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이 온다
겨우내 땅속 깊이 잠들어 있던 수선화가 새초롬히 싹을 밀어 올리더니 어느새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다. 볼 때마다 경이롭고 사랑스럽다. 수선화의 만개한 모습이 더 반가운 이유가 있다. 곧 손님이 온다는 알림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수선화가 피어나면 농장에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손님맞이는 늘 설렘이고 행복이다. 생동하는 봄의 중요한 노동은 농장 주변의 환경을 정리하는 것이다. 다투듯 자라난 나무들의 새순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나무는 수형이 중요하다. 사람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외모와 인상을 변화시키듯 나무도 어떤 모양으로 다듬어 주느냐에 따라 멋지고 가치 있는 나무가 된다. 처음엔 엉뚱하게 손질을 하여 이상한 나무를 만들어 놓았다. 어설픈 손길이 나무의 성장을 가로막고 고통을 주어 볼품없는 괴목을 만든 것이다. 어느 정도 안목이 생긴 지금은 농장 이곳저곳의 나무들을 깔끔하고 모양 좋게 다듬을 수 있다. 그 재미가 쏠쏠하다. 한 그루의 나무에 어느 한 사람의 시선이 머물고 뜻밖의 사연이 담길 수 있도 있다. 나무를 정성껏 다듬고 손님을 기다린다.
작년에 기세를 떨친 환삼덩굴의 줄기를 정리한다. 모든 나무와 물건들을 가리지 않고 덮어 버리는 식물이라 환장 덩굴이라고도 한다. 겨울을 지나 이제야 그 잔해를 걷어낸다. 한꺼번에 뭉쳐있지만 가벼워서 치워내는 일이 힘들지는 않다. 살아서는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 거침없이 뻗어 나가더니 죽어서는 무력하고 볼품없다. 환삼덩굴을 걷어낸 주변은 환하고 말끔하다. 농장을 찾는 손님들의 마음도 가벼워지리라.
왕성하게 세력을 넓히는 찔레를 손질한다. 약간의 간격을 두어 정원수처럼 자라게 해 놓았다. 장미처럼 예쁘게 피어나고 향기 또한 뒤지지 않는 찔레의 가치를 농부가 되고서야 알았다. 서로서로 연결 지어 뭉텅이로 피어나는 찔레꽃은 장관이다. 찔레꽃을 보며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될 손님들을 기다린다.
작년 한 해 멧돼지의 침범을 감당할 수 없었다. 멧돼지는 갈수록 영악해지며 점점 더 가까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멧돼지는 밤에만 출몰한다. 피해가 만만치 않다. 정성스레 가꿔 놓은 정원과 나무와 길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파헤쳐진 땅과 언덕은 폭격을 맞은 모습과 흡사하다. 삽과 괭이로 구덩이를 메꾸고 고르기를 반복한다. 입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보이지 않는 존재로 인해 피해를 당한 것도 자존심 상한데 복구마저 온전히 원초적 노동으로 해내야 하는 상황이 억울하고 버겁다. 꽤 넓은 면적을 평탄하게 다듬었다. 땀방울을 닦아내며 의자에 걸 터 앉아 휴식을 취한다. 시원한 봄바람이 소리 없이 다가와 부드럽게 위로해 준다.
꼬꼬들이 생활하는 공간에도 여기저기 손 볼 곳이 많다. 겨우내 묵은 때를 제거하고 먼지를 털어낸다. 꼬꼬들도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을 좋아한다. 사람보다 더 깔끔 떠는 모습을 보여준다. 꼬꼬들의 입맛에 맞게 공간과 주변을 정리하고 수리하며 보완해 준다. 꼬꼬들이 행복하면 덩달아 사람도 행복해진다. 농장을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의 가장 큰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도 꼬꼬들이다.
귀한 손님맞이의 마지막 과정은 입구부터 체험장까지 빗자루 질을 하는 것이다. 가을을 지나 떨구어낸 낙엽과 가지들의 잔해가 거센 봄바람과 함께 여기저기 나뒹군다. 쓸고 또 쓴다. 길을 쓰는 일은 손님맞이의 가장 기본이다. 묵은 마음과 켜켜이 쌓인 고뇌의 잔해를 쓸어 내듯 쓱싹쓱싹 비질을 한다. 박자에 맞춰 율동을 하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 깨끗해진 뒤를 돌아보면 절로 입가에 미소가 머문다. 찾아오는 발걸음들의 가볍고 경쾌함을 생각한다.
정현종 님의 '방문객'이란 시의 한 구절인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이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는 시구를 농장 입구에 선명하게 새겨 놓았다. 농장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을 맞이하는 가족들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오늘은 최연소 꼬마 소녀가 유모차를 타고 왔다. 꼬꼬들을 보며 마냥 싱글벙글이다. 북적북적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새싹 같은 자신의 존재를 뽐낸다.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가 마주한 오늘의 시간은 작은 마음속에 담겨 감성과 행복의 씨앗으로 자라날 것이다.
지금까지 농장을 찾아 주신 분 중에 최고령은 95세의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시다. 연세를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모습이셨다. 마음의 상처를 안고 오셨지만 강건하고 유쾌하셨다. 벌써 3년 전이다. 곧 100세가 되시는 데 어떻게 지내시는지 안부를 여쭙고 싶다. 노구를 이끌고 찾아오신 발걸음이 생의 한 자락에 위로와 평안이 되셨으면 한다.
이곳을 찾는 모든 손님들이 머무는 공간 속 시간과 배경의 주인공이다. 함께하는 동안의 소중한 인연과 경험들이 생의 한 자락을 채워주는 밀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