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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제라늄 Aug 09. 2019

인간이 사는 예의

나는 늘 한국에 갈 때마다 여러 통의 커피를 사들고 간다. 거창하게 네스프레소(Nespresso)나 이탈리아산 라바짜(Lavazza) 같은 걸 사가는 게 아니라, 그냥 슈퍼마켓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네스카페 분말이나 커피믹스 같은 것으로 말이다.


집에서 마시려고 샀던 평범한 인스턴트커피인데, 우리나라에서 맛본 커피들하고는 조금 다른 산뜻한 맛이 마음에 쏙 들었었다. 그래서 겸사겸사 한 번씩 맛들 보시라고 처음에 몇 병을 사다가 부모님 댁, 오빠 가족, 그리고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커피를 드시지 않기때문에 주변에 커피를 좋아하신다는 지인분들께 가져다 드렸더니, 그 맛이 너무 좋다고 기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올케언니는 커피를 좋아하시는 아버님께 가져다 드렸더니, 정말 맛있다고 감탄을 하시며 드셨다고 했다. 친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같은 상표 커피인데도 이렇게 맛이 다르냐며 아껴먹고 있다고 했다.


그런 피드백을 듣고 보니, 한국에 갈 때마다 커피 진열대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몇 천 원밖에 안 하는 그 커피 한 병은 사소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여행 가방이 터지지만 않는다면 한 병이라도 더 넣고 싶은 심정이다.


그 많은 분들께 매번 커피를 가져다 드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늘 세 병씩을 꼭 챙기는 특별한 이유는 바로 엄마의 지인 분들을 위해서다. 콩 한쪽도 이웃과 나누어 먹는 일을 몸소 실천하시는 엄마, 아니, 그게 그냥 당연한 일인 우리 엄마. 나는 분명히 안다. 우리 엄마가 따뜻한 마음과 배려로 평생 쌓아 올리신 덕(德)으로 인해, 내 삶까지 큰 탈 없이 이렇게 복 받고 있는 것을 말이다.


엄마가 사시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지혜와 인품은 어디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절대로 아님을 깨닫는다. 초등학교만 졸업하신 엄마에게 학력은 늘 부끄럽고 자신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남매는 공부에 관련된 일이라면 단 한 번도 부모님 앞에서 눈치를 보거나 주춤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 점에 있어서 부모님께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 엄마는 임대업을 하신다. 소소하지만 원룸이나 투룸이 몇 개 있는 작은 건물에 살고 계시면서 세를 놓고 계신다. 수입이라고 치자면 아빠 엄마 두 분이 겨우 생활하실 정도에 머무르지만, 그 운영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나로서는 영 자신 없는 일인데, 이거 완전 사업이 따로 없다. 상상을 깨는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고, 가끔은 그들에게 어려운 소리도 건넬 줄 알아야 한다. 이사 가고 이사 오는 사람들 사이에 집수리도 빠짐없이 해야 하고, 관리사무소 사장님과 부동산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평생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보신 적이 없는 가정주부였던 엄마는 그 많고도 복잡한 일들을 정말 훌륭하게 해내고 계신다. 그런 엄마를 옆에서 가만히 살펴보자면, 그야말로 기가 막히게 감동적이다. 우리 엄마가 갖고 계신 비결은 부동산법에 대한 지식이나 경영 스킬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엄마의 삶 속에 한 몸처럼 녹아 있는 한 가지 기준, 바로 ‘인간이 사는 예의’라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사다 드리는 대부분의 커피가 주변의 부동산에 가 있는 것도 우리 엄마의 예의의 일종이다. 어디 커피뿐이랴. 시골 외숙모 댁에 다녀오시는 날이면, 머위 잎이 되었든 두릅이 되었든 거실에 크고 작은 꾸러미로 나눠진다. 그중에는 1층에 세 들어 살고 계시는 할머니 드릴 것도 있다.


그렇게 마음은 오고 가는 것인가 보다. 예전 건물 원룸에 꽤 오랫동안 살던 목포 총각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의 어머니께서 맛이라도 보라시면서 정통 전라도산 갓김치를 한 통이나 직접 담가다 주신 적이 있었다. 덕분에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갓김치를 맛봤다.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그뿐이 아니다. 아래층 원룸 리모델링 공사라도 할라치면, 일하시는 분들 시장하실까 봐 오후 4시쯤 어김없이 김치부침개나 군고구마 등등 갖은 간식이 시원한 주스와 함께 내려간다. 그런 엄마의 배려를 보고 있으면, 나밖에 모르는 나 자신이 정말 부끄러워진다.


과연 엄마를 수식할 수 있는 말이 있긴 한걸까? (Photo by 파리제라늄)


엄마의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몇 년 전 한국에 갔을 때, 엄마의 교도소 방문기를 들으며 배꼽이 빠져라 웃었던 적이 있다. 그렇게 데굴데굴 구르며 웃으면서도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엄마에 대한 감동과 존경으로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오빠에게 같은 얘기를 했을 때 오빠는 뭐하러 그런 데를 갔느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지만, 나는 우리 엄마의 오지랖 (다른 말로 하자면 바로 그 ‘인간이 사는 예의’ 말이다.)을 적으로 지지한다.


엄마가 72년 생애 처음으로 교도소를 다녀오신 이유는, 우리 집수리를 주로 맡아하는 아저씨를 면회하기 위해서였다. 그분의 집수리 실력은 대단하단다. 일을 깔끔하게 잘하니 당연히 돈도 잘 번단다. 착한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저씨가 가끔 잠수를 타는 것이다. 며칠이 됐든 몇 주가 됐든 연락도 안 된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바로 '술' 때문이다.


부동산 아주머니나 우리 엄마는 이제 익숙해져서인지 연락이 안 되기 시작하면 '또 시작했구먼...' 하고 한숨을 쉬시며 말씀하신다. 엄마의 부탁으로 내가 공항에서 좋은 양주도 한 병 사다 드린 적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째 나도 공범 아닌가 싶어 진다. 그래도 부엌 바닥 타일을 바꾼다고 다 깨 놓은 순간에 사라지면 참 곤란하긴 하다. 한 번은 엄마가 애타 하시기에,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고 계속 일을 의뢰하냐면서 다음부터는 다른 데다가 맡기라고 말씀드렸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일말도 망설임도 없이 말씀하셨다.


"또 어떻게 그러냐~, 하루 이틀 같이 일 한 것도 아닌데. 대책 없이 그러는 거 보면 나도 스트레스받고 밉상스럽기도 한데, 늬~들 (우리 남매) 나이 또래라 자식 같기도 하고..."


아무튼 교도소 얘기로 다시 돌아와서, 그 아저씨의 죄명이 뭐였나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음주운전'이란다.


집에서 버스를 타면 십여 분이면 도착하는 곳에  교도소가 있는 바람에, 엄마는 병원에서 혈압약을 타 가지고 오시는 길 중간에 교도소를 들르셨단다. 손에는 커다란 비닐봉지 가득 약을 들고 'OO교도소'라는 정류장에서 내리셨는데, 건물이 위쪽에 위치했던 바람에 더운 날씨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시면서 높은 곳까지 올라가셔야 했다.


마침 그날 다른 면회자가 없어서 면회가 허락이 되었는데, (면회는 한 사람에게 하루에 한 번만 허용된단다. 그러니 누가 이미 왔다 갔으면 그 날은 안 된다는 것이다.) 생전 처음 교도소 면회를 가셨으니 뭐를 아셨겠는가. 그래서 대기실에서 조용히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관찰하신 것이다. 가만히 보니, 사람들이 옆에 있는 사물함 같은 데다가 가지고 온 가방이나 물건을 보관하더란다. 엄마도 빈 사물함을 하나 찾아 약봉지를 꾸역꾸역 챙겨 넣고 순서를 기다리셨다.


마침내 유리창 너머로 만난 아저씨를 보면서, 엄마가 가장 먼저 하셨다는 말씀은 이거였다.


"고마워~! 덕분에 이 나이에 교도소 구경을 다 해보네. O사장 아니면 내가 언제 이런 데를 다 와 보겠어?"


그러니 그분도 멋쩍은 웃음과 함께 뭐 하러 오셨냐면서도 내심 반가운 표정이었단다. 뭘 전달할만한 구멍이라고는 없는 면회실에서 챙겨 가신 영치금 봉투를 들고 "이건 어디로 넣어줘야 하는겨?" 하고 두리번거리셨다는 귀여운 우리 엄마. ^^ 입구 교도관에게 맡기는 거라고 해서 나오는 길에 봉투를 건네니, 금액을 확인하던 교도관님이 무슨 영치금을 10만 원이나 넣었냐며 관계를 재차 묻더란다.


면회를 마치고 사물함에 보관했던 약봉지를 다시 주섬주섬 챙겨가지고 나오시는데, 정문을 지키시던 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건 왜 다시 들고 나오시냐고 물으셨다. 그 약을 주려고 면회를 온 줄로 아셨던 거다. 이어진 우리 엄마의 대답.


"이건 내거유~!"


한참을 킥킥거리면서 얘기를 듣다 보니, 우리 엄마뿐 아니라 부동산 사장님들까지 다 한 번씩은 다녀오신 듯했다. 서로서로들 어떻게 모른 척 하냐며 다녀들 오셨단다. 그 결과는? 그 아저씨 교도소에서 나오시면서 영치금으로 받은 돈을 160만 원이나 모아가지고 나왔단다. 이게 웃어도 되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가슴 따뜻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나는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아! 바로 이것이 '사람 사는 예의'구나! 그야말로 무늬만 어른 말고 진.짜. 어른들이 살아가는 예의 말이다. 대체 누가 이런 어른들을 향해 꼰대라는 말을 함부로  것인가!


여전히 우리 엄마의  따뜻한 가슴 십 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하는 이기적인 나, 더 많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엄마 나이쯤 되었을 때, 엄마의 반절만이라도 진정한 어른 구실 좀 하면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 더 넉넉하게, 조금 더 포근하게. 나는 이런 우리 엄마가 정말 자랑스럽고, 마음 깊이 사랑하고, 크게 존경한다.


스트라스부르크의 예쁜 프띠프랑스, 그리고 그보다 더 예쁜 우리 엄마 (Photo by 파리제라늄)



나의 글은 그대를 향한 시선

- 파리제라늄_최서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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