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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친일파2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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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리 Sep 25. 2024

신홍의 과거

제9 장 신념(1)

 너무도 쉽게 모든 것을 버렸다. 나의 지난 20년 전부를 너무 쉽게 버렸다. 열 살이 되던 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번영만을 생각하며 그 모든 것을 극복했었는데 정말 한순간에 변해 버렸다. 학교를 세우겠다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몇 배의 병력에 맞서 전투를 치르고 적의 심장부에 용감히 돌진하던 그 용기와 기상을 모두 무너트리는 결정을 기어이 내리고 말았다. 난 그렇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나의 신념은 무너져 내렸다.



 대공황이 시작되고 혼란스럽던 어느 날 신홍이 날 찾아왔다. 그날 난 처음으로 신홍의 진지한 모습을 보았다. 

 “자네 나와 함께 미국에 가보지 않겠나?”

 결연한 표정의 신홍이 말했다. 

 “미국이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뜬금없는 신홍의 말에 나는 놀라 대답했다.

 “지금은 위기의 상황이지만 이 위기는 곧 큰 기회가 될 거야. 난 그 기회를 잡으러 가는 거다.”

 잠시 숨을 돌리며 신홍은 말을 이어 나갔다.

 “나도 그동안 너에게 숨긴 것이 있어. 나의 부친은 노름꾼이다.”

 그렇게 신홍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신홍의 아버지는 안동의 유력한 집안의 종손이었다. 일찍이 의병 활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몇 번 체포되어 그의 뜻이 꺾이자 자포자기한 듯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안동 일대의 모든 도박판에 그가 빠진 적이 없을 정도로 그는 도박에 미쳐 있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정도로 방탕한 삶을 살고 있던 그를 사람들은 신념도 뜻도 잊어버린 파락호라고 불렀다. 그는 도박을 하다가 돈을 잃을 때면 수하들을 동원해 판돈을 다 쓸어 담고 사라질 정도로 막무가내였다.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명가의 종손이 집안의 막대한 재산을 도박에 탕진하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혀를 차며 신홍의 아버지를 경멸하였다. 여기까지가 세간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신홍은 그런 아버지를 단 한 번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슬퍼 보였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홍은 우연히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바로 유럽행을 결심했다. 종갓집 종손이란 아버지의 신분은 일제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게다가 신홍의 증조부 대에서부터 일제에 대항해 의병 활동을 활발히 하는 집안이었고 신홍의 아버지 역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력이 있었기에 일제의 경찰들은 신홍의 아버지를 특별히 더 감시하였다. 삼엄한 감시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동료들까지 그 때문에 위험해지는 일이 생기자 그는 도박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도박에 소중한 문중의 재산을 탕진하는 망나니가 되었어야만 했다. 자신의 명예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세상을 속였다. 그래야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나 독립 자금을 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박에 이기던 지던 돈을 챙겨 오던 그의 재산이 줄었지만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냥 그는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한 파락호였기 때문이다.

 우연히 아버지가 독립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도박꾼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신홍은 바로 기생집에 들락날락거리기 시작했다. 때를 기다리며 학문에 정진하고 있던 그가 한순간에 술과 여자에 미친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었다. 신홍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좀 더 큰 계획을 세웠다. 해외에 자금줄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와 경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외국에 수익을 창출하는 사업체를 세우면 끊이지 않는 독립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시아를 벗어나면 일제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것이라 확신했다. 아버지에게 모든 계획을 비밀리에 말하고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헝가리로 떠났다. 술과 여자에 미친 도박꾼 핏줄의 망나니 도련님이 유희를 위하여 유럽으로 떠나는 모습에 일제는 감시를 소홀히 하였다. 꽤 많은 자금을 가지고 떠날 수 있었고 지난 육 년 동안 일제의 의심 없이 아버지로부터 꾸준히 자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신중했다. 지난 육 년간 그는 유럽 곳곳을 다니며 각 나라의 사정을 보고 느끼며 많은 사람들을 사귀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시작할지 고민하였다. 그가 만난 사람들을 통해 정보를 얻었고 그들은 신홍에게 중요한 조력자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금을 차곡차곡 모았다. 그 오랜 세월 천천히 준비하였다. 난 그것도 모른 채 그를 평가했다. 아무 생각 없이 항상 놀러 다니기 바쁜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같이 있으면 유쾌하지만 조금 한심하기도 했던 친구라고. 그것이 그가 원했던 것이었다. 자신을 철저히 숨기는 것. 

 그런 그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이제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자네 내가 왜 자네를 존이라고 불렀는지 알고 있나? 그리고 나 자신은 왜 쌤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지 아나? 힘이 없었기 때문이네. 힘이 없어서 우리를 숨겨야 했네. 우리의 원래 이름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일본 영사관에서 우리를 부른다면 우리는 어쩔 도리 없이 그들의 명령에 따라야 하겠지. 그리고 여기 영국 정부에서는 우리를 일본 식민지의 이등신민 취급할 거야. 영국은 자신의 식민지를 인정받기 위하여 우리를 일본의 부속품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뿐 우리를 도와주거나 동정하지 않아. 힘을 가져야 하네. 그래서 난 지금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미국이란 나라로 가 볼 생각이야. 경제 공황으로 가장 약해져 있는 지금. 지금이 가장 큰 기회네. 적어도 우리의 이름을 되찾을 정도의 힘을 기를 수 있는 기회일세. 나와 함께 미국으로 가자. 마자르를 찾던 너의 독립운동을 거기서 새롭게 시작해 보자.”

 그런 말을 하는 신홍의 눈에 장난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신홍을 만나고 처음 보는 진지한 모습이었다. 

 좋은 기회였다. 사장님이 나에게 오 년 전 주었던 그 기회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신홍은 충분한 자본을 확보하고 있었고 철저히 준비하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미국에서 힘을 기르고 독립운동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꿈만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여기서의 모든 것을 포기할 용기가 없었다. 그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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