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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May 12. 2022

연애 회고

어떤 마음이든 글로 쓰는 건 어렵다. 마음이 글이 되려면 단어에 의지해야 하는데, 적당한 단어를 찾는 것은 까다롭기 때문이다. 마침내 적당한 단어를 찾더라도 그건 그거 대로 문제다. 아픈 마음을 쓰려면 아픈 단어를 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에 대해 쓰는 것은 내게 그런 딜레마를 준다.


먼저 좋아한 사람은 나였다. 나 혼자 오랫동안 너를 좋아했다. 혼자 좋아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다. 유쾌하지 않지만 그만둘 수 없어서 더 유쾌하지 않아지는 종류의 일이다. 너를 생각하면, 작은 삽을 든 손바닥 만한 사람들이 가슴팍 위에 올라 사부작사부작 뭔가를 하는 느낌이었다. 간지럽고 아프고.


그럴 때 난 알약을 삼키듯 간지럽고 아픈 마음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가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종종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의 네가 다가오면 난 웃었다. 너도 웃었고, 그럼 아무 일도 없는 거로 칠 수 있었다.


네가 어떤 말을 하면 난 주로 그래, 괜찮아, 좋아, 라고 답했다. 그렇게 말할 때마다, 아까 알약처럼 삼킨 마음이 사실은 씨앗이었고 그 씨앗에서 가시덤불이 자라는 것 같았다. 나의 '괜찮아'는 가시덤불에 양분이 되고 가시덤불은 거의 목구멍 밖으로 삐져나올 듯 자랐다. 나는 가시를 도로 삼킨다. 삼킨 후 웃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나를 자세히 봤다면 웃음의 끝이 짧다는 걸 알았겠지만 넌 나를 봐주지 않았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가시덤불의 계절은 보통 1월이나 2월이어서 차고 축축다. 그곳에도 가끔 꽃은 다. 도박에 중독되는 이유는 보상이 자주 규칙적으로 주어져서가 아니라, 간헐적으로 랜덤하게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도 도박꾼처럼 간헐적으로 피는 꽃을 기다리며 겨울 속에 살았다. 네가 줄 지도 모르는 보상을 기다리며.


오래 품은 것들은 발효되던지 부화하던지, 아무튼 티가 나게 돼있다. 오래 품은 마음도 그러해서 너는 어느 순간 나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너는 너를 좋아해주는 사람에게 막연히 갖게 되는 호감으로, 나는 오래 꾼 꿈을 실현하는 사람의 설렘으로, 또 어떤 계절의 탓으로, 약간의 조바심으로 우리는 만나기 시작했다.


너와 처음 안았던 날을 기억한다. 비가 내리는 4월이었다.

  팔이 차갑네.

너는 손바닥으로 내 팔을 지긋이 감쌌다가 쌀짝 끌어당겨 나를 안았다. 나는 네 가슴팍 근처에 있던 공기의 냄새를 최대한 많이 맡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나는 포옹만으로 뭔가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단지 포옹만으로.


너와 처음 키스한 날을 기억한다. 너는 입술을 떼고 코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말했다.

  난 키스하고 입술을 뗄 때, 여린 살끼리 붙었다가 살짝 끈적하게 떨어지는 게 좋더라.

너는 그 말을 하며 내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나는 그 눈동자의 움직임이 좋았다. 너의 눈동자와 목소리와 촉감이 오래도록 남아서 나는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치며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런 날들은 1년을 갔을까, 2년을 갔을까. 포옹으로도 키스로도 뭔가를 채울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은 건 언제일까. 마음이 굳는 것은 풍화작용처럼 서서히 일어나서 어느 한 때의 바람이나 빗방울이 그랬다고 할 수 없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풍화작용은 시작되었고, 시간이 흘러 문득 모른 척할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됐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그때 나는 이미 너를 안고 있는데도 고독했다. 범인은 습관화였을까. 무엇이든 새롭지 않으면 마음의 어딘가가 돌처럼 굳는 것일까. 그게 설사 너라고 해도.


우리는 천을 따라 걸었다. 물비린내가 강하게 풍겼다. 여름엔 모든 것이 강렬해진다. 우레탄 길에서 뿜어나오는 냄새와 물푸레나무 잎의 색, 아카시아 꽃 향기, 물그림자마저 강렬하다. 이 여름에서 오직 우리만이 어딘가가 식어갔다. 나는 네게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거 없어. 그냥 네가 다시 나를 사랑해주길 기다리는 거지.

나는 너에게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너의 마음에 답할 수 없어서 나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런 상상을 한다. 관찰 예능에서 촬영이 끝나고 출연진을 인터뷰하는 것처럼 나도 이 순간이 지나고 인터뷰를 한다면, 지금에 대해 뭐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희미해지는 과정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 가면 진짜로, 진짜로 헤어지는 거야.

네가 그 말을 할 때야 겨우 동하던 마음. 그때야 겨우 아프던 마음에 대해. 나는 해명할 수 있을까. 그렇게도 굳어버린 마음에 대해.


지금으로서는 믿기지 않지만 그런 날도 있었다. 지금처럼 더운 날 밤, 슬리퍼를 끌고 산책을 나갔다. 바람이고 온도고 습도고 너무 완벽해서 나는 어느 날엔가 이 순간이 아주 그리워질 것을 예감했다. 그 예감이 슬퍼서 울었다. 너는 나를 붙잡고 한참을 왜 우는지 물어봐야 했고, 원래도 말이 없던 나는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너는 내 얘기를 듣고 탁 소리 나게 이마를 쳤다.

  계속 함께 할 건데 그런 걱정을 왜 해.

나는 이마를 치는 그 탁 소리가 너무 경쾌해서, 너의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아무것도 아닌 걸로 걱정했다는 걸 깨달을 때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너의 말을 믿은 건 아니다. 계속 함께 할 거라는 말. 너의 진심은 믿었지만, 나는 우리가 언젠가는 함께 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헤어진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이미 한참 전에 헤어진 사람처럼 차분했다. 나는 이제 굳은 마음을 떼어내고 가볍게 날아오르게 될까. 아니면 굳은 마음 위엔 무엇이든 계속 굳기만 해 결국 무거워진 몸이 심연으로 가라앉을까. 뿌연 앞날 앞에 나는 멍청하게 앉아 있다. 시간이 흐르기도 하고 내가 시간을 흘려 보내기도 하면서, 벌써 80세 정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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