겨두고 가끔 꺼내본다. 


대학을 다니면서 자취를 했다. 처음 구한 자취방은 말 그대로 쪽방이었다. 세면대와 싱크대를 하나로 사용했다. 3평 크기의 방은 불법 건축물이었다. 여름엔 비가 샜고 겨울엔 보일러가 고장 나 솜이불을 겹겹이 덮고 잤다. 문제투성이었던 그 방은 나에게 서울 생활의 혹독함과 생존의 몸부림을 가르쳐 주었다. 보증금마저 돌려받지 못하고 나왔다. 

두 번째 자취방은 2층 다세대 주택의 작은방 한 칸이었다. 방값이 저렴했다. 부엌과 거실과 욕실을 주인과 함께 쓰는 곳이니 당연했다. 평온하게 지내던 어느 날, 온 집안이 뒤집어졌다. 집주인아저씨가 알코올중독자였다. 술 안 마신 날은 천사, 술 마신 날은 악마. 알코올중독자의 전과 후를 생생히 경험하며 모욕도 당했다. 아저씨는 경찰서로 끌려가고 나는 그 집을 나왔다. 

세 번째 거처도 두 번째와 유사한 형태였는 데 주인집 사정으로 금방 나오게 됐다.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은 옥탑방. 가장 마음에 들었다.  5평에서 누리는 위안과 안식과 자유는 청춘의 한편을 살찌우는 자양분이었다. 옥탑방은 가장 독립적이면서 든든하고 아늑했다. 그곳이 좋았다.


아파트는 지금도 기형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똑같은 크기로 쌓아 올린 사각형의 크기와 제각각 붙여진 이름은 부와 신분의 판단 기준이면서 부자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아파트값의 오르 내림에 삶의 희로애락이 담겼다. 사람들은 아파트에 모든 것을 걸고 달려들었다. 일률적인 콘크리트 건축물의 마법은 인간세상의 많은 것을 좌우했다.  어느 순간 사각의 공간은 범접할 수 없는 가치가 되었다. 물론, 소박한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보금자리다. 아파트가 거주하는 집이란 사실 말고는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 나는 점점 그 공간에서 밀려났다.

자본의 힘 앞에 무력했고 소박한 야생의 본성에 버거웠다. 떠나고자 했고 떠밀려야 했다.


귀농과 동시에 운 좋게 지금의 집을 만났다. 20평의 작은 농가 주택. 아내와 아들, 딸과 지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한 순간도 집이 작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가난한 가장의 자기 위안이라 할 수 있지만 행복은 공간의 크기와 가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행복은 깃드는 존재들의 사랑과 존중, 소통과 배려에서 솟아났다.


딸이 집을 떠나면서 빈방이 생겼다. 아내가 멋지게 서재로 꾸며 주었다. 2평의 작은방이다. 

일하다가도 이 공간을 떠 올리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밖에서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곳, 이 작은 공간이 품은 세계는 무한하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나만의 세계로 빠져든다. 

때론, 아내와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영화를 본다. 좋아하는 노래도 마음껏 듣는다. 음량이 풍부하고 음질 좋은 스피커가 한 몫한다. 졸음이 밀려들 땐 흔들의자에 앉아 수면을 취한다. 

손님이 찾아와 잠잘 곳이 부족할 땐 거뜬히 몸 하나 누일 수 있다.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볼 때마다 절경이다. 

창문아래 노트북과 큰 모니터가 있는 곳을 빼곤 사방이 책장이다. 나를 둘러싼 것들이 책이란 사실만으로도 일상은 풍요롭다. 


이 공간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글쓰기다. 방에 들어오면 자동으로 노트북을 연다. 글을 쓰는 또 다른 공간에 찾아든다. 아직 내놓지 못한 글들의 아우성이 반갑다. 제목도 가제이고 주제만 있는 글들도 많다. 완성 됐지만 아직 꺼내 놓지 못한 글들은 그 자체로 뿌듯하다. 매일 쓸 수 있다는 것에 충만한 하루하루다. 작은 우주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기숙사에 있던 딸이 자취를 시작했다. 독립이다. 5평의 원룸. 서울이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자기만의 공간을 갖게 된 딸의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집에 내려와 기숙사에 들여놓지 못했던 애지중지한 물건들을 챙기는 딸의 얼굴은 들떠있었다. 남은 대학 생활과 이후에 펼쳐질 시간들 속에 이 작은 공간이 위로와 충전과 희망을 안겨주는 행복의 둥지가 되리라 믿는다.


새들도 깃드는 곳이 있다. 뭇 동물들도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공간 속에 본능적으로 찾아든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자기만의 공간으로 스며들어 살아 있음에 안도하고 살고 있음에 힘을 얻는다.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고 포장될 수 없으며 평가될 수 없는 공간 속에서 빛나는 생의 순간들은 차곡차곡 쌓여 간다.


아내와 함께 남은 삶을 풍요롭게 보낼 공간은 15평이면 충분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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