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 장 후회(4)
날 깨운 목소리의 주인은 얼마 전 임관하여 국방부의 제1 국장으로 부임한 이 대령이었다. 그 또한 일본군 출신이었지만 다소 특이한 친구였다. 그의 조부는 을사늑약의 체결에 큰 공헌을 한 거물급 친일 귀족이었다. 부친 또한 선친의 유지와 귀족 작위를 이어받아 왕성한 친일 활동을 하였다. 그도 많은 다른 친일파처럼 일본 유학을 떠났고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해 장교로 일본군에 복무하였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그는 유능한 일본 군인이었다. 그가 전쟁 중에 지은 천황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내용의 시는 신문에 실렸고 그는 일본군 최고의 영예인 금치훈장을 받았다. 부와 권력을 다 가진 지배층이며 충성스러운 친일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가진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른 태도를 보였다. 난징에서 학살을 목격한 그는 범행을 자행하는 병력을 제지하다가 의심을 받기도 했다. 태평양에서는 원주민 처녀를 성적 노리개로 이용하려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었다. 해방 후 패전군으로 태평양의 섬에 억류되어 있다가 힘들게 조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에게 찬란한 미래가 펼쳐져 있었다. 그 시기 미군정 내 군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일본군 출신의 장교들이 그의 옛 동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입대 권유에 그는 자신이 일본군에 종사함으로써 민족에 큰 죄를 지었다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는 삼 년을 자숙하며 은둔 생활을 하다가 얼마 전 입대를 한 것이었다.
남들과는 다른 그가 궁금했다. 얼마 전 그와 우연히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평상시라면 다른 사람과 교류를 피했겠지만 그날은 그가 온다는 소식에 이례적으로 사적 자리에 참석을 했다. 늦게까지 이어진 저녁 모임은 모두 취해서 끝나가고 있었고 유일하게 취하지 않았던 그와 나는 둘만의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왜 삼 년을 그리 보냈습니까? 당신은 어차피 일본 군인이 되길 거부하지도 않았고 주어진 운명에 맞춰서 무난하게 살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그런다고 당신의 과거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습니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좋은 환경에서 남들보다 편하게 자랐고 이런 환경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공부를 하였고 군인이 되었습니다. 누구에게 미안할 필요도 어떤 죄의식을 가질 이유조차 없었지요. 내가 이룬 모든 것은 누구보다 열심히 한 대가였고 노력의 산물이었어요. 그렇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았어요. 나는 시작부터 잘못되었고 나의 가족들의 죄는 씻을 수 없다는 것을. 그걸 알면서도 난 용기가 없었어요.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잘못을 바로 잡을 용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 상황에서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했어요. 작은 것들부터 하나씩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어요.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 난 내가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잘 압니다. 평생 죄인으로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는 없겠지요. 그저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속죄하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난 평생 민족의 죄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나에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그는 무덤덤했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평생 마음의 감옥에 갇혀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내가 저지른 잘못이었다. 옳지 못한 것을 행한 내 잘못. 너무도 힘들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나도 한번 편하게 살고 싶었다고. 그것이 뭐 그리 큰 잘못이라고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히냐고. 어떤 변명을 해봐도 나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해 봐도 소용없었다. 세상 전부를 속일 수는 있어도 나 자신을 내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 마음의 빚은 내 자식, 내 손자, 나의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몸이 안 좋으시면 오늘의 약속은 나중으로 미루시지요.”
나를 걱정하며 재차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난 현실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난 자신이 없습니다.”
난 그날의 약속을 완전히 취소해 버렸다.
원래 그날에는 이 대령의 소개로 어떤 음악가를 만나기로 했었다. 그의 조부 또한 유명한 매국노인 을사오적 중 하나였다. 그도 일본군에 입대하였으나 탈영을 하고 광복군에 합류하였다. 음악에 소질이 있던 그는 광복군 소속으로 음악을 활용한 선전 활동과 심리전으로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항상 자신의 조부의 잘못을 한탄하며 죄책감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그를 만나 보고 싶었다. 자기 가족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선택한 그러면 혹시라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 그리고 내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방법을.
하지만 나는 방금 깨달았다. 반민 특위가 해체되었다며 자신의 잘못을 덮을 수 있다고 안심하는 그들을 보며 깨달았다. 그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들은 태연한 척했지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잘 알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분노했다. 그 분노는 결국 나 자신의 잘못을 향한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법으로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두려웠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알고 있었지만 외면하며 살아왔었다. 하지만 외면한다고 외면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한번 더 외면을 선택하였다. 난 다시 조국을 떠났다.
우리 정부가 세워지고 일 년 남짓 될 무렵 미군은 한반도 남쪽에서 철수하였다. 난 그보다 더 늦게 그 해 말이 돼서 아드리안과 함께 후발대로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 아드리안의 도움으로 정식 미군의 일원이 되었고 미국인으로 살 수 있었다. 머지않아 난 군대를 나왔고 캐나다의 작은 시골 마을에 가서 정착했다. 캐나다에 가겠다는 로빈과의 약속을 이제야 지켰지만 그녀를 다시 볼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을 잊고 그저 가족만을 생각하면서 살았지만 나의 마음은 아직도 편안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