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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담 Apr 17. 2024

시골 정류장은 육지의 등대다

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 양쪽에 아담한 버스 정류장이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정류장은 때마다 새 단장을 한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곳이 아니라 제시간에 오는 버스를 타는 사람이 없는 정류장은 외롭고 쓸쓸하다.


시골 정류장은 육지의 등대다. 마을은 섬이고 버스는 섬과 섬 사이를 오가는 배다. 시골 버스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숨어 있는 정류장을 찾아 이동한다. 사람이 없는 마을은 무인도와 같다. 무인도에도 등대는 있어 꼬박꼬박 찾아다닌다. 멀리 들판을 가로질러가는 버스의 모습은 한 척의 배가 물 위를 미끄러지듯 항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버스는 다음 정류장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간다. 타고 내리는 사람이 없는 정류장을 그냥 지나치는 버스가 힘겨워 보인다.


정류장은 어딘가로 가야 할 누군가와 어딘가로 데려다줄 의무가 실행되는 곳이다. 같은 곳을 가는 인연과 낯선 곳을 가는 사연이 모여드는 곳이다. 각자가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가는 길, 설렘과 아쉬움을 안고나서는 길, 길을 나설 때 기다림은 이미 시작되었다.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과 달리 버스는 드문드문 더디게 온다. 정해진 시간에 버스가 와도 정류장엔 사람이 없다. 엇갈리는 사연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귀농 초기엔 읍내로 나가는 길에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어르신들을 태워다 드렸다. 무안할 정도로 고마워하시며 꼬깃꼬깃 구겨진 천 원짜리 지폐를 차비라며 몇 장 쥐여 주신 어르신도 계셨다. 자꾸 그러시면 다시는 안 태워 드린다고 손사래를 친다.

몇 년 후, 정류장에 앉아 계시는 어르신들을 더 이상 태워 드리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고 말 못 할 사정이 생겼다. 시골에서의 생활이 그렇다. 선의가 왜곡되고 혹시 모를 사고에 따른 책임도 온전히 떠안아야 되는 상황에 직면한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닌 뒷말들의 무성함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어르신들을 모른 체 지나치게 했다. 처음엔 마음에 걸렸으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요즘은 읍내로 나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시는 분들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분들이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다. 그분들이 앉았던 자리는 먼지가 자주 쌓이고 공간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학창 시절 버스를 타고 여행을 다녔다. 어디로 갈지 정해둔 곳 없이 무작정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운행 시간표와 행선지를 무심하게 바라본다. 그 순간에 마음을 사로잡는 지명의 표를 끊는다. 그렇게 무작정 낯선 곳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떠난다. 여행의 참맛이 거기에 있었다.

도착한 지역의 터미널에서 다시 버스 노선도를 본다. 정류장마다 마을 이름을 명패처럼 달고 나그네를 향해 손짓한다. 유독 눈에 띄는 마을 이름을 찾아 버스에 몸을 싣는다. 시골 버스는 타는 사람, 내리는 사람마다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사연과 감정을 담고 있다. 오래전부터 서로를 알아 온 듯 안부를 묻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로 왁자지껄이다. 듣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난다. 구수한 사투리도 곁들여져 정겹다. 정류장마다 그냥 지나치는 곳이 없다. 타는 사람, 내리는 사람의 움직임이 자연스레 교차하며 버스는 다음 정류장을 향해 간다. 내릴 곳을 정해 두었지만 굳이 내리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마지막 섬인 종점까지 갔다가 내려서 마을을 둘러보고 다음 버스가 오면 타고 나온다.

시골의 모든 버스는 반드시 면 소재지를 지나간다. 어느 곳이든 면 소재지 정류장은 사람들로 붐빈다. 그곳에 내리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다. 맛집이 있고 민박집이 있고 동네의 자랑거리가 있다. 인심 좋은 아저씨를 만나면 집까지 따라가 후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그런 여행이 좋았다.


어느 곳을 가던지 두려움이 없는 것은 정류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야 할 곳, 돌아와야 할 곳이 어디든 정류장에 있으면 버스는 약속처럼 나를 데리러 왔다. 그 믿음이면 충분했다. 정류장은 반드시 데려다주고 데리러 온다는 무언의 약속이 지켜지는 곳이다. 사람이 없어도 정류장은 버스를 기다린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단 한 사람을 위해서 오랜 외로움의 시간도 무심히 견뎌낸다. 이젠 기다리는 사람이 드물어 버스가 정류장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정류장이 더 이상 버스를 붙잡지 못할 때 그 존재는 가치를 상실한다.


급격히 줄어드는 인구와 자가용 이용으로 시골 버스 정류장은 하나둘씩 사라져 간다. 정류장이 사라진 마을엔 사람이 살아도 정이 솟아나지 않는다. 정류장이 사라진다는 건 마을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정류장이란 한 평의 공간은 등대처럼 남아 있어야 한다. 사라져 가는 마을을 마지막까지 밝혀주는 등불로 버티고 있어야 한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 흔적이나마 간직하고 있어야 할 고향의 얼굴이 정류장이다. 저 멀리 버스가 느리면서도 반갑게 오고 있다.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와준다.

정류장은 누군가의 시작이고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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