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
호모 에렉투스.
인류는 직립보행이 가능한 존재로, 양손이 자유로워짐에 따라 도구를 사용하고 문명의 눈부신 발전을 이뤄냈다. 하지만 현재 나는 직립이 불가능한 목발 신세의 신인류 '호모 발목골절인'으로 네 개의 팔다리 중 세 개는 무용지물인 상태다.
덕분에 집안 꼴이 아주 개판이다. 펜 하나를 떨어트려도 주울 수가 없고, 찬장에서 컵을 꺼내기도 힘들다. 이불도 못 개고,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로 옮길 수도 없다. 빨래는 고사하고 벗은 옷을 제대로 빨래통에 골인만 해도 선방이다.
주부들은 알겠지만 집이 어질러져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괜히 짜증이 올라오고 정신이 산만하다. 눈에 빤히 보이는데 팔다리를 자유롭게 쓰지 못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아들에게 이것저것 많이 부탁하게 되었다.
이것 좀 갖다 줘, 버려줘, 주워줘, 넣어줘, 꺼내줘, 닦아줘, 치워줘, 해줘해줘해줘해줘.
처음에는 해달라는 대로 착착 해주던 아들이 점점 지쳐 오징어가 되어가더니 결국 폭발했다.
"엄마! 나도 사람이야!" 소리를 빽 지르고는 쿵쿵대며 방으로 들어갔다.
에고고, 작작 좀 부려먹을 걸, 후회가 밀려왔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어째야 하나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아들이 문을 벌컥 열고 나오며 무언가 쿨하게 건넨다.
"앞으로 이거 써."
고맙다, 아들아. 엄마 진화 시켜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