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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친일파2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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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리 Oct 07. 2024

잘못된 사람들

제10 장 후회(3)

 “우리가 독립을 한 건 미국 덕분이지요. 그래서 당신도 나도 미군정 밑에서 이렇게 일하고 있지 않겠소? 내 비록 일본 밑에서 경찰을 하였으나 나 같은 하찮은 심부름꾼이 무슨 대단한 일을 했겠소. 도쿄의 연구소에서 일본의 전쟁을 위해 무기를 개발한 박사님만 하겠소. 일본인보다 더 충성스러운 천황의 신하로 지냈다던데 그새 마음을 바꿨소? 양심이니 뭐니 이상한 소리 마시오. 당신이나 나나 과거 얘기를 꺼내 좋을 것이 있겠소? 그저 조용히 새로운 국가에 충성을 하며 살아갑시다.”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노덕술 같은 사람의 입에서 듣고 나니 현실을 깨달았다. 난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존재였다.

 “생각해 보시오. 약산 같은 자가 박사님 같은 친일파의 도움을 받고 석방되었다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소. 오히려 약산의 명예를 더럽힐 뿐이오. 그냥 조용히 돌아가시오.”

 나에게 다가와 내 귀에 속삭이는 노덕술의 마지막 그 말에 난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듣고 난 몇 날 며칠을 잠을 잘 수조차 없었다. 박사님이란 호칭이 역겨워졌다. 대체 그것이 뭐라고 이런 선택을 한 건지. 언젠가는 나의 잘못이 잊힐 것이라 믿고 싶었나 보다.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내 마음속에서 잊힐 것이라고. 그때가 돼서 나 자신의 죄책감을 극복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저지른 잘못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지만 그들은 나를 다시 받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감히 용서라는 것을 무의식 중에 떠올렸나 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나의 존재는 누구에게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가 돼 버렸다. 나의 존재 자체는 씻을 수 없는 역사의 치욕이 되어 버렸다.



 시간이 흘러 남한에도 우리 민족의 정부가 들어섰고 난 정부와 함께 새롭게 창설된 대한민국 육군의 고문으로 여전히 지위를 유지하였다. 대한민국 정규군의 중심인 육군은 경찰 조직만큼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해방 전 일제에 대항해 임시 정부에서는 광복군을 창설하였고 광복군은 중국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만주군과 일본군에 대항해 싸웠다. 일본이 물러난 뒤 광복군이 중심이 되어 군대가 조직이 되는 것을 미군정은 경계하였다. 미군정은 중국 친화적인 광복군보다는 자기들에게 우호적인 일본군 또는 만주군 출신의 한국인들을 우대하였고 그들은 미군정의 비호 아래 경력을 쌓고 지위를 키워 나갔다. 비록 광복군 출신들도 합류하였지만 결국 친일 세력이 중심이 되어 육군이 조직되었고 군대 내 그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해방된 조국의 군대도 경찰도 친일 세력이 중심이 되었다. 고난을 무릅쓰고 힘들게 독립운동을 했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설 자리는 많지 않았다.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힘들게 싸워 왔는지 한탄스러울 뿐이었지만 나 같은 매국노들에게는 기회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군의 요직에 있는 장성급 장교들과 행정부의 수뇌들을 자주 만나야 하는 입장이었고 나와는 달리 뻔뻔하고 당당한 그들의 모습이 역겨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묵뿐이었다.

 “드디어 반민 특위가 해체되었다네요. 참으로 다행입니다. 지금 당장 급한 것은 북쪽의 빨갱이들인데 뭣들 하는 짓인지 참.”

 “솔직히 그 시절 친일 안 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일제 치하에서 세금만 내도 친일인 것을.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들 난리인지. 그러면 전 국민을 다 잡아가야 한다는 것인지. 참으로 답답한 일일세.”

 “기분도 좋은데 끝나고 좋은 데 가서 술 한잔 하시죠.”

 38선 부근의 전략에 관한 국방 회의를 위하여 모인 행정부의 수뇌들이 회의 시작 전 얼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자기들끼리 떠들어 댔다. 그들은 조선 총독부 고위직 출신의 친일파들이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얼마 전에 있었던 반민 특위의 씁쓸한 결말이 다시 떠올랐다. 우리 민족에 의한 정부가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행한 일 중의 하나가 친일파 청산이었다.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일명 반민 특위가 구성되었고 곳곳의 친일파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출신의 대통령과 친일파 출신의 행정부로 구성된 정부의 이상한 공존은 한계가 명확했다. 대통령은 공산주의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며 유능한 인재들을 지켜야 한다 하였다. 결국 대통령의 지시하에 반민 특위는 그 어떤 과거도 청산하지 못한 채 해체되었다. 그나마 잡아들였던 친일파들도 다 석방되었다. 마치 도쿄 전범 재판과 맥아더가 떠올랐다. 아니 그것보다 훨씬 무기력했다. 강대국들도 심지어 우리 자신도 그 누구도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지 않았다. 난 나의 잘못을 정확히 느끼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잘못을 정확히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도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잘못한 사람은 있었으나 처벌은 없었다. 이 세상의 정의는 힘과 권력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일까? 이 정도면 나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점점 과거의 잘못이 잊혀 가는 것만 같았다.

 나 또한 내 주위의 많은 친일파들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분노는 남아 있었다. 노구의 몸으로 조선 총독 암살을 시도한 왈우 선생을 체포한 공으로 승진까지 한 고위급 친일 경찰 출신의 김태석은 자신은 독립운동가를 잡아들인 적이 없고 오히려 도주를 도왔다며 열변을 토했다. 노덕술은 반민 특위 간부 암살까지 시도하였다. 지명 수배 중에도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며 그 태도가 제법 당당했다. 고문왕 하판락, 만주의 독립군 영웅들을 체포하고 사살까지 한 김덕기 또한 뻔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전부 체포되었지만 모두 석방되었다. 유일하게 사형 선고를 받은 김덕기 또한 결국 풀려났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나는 분노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내 신상에 도움이 되었지만 난 분노의 감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 감정은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 마음 깊은 곳의 어떤 의식이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하고 있었다.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그 말이 떠올랐다.

 “박사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습니다.”

 회의 시간 내내 상념에 빠져들어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던 나는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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