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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친일파2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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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리 Sep 27. 2024

이상한 나라

제9 장 신념(3)

 일본에서는 편안한 삶을 살았다. 급여도 충분하였고 생활도 여유로웠다.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면서 지냈고 주위의 인정도 받았다. 물론 한국인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신념을 바꾼 대가로 난 아주 편안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 시기 일본은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군부는 폭주했고 상식 밖의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내가 처음 이상함을 느낀 건 관동군이었다. 내가 일본에 간 지 일 년 반 정도가 지났을 때 관동군이 본국에 승인 없이 독단적으로 만주를 침공했다. 관동군은 러일 전쟁 이후 조차 받은 요동반도 일대를 지키기 위한 군대로 일본 제국 육군 소속이었다. 본국의 명령 없이 단독으로 군사 행동을 하는 것은 심각한 월권행위였다. 이런 행위는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중형을 선고받아야 마땅했지만 본국에서는 오히려 그들의 행동을 사후 승인해 줬다.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그 시절 아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였고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히는 강대국이었다. 그런 곳에서 원시적 고대 국가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관동군의 그 방법은 너무 억지스러웠다. 만주 철도를 직접 폭파시키고 중국 동북군의 군복을 입힌 시체를 부근에 방치해 놓았다. 그것이 중국군의 소행이라는 증거라며 만주 침공을 시작한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자작극이 분명해 보였지만 그냥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몇 백만의 인명이 희생되는 전쟁을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시작하였다. 사실 그들은 삼 년 전 만주의 실세이자 봉천 군벌의 수장인 장작림을 같은 방식의 자작극으로 살해하였다. 그리고 그때도 본국에서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이 모든 사건들은 몇 명의 지휘관과 참모에 의해서 벌어졌다. 외국의 주요 인물을 살해할 정도로 큰일이 일어나도 본국에서 크게 제지를 하지 않자 점점 더 큰 망상의 속으로 빠졌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점점 대담해졌고 만주의 주요 지역을 점령한 뒤 만주국이라는 이상한 나라를 세웠다. 그럼에도 본국의 내각은 자신들을 무시하고 멋대로 벌인 모든 행위를 인정해 주며 지원군까지 파견하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은 국제 연맹까지 탈퇴를 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국가의 운영에 아무런 권한도 없는 몇 명의 관동군 참모에 의해 이루어졌다. 국가의 체제도 군대의 지휘 체계도 전부 무너져 내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젊은 장교들과 사관후보생들이 관저로 쳐들어가 수상을 살해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 후 사 년 뒤에는 육군의 일부 장교들이 자신들의 부대에 무장한 사병들을 이끌고 정부의 주요 기관을 점령하고 대장대신, 내대신, 교육총감을 살해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어떤 질서도 규칙도 없었다. 그저 힘의 논리에 의해 남을 짓밟을 뿐이었다. 일본은 더 이상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일본은 오랜 세월 분단되어 있었다. 일본 전역에 막부라는 독립된 세력이 존재하였고 그런 일본을 통일하기 위하여 이전까지 상징적인 존재였던 천황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렇게 천황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을 통치하는 신성한 존재가 되었다. 그는 일본을 통치하는 가장 높은 사람이자 군의 모든 통수권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군부는 이런 사실을 이용했다. 그들은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이 모든 것은 천황 폐하를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해 면죄부가 되었다. 일개 파견군이 멋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쿠데타를 시도해도 모든 것이 용서가 되었다. 천황을 위한 일이었기에. 마치 천황을 섬기는 거대한 사이비 종교 같았다.

 천황과 국가 그리고 일본 민족을 위하는 일이라며 그들은 자신들을 정당화하였지만 이 모든 일들은 몇몇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 내각과 군부, 육군과 해군, 육군 내 각 파벌, 크고 작은 모든 집단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했다. 신념에 의한 숭고한 뜻이라며 상대를 무너트리고 자신의 뜻을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것은 신념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한 몸 희생하며 어떤 역경에도 불만 한 번 없던 어르신들이 생각났다. 이 분들은 민족을 위해 한 몸 기꺼이 희생을 하였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한 몸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버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한 것이었다. 편한 삶은 한순간이다. 하지만 옳은 것은 영원하다. 흥 장군과 제비 형님이 말했던 나 자신을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사장님과 신홍이 말했던 신념이라는 말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깨달았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신념을 버리고 그 어떤 규칙도 통하지 않는 정글과 같은 곳으로 넘어왔다. 다시 돌아갈 용기도 자신도 없었다. 난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고 출세를 하는 것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죽이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창의적인 사람이 출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적인 사람이 출세를 하였다. 나는 철저하게 천황의 신하로 살았다. 진정한 황국의 신민이 되기 위하여 일본인과 결혼을 하고 아들도 낳았다.

 나의 연구는 어느 순간부터 진전이 되지 않았다. 민간 기업이라고 했지만 군수품을 생산하는 곳이기에 군부의 참견을 많이 받았다. 엄밀히 말하면 참견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군부의 소속처럼 군의 지시를 받았다. 그래서 애당초 내가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무기 개발을 기획한 나가타 대좌가 살해되었다. 불만을 품은 육군 내 다른 파벌의 부하 장교가 근무 시간에 그의 집무실에서 군도로 그를 참살하였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사건으로 인해 나의 후원자가 사라지자 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때부터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소총에서부터 전차 개발까지 시키는 것은 뭐든지 다했다. 전문성이 떨어지고 개발된 무기들의 성능에 문제가 생겼지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임무를 완성해 냈다는 사실이었다. 천황 폐하의 은총을 받아 해냈습니다. 이 한마디면 나는 박수를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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