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 장 후회(1)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일본이 무너졌다. 그 안에서 쌓은 나의 부와 명예 또한 한순간에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이 순리였다.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옳지 않은 선택이었고 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얻어낸 것들이었다. 그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나의 잘못에 대한 죗값을 치렀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는 공평하지 않았다. 난 오히려 더 큰 부와 명예, 권력을 얻게 되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연합군 최고 사령부가 일본을 통치했다. 미군 중심의 이 사령부가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는 전범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나 또한 그들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한 역할을 하였기에 처벌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난 미군의 일원으로 조국으로 돌아가는 기회를 얻었다.
강대국들에 의해 얻어낸 독립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일본이 물러간 자리에는 미국과 소련이 들어왔다. 그들은 자기들 멋대로 선을 긋고 남쪽에는 미국이 북쪽에는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하였다. 북에는 소련 친화적인 자치 정부가 들어섰으나 남에는 미군이 직접 통치를 하기로 결정되었다. 남쪽에 들어선 미군정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나라를 운영할 행정적인 능력도 한반도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도 없었다. 군대 관련 일을 했으면서 영어, 한국어, 일본어 모두에 능통했던 나는 그들에게 아주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모든 재산을 제대로 처분할 수 있었고 모든 부를 유지한 채 미군정 소속으로 아주 당당하게 돌아왔다. 일본이 벌인 정의롭지 못한 잔인한 전쟁의 일부를 담당한 사람 치고는 과분한 처사였다.
민간 기업에서 단순한 무기 개발을 한 것이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는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전쟁에 대해서 명확히 인식을 하고 있었고 전쟁 수행을 도왔으며 그 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천황에게 매일같이 충성을 다짐했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나의 행동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내 마음의 죄책감에 난 전범 재판에 회부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렇지만 양심은 현실과 달랐다. 내가 도쿄를 떠난 뒤 진행된 전범 재판에서는 제대로 된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 단 일곱 명만이 사형을 당했다. 그리고 무기 징역 및 금고형에 처해진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면되었다. 무엇보다도 전쟁의 가장 큰 책임자인 천황 히로히토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만주에서 무기 개발 및 연구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비인륜적인 인체 실험의 책임자인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미군에 넘기는 대가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만주국 총무청 차장이었던 기시 노부스케는 731부대의 승인뿐 아니라 만주에서 일어난 모든 잔학한 학살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이후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으로 태평양 전쟁을 치렀다. 그런 그였기에 그들이 벌인 전쟁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국가 기밀을 대상으로 거래를 하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이후 일본의 총리가 되어 오랜 기간 일본을 통치하였고 그의 권력은 그의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졌다. 그의 자손들 또한 주요 요직에서 일본을 통치하였고 그의 뜻을 이어받아 그들이 벌인 잔인한 전쟁을 정당화하였다. 그 덕분에 일본은 먼 훗날까지 전쟁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군인뿐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들까지 살해된 이 끔찍한 전쟁의 책임은 단 일곱 명의 목숨으로 모두 종결되었다.
나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할까? 과거의 잘못에 대한 추궁보다는 혼란한 시기를 수습할 능력이 먼저였다. 난징에서는 3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심지어 일본군 소위 두 명이서 누가 먼저 백 명의 목을 베나 내기를 하기도 하였다. 인간으로서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잔학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책임을 지는 자는 드물었다. 필리핀에서 죽음의 행진은 용감히 싸운 미군의 명예를 더럽혔다. 그들은 손이 뒤로 묶인 채 물과 식량도 없이 열대의 날씨에서 걷고 또 걸어야 했다. 질병에 걸리거나 낙오되는 군인들은 행군에 방해가 된다거나 질병을 옮길 수 있다는 이유로 일본군의 총검에 찔려 죽었다. 만 명이 넘는 미군들이 이렇게 학살당했다. 그들은 군인으로서 명예롭지 못하게 죽었다. 맥아더 장군은 그들이 필리핀에서 포로로 잡힐 때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부하들을 놔두고 어쩔 수 없이 호주로 피신을 하였다. 그런 그가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최고 사령관이 되어 돌아왔다. 그의 부하에게 가해진 잔혹한 행위에 대한 보복이 펼쳐질 차례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보복이 아니라 관용을 베풀었다. 관용이 아니라 거래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의 죽은 부하들이 억울해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실리를 택했다. 그런 그의 선택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의 부하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념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것들이 중요하게 취급받았다. 아직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의 피가 마르기도 전이었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과 핍박받던 민족들의 분노가 살아있을 때였다. 소련의 공산주의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하는 미국에게는 이런 분노는 뒤로한 채 일본을 정상화하여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억울함, 분노, 슬픔은 민주주의에 묻혔다. 천황 폐하의 명령으로 적진에 용감히 뛰어든 젊은 청년들은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그 시체를 수습해야 했던 부모들은 평생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천황은 이제 와서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전쟁과는 상관없는 상징적인 존재라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아있겠다고 했다. 미군은 그것을 인정해 줬다. 소련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그 사람들의 슬픔과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민주주의는 지켜졌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