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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친일파2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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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리 Sep 26. 2024

은밀한 제안

제9 장 신념(2)

 신홍의 제안에 난 얼마 전에 나를 찾아온 한 남자가 떠올랐다. 그는 일본 영사관 소속의 군인이었다. 그 무렵 일본은 전 세계에 재외 무관을 파견하여 군사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25년 전 러시아라는 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자만에 빠져 있던 그들에게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은 충격을 주었다. 오랜 기간 지속된 치열한 전쟁으로 유럽 각국의 무기와 전쟁 기술은 엄청난 규모로 발전되었고 주요 전장이 아닌 유럽 밖에서의 전투에만 참전한 일본의 군사 기술과 큰 격차로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유럽 본토에서는 지독한 참호전과 거듭되는 지상전으로 새로운 무기가 끊임없이 개발되어 현재에 만족하고 큰 발전 없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던 일본 육군의 무기를 성능이 떨어지는 재래식 무기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제국의 육군은 최신 무기 개발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날 찾아온 남자는 영국 주재 재외 무관인 젊은 장교였고 그는 나의 연구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일본인이 그것도 군인이 접근하자 나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물론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최대한 조심하며 그를 대했다. 학교 캠퍼스 내에서 우연히 만나서 길에서 간단히 얘기하는 정도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몇 번 더 가졌고 나도 모르게 그에 대한 경계심이 아주 조금 풀어졌다. 그때 그가 내 연구를 후원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면서 한 사람을 소개해 줬다.

 일본 육군성 소속의 나가타 대좌는 다음 세대 일본 육군을 책임질 엘리트 장교였다. 그는 육군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인재였다. 일본 육군대학교는 육군 사관학교 출신 중에서 시험을 통해 소수만 선발해서 들어가는 곳이었다. 특히 수석과 우등 졸업생은 천황으로부터 직접 군도를 하사 받을 정도로 인정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육군성, 참모 본부 같은 주요 기관의 요직에 임명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육군 내 영향력이 커지며 결국엔 육군의 최고 요직까지 오르기도 했다. 나가타 대좌 역시 육군성 내 주요 보직인 군사 과장을 역임 중이었다.

 그 무렵 일본 군부는 폭주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육군 내부에서는 군이 국가의 모든 걸 통제해야 한다는 사상이 팽배했다. 나가타 역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자로서 강한 육군을 추구하며 최신식 무기의 개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재외 무관들을 통해서 무기 개발에 도움이 될 만한 해외 인력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는 자체적인 기술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의 선조들이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고 메이지 유신을 이루었듯이 해외의 기술을 도입해 군대의 혁신을 다시 한번 이루어 내고 싶어 하였다.   

 나는 그동안 배운 물리학과 화학의 지식으로 폭탄 개발과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폭발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화약의 배합과 새로운 폭발 물질의 개발이라던지, 안정성과 편의성을 고려한 기폭 장치, 폭탄 구조 등을 연구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양심에 약산과의 약속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는지 내 관심사는 오로지 폭탄으로 향했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오히려 일본군 눈에 띄게 되었다.

 나가타 대좌는 친절해 보이면서도 날카롭고 냉정한 느낌의 사람이었다.

 “난 박사님이 조신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습니다. 박사님이 중국인이건 조선인이건 난 박사님의 연구에 관심이 있을 뿐이니까요. 연구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일본의 한 민간 기업이 후원을 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일단 연구를 마무리하는 것에만 집중합시다.”

 아주 정중한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다.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달콤한 유혹도 그리고 현실을 도피하라는 협박도.

 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대공황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연구도 다시 진행이 되었고 급여도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이 일에 대해서 신홍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단지 난 나의 길을 걷겠다고 말해 주었다.

 “신념을 저버리면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네. 부디 자네의 선택에 후회가 없기를 바라네. 자네가 어떤 길을 걷던 난 언제나 자네의 친구로 남을 거야.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미국으로 날 찾아오게.”

 신홍은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날 친구로 생각해 주었다.

 ‘과연 신념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중요하다고 말을 하는 것인가?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신념이라면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 또한 내 신념일 것이다. 새로운 신념을 가지고 편안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의 결정에 후회를 하지 않을 것이다.’

 사장님의 당부를 신홍의 걱정을 뒤로한 채 난 새로운 신념으로 살겠다고 나 자신에게 다짐했다.  

 신홍은 미국으로 떠났고 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도쿄로 떠났다. 나가타 대좌에게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학위를 마치면 일본과의 인연을 끊겠다고 결심했으나 막상 그때가 오자 그러지 못했다.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당연하다는 듯 나가타의 지시대로 일본 민간 기업의 연구소에서 폭탄 개발 관련 연구를 계속 진행하였다. 처음 그들의 제안을 받았을 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일원이 되어 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온 것 같았다. 이제 와서 그동안의 모든 것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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