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 동화, '미운 오리 새끼'를 다시 쓰다.
다시 쓰는 [미운 오리 새끼], '주근깨 금발 한스의 모험'
한스는 오늘도 학교를 마치고 어깨의 가방끈을 꽉 매고는 마을 길을 내달립니다.
답답한 마음이 들 때마다 힘껏 달음박질을 치면, 귓가에 쌩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풍경들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습니다.
금발 머리가 찰랑거릴 때면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는지 실감이 납니다.
돌을 잘 모아 만든 마을 길은 한스의 신발을 내디딜 때마다 경쾌한 발자국 소리를 남깁니다.
한스는 형과 쌍둥이 여동생 둘이 있는 사 남매 중 둘째입니다.
굴뚝 청소를 하는 아버지를 따라 형은 학교 대신 아침 일찍 일을 하러 나갑니다. 집에는 여동생 둘이 있지만 한스와는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동생들의 소꿉놀이에 끼어들기가 재미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갈색 머리와 오뚝한 코에 하얗고 뽀얀 피부를 가진 여동생들이 금발에 얼굴 가득히 주근깨가 덮여있는 한스에게 “오빤 우리랑 너무 달라.”라며 놀렸던 것이 영 서운했기 때문입니다.
한스의 형도 갈색 머리에 검은 눈동자가 초롱한 미남형에 키도 또래보다 커서, 아버지는 늘 형을 보고 “나를 닮아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십니다.
그래서일까 덩치 큰 형을 아버지가 하시는 굴뚝 청소 일을 이어받게 하기 위해, 학교 대신 아침마다 데리고 나가시는 표정이 늘 자랑스러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집에 온 한스는 큰 소리로 말합니다. “엄마 나 학교 다녀왔어요.”
앞치마에 장작을 양 손에 든 엄마가 부엌에서 나오며 한스에게 말합니다.
“한스야, 잘 다녀왔니? 너 오늘도 뛰어서 왔구나. 신발 상한다고 돌길에 뛰지 말라고 했잖니. 어서 밥 먹게 식탁을 치워주렴.”
엄마는 한스가 학교에서 오면 짧게라도 주방에서 나와 잘 다녀왔냐고 인사를 해 주십니다. 하지만 굴뚝청소부 남편의 적은 수입으로 4명의 아이들을 키우느라 늘 피곤한 표정을 하고 계십니다.
한스의 금발을 부러워하는 녀석은 학교 친구 브레디뿐입니다.
브레디는 한스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으며, “네 머리는 금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아.”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하지만 네 얼굴엔 깨를 쏟았나 봐. 미운 오리 새끼 같다, 흐흐흐”라며 놀립니다.
그래도 한스는 브레디가 좋습니다. 먼저 다가와서 장난이라도 쳐 주는 친구가 마냥 반갑습니다.
가끔 브레디와 말 타고 지나가는 기병대 행렬을 보러 마을에서 꽤 떨어진 큰길까지 놀러 가기도 하고, 시냇가에서 웃통을 벗고 수영을 하기도 합니다.
아버지와 형이 집에 돌아온 것은 저녁을 먹고도 한참 지나 꽤 어둑해진 밤이었습니다.
문 소리에 엄마가 달려 나가 반가운 표정으로 형을 맞습니다.
“이제 왔구나, 배고프지? 빨리 씻으렴, 화로에 뜨거운 물이 끓고 있으니 내가 들어다 주마. 당신도 고생 많았어요.”
형과 아버지가 시커메진 얼굴과 손을 씻기 위해 나무로 짠 목욕통에 들어가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소리를 한스는 문밖에서 흥미롭게 듣곤 합니다.
“아버지, 오늘은 제가 지난번보다 더 빨리 우체국장님 댁 굴뚝 청소를 마쳤어요.”
흐뭇한 목소리로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그래, 네 팔뚝이 나를 닮아 이젠 제법 한몫을 하는구나, 하하하”
형은 의기양양해서 이야기합니다.
“이제 아버지는 벽난로에서 재만 통에 담으시고, 지붕은 제가 올라갈게요. 저한테 맡겨 주세요.”
“그럴까, 역시 넌 나를 닮아 최고의 굴뚝 청소부가 될 거다, 하하하”
한스는 아버지와 형의 저런 대화가 늘 부럽습니다.
왜소한 금발 소년 한스는, ‘나도 형처럼 키 크고 덩치가 컸다면 아버지한테 칭찬도 받고 매일 굴뚝 청소를 같이 할 텐데.’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비 오는 가을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성 안토니우스 데이라 학교를 안 간 한스와, 종일 비가 오는 통에 일을 쉬는 형과 아버지까지 온 가족이 좁은 집에 모여 있었습니다.
'쿵쿵.. 쿵쿵..'
문을 드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쌍둥이 여동생이 후다닥 나가서 문을 빼꼼히 열었습니다.
“너희 이 집에 사니? 혹시 부모님 계시면 잠깐 나오시라고 할래?”
조금 열려있는 문 밖으로 말끔한 옷이 온통 비에 젖은 신사가 마차에 내려서 있는 게 보였습니다.
“어떤 일이신지?” 아버지는 의자에 앉아 졸다가 깬 시큰둥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걸어 나가며 물었습니다.
“우린 스미스 해군 제독님 댁에서 온 사람들이오. 몇 가지 확인할 것이 있어 마을의 집들을 방문하고 있소.”
아버지는 문 밖에 서 있는 신사의 옷차림과 딱딱한 말투에 조금 긴장하며 되물었습니다.
“네? 그…. 어떤 일이신지?”
문을 나서며 아버지가 물었고, 이후 두 사람은 한참이나 비 오는 문 밖에 서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하지만 때 맞춰 불어대는 비바람이 거세지고 말소리도 작아져서 어떤 말들을 했는지 거실에서 귀를 쫑긋 세웠지만 한스에게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신사가 타고 온 마차가 돌아가는 소리가 멀어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비를 흠뻑 맞은 아버지가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잔뜩 어두워진 표정으로 엄마를 방으로 불러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한참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한스는 학교를 가지 않았습니다.
아침부터 왠지 일을 나가지 않은 아버지와 엄마가 한스에게 깨끗하게 다림질을 한 옷을 입히고 말없이 아침 식사를 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스야 잘 들어. 넌 이제 이 집에서 살 수가 없단다.” 엄마가 울먹이며 이야기했습니다.
“엄마, 왜요? 왜 내가 이 집에 못살아요? 네?”
한스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옆에 있던 아버지가 엄마 대신 대답을 했습니다.
“한스가 가서 도와줘야 할 친구가 있어서 제독님 댁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리 알아라.”
엄마는 옆에서 눈물을 떨구며 아무 말도 못 하고, 한스는 그저 불안하고 슬픈 마음이 들 뿐이었습니다. 한스는 그 뒤에 대화를 어떻게 이어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너무 놀란 나머지 현기증이 날 만큼 어지러운 마음을 진정하려고 침을 삼키며 간신히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오후 한스는 어제 왔던 마차를 타고 온 신사와 함께 조그마한 보따리를 들고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형과 쌍둥이 여동생들은 뚱한 표정으로 떠나는 한스를 바라보았습니다.
훌쩍이는 엄마와, 덤덤한 표정의 아버지가 문 앞에서 떠나는 마차를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손만 흔들 뿐이었습니다.
한스가 가는 마차에서 듣게 된 이야기로는, 제독님의 외동아들이 귀족들이 다니는 기숙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뛰어놀다가 높은 성곽길에서 밑으로 떨어져서 최소 1년 간은 걷거나 학교를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제독님은 마을의 아이들 중에서 외동아들의 말동무가 되어줄 친구를 집에서 지내게 할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집사를 보내 마을의 이 집 저 집을 다니게 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아이를 제독님 집에서 지내게 해 주면 그 사례를 두둑이 해 준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고, 마을의 다른 집들에서는 모두 거절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가난한 한스의 집을 방문해서야 한스의 부모님들에게 승낙을 받게 된 것입니다.
착한 한스는 가족을 떠나 낯선 제독님의 집을 가게 된 것은 너무 슬펐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부모님에게 기뻐할 일이 생기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마차가 마을을 벗어나 언덕 위 큰길로 향하자 두 눈 가득히 눈물이 고였습니다.
우연히 마차 밖에 학교로 가는 친구 브레디가 보였습니다.
큰소리로 한스가 외쳤습니다. “브레디 안녕~, 나 다른 곳으로 떠나.”
브레디가 커다란 마차에서 손을 흔드는 한스를 보고 뛰어서 따라가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한스야, 어디가? 학교 안 가? 왜? 한스야~”
하지만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는 채 한스가 대답도 하기 전에 멀어지며 마을을 벗어났습니다.
한스는 브레디와 더 이야기를 못 나눈 것이 서운했지만, 그래도 친구에게 작별 인사라도 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 제독님의 집에서 한스는 의자에 앉아 담요를 덮고 있는 또래의 남자아이를 처음 만났습니다.
이름이 요한이라는 그 아이는 멋진 옷과 잘 빗겨넘긴 머리에 싸늘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내 부하로 온 아이구나?”
“엉? 난 친구가 되기 위해 온 한스야.” 잔뜩 풀이 죽은 한스가 대답했습니다.
“뭐야 친구? 하하하. 넌 내 졸병이야 그 걸 모르냐? 우리 아빠가 나한테 졸병 한 명 구해 준다고 해서 네가 온 거야.”
의자에 앉아 올려다보며 거만하게 이야기하는 요한의 표정은,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한스를 잔뜩 움츠리게 했습니다.
그날 요한과의 첫 만남을 시작으로 제독님 집에서의 생활은 한스에게 늘 주눅 들고 슬픈 시간들이었습니다. 어쩌다 제복 차림의 제독님을 집에서 만나기라고 하면 한스는 더 겁이 났습니다.
긴 승마 군화를 신고, 칼을 찬 제독님은 그 차림새 만으로도 무섭게 보였습니다.
거기에 큰 목소리로 아들 요한에게 잘해줘야 한다며, 만약 사이좋게 지내지 않는다면 집으로 보내버리고 아버지 어머님한테는 안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소리를 했습니다.
원래 목소리가 큰 건지, 아니면 한스에게 겁을 주려고 일부러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독님도 다쳐서 의자에 앉아만 지내는 아들 요한에게는 늘 다정한 목소리로 대했습니다.
‘아, 부럽다,. 나도 저렇게 다정한 아버지가 있었다면..’
한스는 집에 계시는 아버지를 떠올렸지만, 한 번도 저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대해주었던 기억은 나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가끔 떠올라 눈물이 나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늘 형에게만 칭찬을 해 줬던 기억만 났습니다.
요한은 그 뒤로도 한스를 자기 부하라고 부르며, 의자에 앉아 이것저것을 시켰습니다.
이층 발코니가 달린 놀이방에서 침실에 있는 목각 말 인형을 가져오라고 했다가 창 밖으로 던지고 어서 주워오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습니다.
한스가 계단을 내려가다 넘어져 조금 늦게 가지고 오면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는 저녁에 돌아온 제독님에게 한스가 자기 말을 잘 안 듣는다며 투정을 했습니다.
아들의 말에 제독님은 더 큰 목소리로 한스를 불러 세우고 지난번 했던 것처럼 집으로 보내버리고 부모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며 한참이나 야단을 쳤습니다.
그런 날들이 몇 개월 지났습니다.
옅은 안개가 낮게 드리 누운 어느 날 아침, 마침 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에 사냥개가 컹컹 짖으며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도 저 사냥개처럼 신나게 밖에서 달려보기라도 했으면...’하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이면 늘 뜀박질을 마음껏 했던 한스가 이 집에 온 뒤로는 집 밖에 나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치료는 어느덧 의자에서 목발을 짚고 이리저리 걸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지만, 아직 외출을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한스도 늘 요한과 함께 집에만 있어야 했습니다.
다시 뜀박질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한번 들자 한스는 점점 더 그 생각을 떨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잠이 깬 한스는 다락방 침대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해뜨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밖으로 나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몰래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가 오랜만에 상쾌한 새벽의 바깥공기를 코로 가득 들이마셨습니다.
‘어서 빨리 저 정원을 가로질러 마음 것 뛰어봤으면.’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한스는 자기도 모르게 문 밖 정원을 가로질러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정원사들이 손질을 하다 늘어놓은 삽이며 손수레가 안개를 헤치고 나타났지만 기본 좋게 훌쩍훌쩍 뛰어넘은 한스는 울타리로 손질을 잘 한 정원수 사이로 몸을 피해 집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스는 마차가 다니는 큰길 옆으로 수풀이 발목까지 자란 샛길을 한참이나 더 달렸습니다.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새벽녘 숲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너무 상쾌하게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몇 달만에 그렇게 좋아하던 달리기를 하게 되어 더없이 기뻤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제독님과 요한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 이 길로 도망치자. 저 집엔 다시 안 갈 거야.’
용기를 내 한스는 혹시라도 마차로 집사가 자기를 잡으러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번엔 왼편 숲 속으로 방향을 바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제독님의 집이 조금도 보이지 않게 되고, 사방엔 해가 막 뜨기 시작해서 조금씩 밝아지는 숲만 보였습니다. 그래도 한스는 계속 달렸습니다. 억센 풀과 잡목에 종아리가 긁히고 상처가 나기도 했지만, 한스의 기분은 하늘을 날 것만 같았습니다. 입가에는 계속 웃음이 났습니다. 자유롭게 하늘을 휘리릭 날아다니는 종달새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한스가 지쳐서 슬슬 걷기 시작한 것은 오후가 되어서도 한참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뛰거나 빠른 걸음으로 숲을 지나고 강과 들판을 가로질렀지만 사람들을 만나거나 집을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잡히기라도 하면 다시 제독님 집으로 돌아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첫날 서서히 해가 지고, 날도 추워지는 데다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굶주림이 고개를 들자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두워진 밤에 들판을 가로지르다 만난 커다란 나무 그루터기에 몸을 웅크리고 기대앉았습니다. 나무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지친 한스는 그대로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잠이 든 한스는 꿈에서 가족들과 함께 거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빠와 형, 쌍둥이 여동생들이 모두 금발에 주근깨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갓 구운 빵을 나무 접시에 담아 부엌에서 나오는 엄마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한스에게 먼저 먹으라며 손짓을 했고, 형과 동생들은 웃기만 했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은 한스는 뜨거운 빵을 한 움큼 집어서 입에 가져갔습니다.
달콤한 빵 내음이 느껴지는 듯했고, 모두 웃으며 바라보는 가족들의 눈길은 더 달콤하게 느껴졌습니다.
한스가 꿈에서 깬 것은 해가 막 나무 뒤로 비춰 보이는 아침이었습니다.
새소리에 깬 것인지, 추위에 깬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코 끝에 살랑거리는 바람이 느껴지자 제독님 집 밖에 나와 있다는 생각에 이르며 안도하게 되었습니다.
이튿날도 한스는 걷고 또 걸었습니다.
이틀을 꼬박 걸어서 멀리 가고 있으니, 제독님의 집에서도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온 것 같았습니다. 물론 한스의 집으로 가는 길도 그만큼 멀어진 것이겠지요.
하지만 한스는 두 곳 모두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배고프고 지친 데다가 숲을 가로지를 때 다리는 온통 긁힌 상처투성이지만, 그래도 혼자 길을 나서서 멀리멀리 도망쳐 온 지금이 더없이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저녁이 되자, 한스는 어제보다 더 능숙하게 몸을 뉘일 나무를 찾았습니다.
‘이제 어디로 갈까? 어디서 살지? 배고프다..’
이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에서 막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데, 어디선가 다정한 여자분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주위는 이미 해가 떠서 환해져 있었습니다.
“아이야, 너 여기서 밤을 꼬박 세운 거니?”
강아지와 함께 한스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고운 얼굴에 챙이 넓은 레이스 모자를 쓰고 흰 장갑에 부채를 든 모습이 마치 흰 옷을 입은 천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스스 일어나며 한스는. “그게… 저…”하고 말을 흐렸습니다.
“아이코, 이 상처들 좀 봐. 너 어디서 도망이라도 쳤구나?”
아주머니는 놀라며 손에 든 손수건으로 다리 상처에 엉겨 붙은 풀이랑 흙을 털어내며 말했습니다.
상처가 조금 따끔거리기는 했지만, 아주머니의 걱정 어린 손길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대답을 못하는 한스의 손을 잡고는 아주머니가 걱정스럽게 말했습니다.
“애가 힘이 없네.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가서 상처를 손보고 밥 먼저 먹자꾸나.”라고 말했습니다.
처음 보자마자 어디선가 도망쳐 나온 걸 알아채고, 배고픔과 상처를 걱정해주는 아주머니의 손이 한스는 한없이 따뜻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아주머니의 집은 키 높이의 돌담에 둘러 쌓여 있었고, 덩굴모양의 쇠창살로 장식된 커다란 정문을 지나서야 보였습니다. 나지막한 언덕을 넘을 때까지도 잘 가꿔진 정원이 계속 이어지고서야 현관에 다다르는 커다란 저택이었습니다. 하녀가 현관문을 열고 아주머니의 외투를 받아주었고, 다른 하인도 강아지를 데리러 뛰어나왔습니다.
“저, 이 아이가 먹을 식사를 빨리 준비해 주시겠어요? 그리고 약통이 어디 있었더라?”
큰 저택에서 아주머니는 더 기품이 있어 보였습니다. 아주머니는 서둘러 다리의 상처를 소독해 주셨습니다.
배고픔에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고, 다시 아주머니를 만난 거실에서 한스의 눈을 끈 것은 벽 한편을 거의 채우다시피 한 초상화들이었습니다. 벽난로를 제외하고 한쪽 면을 모두 채워 빽빽한 초상화는 제각각 크기가 달랐지만, 모두 화려한 액자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바라보자 공통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액자 속 초상화의 주인공인 남자들의 머리가 모두 한스와 같은 금발들이었고, 한결같이 콧등에 주근깨가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집이나 학교, 혹은 한스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 전체에도 금발과 주근깨를 동시에 가진 사람은 한스뿐이었습니다. 쌍둥이 동생이나 형과 다른 머리 색은 늘 한스가 다른 가족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였는데, 아주머니 집 거실 벽에는 온통 금발에 주근깨가 있는 얼굴뿐이라니!
“그러고 보니 너도 우리 가문의 남자들처럼 금발에 주근깨를 가졌구나!”
아주머니는 넋 놓고 초상화들을 보고 있는 한스를 보고 작게 외쳤습니다.
“네 저도 저와 같은 머리색과 주근깨가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림으로나마 처음 만나봐요.”
환하게 웃으며 한스가 대답했습니다.
만나고 가장 활기찬 한스의 대답을 들은 아주머니도 입가에 환한 웃음을 띠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습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어릴 적 성 안토니우스 축제에서 잃어버린 아줌마 아이도 갓난아기였을 때 너처럼 금발에 작은 주근깨가 콧잔등에 잔뜩 있었는데..”
아주머니의 얼굴에 작은 수심이 보였습니다.
한스는 혹시 자기가 말실수라도 해서 아줌마가 슬픈 표정을 하시는 걸까 하고 걱정스러워졌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도 어디선가 잘 자라고 있을 거야, 아마 너처럼 튼튼하게 커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애써 웃음을 지으시며 아줌마는 다시 한스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습니다.
그 집에 며칠 머무는 동안 아주머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보셨습니다.
한스는 제독님의 집에서 있었던 일들과 새벽에 도망쳐 나와서 아주머니를 만나게 되기까지를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자신이 돌아가게 되면 제독님이 부모님께 해를 입히게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 이 집에서 이대로 계속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습니다.
아주머니는 한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너를 제독님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도 좋아.”라고 하셨습니다. 또, 한스만 좋다면 원할 때까지 이 집에서 아줌마랑 같이 지내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한스를 근처 대성당에서 운영하는 학교에도 보내 주셨습니다.
물론 한스는 학교를 마치면, 늘 자기를 반겨주는 아주머니가 있는 저택으로 바람을 가르며 힘껏 달려오곤 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언제나 한스를 기다리다 따뜻하게 맞아 주셨습니다.
한스는 왠지 혼자 떨어져 호수를 이리저리 외롭게 떠 다니던 백조가, 자신과 꼭 닮은 한 무리의 백조가 사는 곳을 찾아와 행복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왠지 이 집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 것 같다는 그런 느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