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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Mar 24. 2020

너 따위에게 지지 않는 법2.

걷는다. 그리고 한다.

너 따위에게 지지 않는 법2.- '걷는다.' 그리고 '한다.'          



건강이 문제였다. 근래의 많은 일들이 목표를 앞에 두고 좌초하는 것에는 그놈의 ‘노오오오력’ 과 ‘의지’의 탓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몸 상태가 발목을 잡았다.     


우선 오른쪽 손은 밤이 되면 잠시 떼어 두었다가 다시 붙이고 싶을 만큼의 통증 때문에 잠이 들기 전까지 뒤척뒤척 전전긍긍이었고, 손목에서 시작된 통증은 팔꿈치를 타고 올라가고 어깨를 침범하고 목을 빳빳하게 만들었다. 엎친 데 덮쳤다고 그에 더해서 허리통증이 심해졌다. 허리가 아프면서 다리도 말을 안 들어 ‘이것이 내 다리인가? 네 다리인가?’ 의 상태가 된다. 다리가 나에게 붙어있으되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지며 정도가 심할 때는 발을 땅에 딛기는 했는데 잘못 디딘 것 같아 제대로 딛어보려다 중심을 잃기도 한다. 한쪽 다리에 힘이 빠지니 힘이 더 들어가고 그러다가 힘주는 쪽 다리의 근육이 뭉치고 무릎에 통증이 뻗친다. 콕 찝어 설명하기 어려운 이 모양새를 글만 읽고도 정확히 이해하는 분이 있다면 심심한 동병상련의 위로를 전한다. 한마디로 모르는 편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허리통증이 가장 심했을 때가 약 3년 전이였다. 최근 나의 허리 상태는 그 때 못지 않은 모양새로 돌아가 버렸다.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고, 몸을 굽히거나 펼 때 마다 ‘아고고’ 소리가 울려퍼진다. 겉모습으로 ‘동안’이라는 소리를 적잖이 듣곤 하지만, 실제 나의 몸 상태는 팔순노파나 다름이 없다.     


최후의 수단은 모친의 진통제였다.


이 시골 도시 역전에는 낡디 낡은 약방이 하나 있다. 시골이라 칭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인구 십여만의 소도시는 온전한 시골과는 그 모양새가 조금은 다르다. 그러나 할아버지 약사님이 운영하는 그 약방은 1970년대 시골 약방의 풍경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세월을 먹은 약방의 손님은 대부분이 약사님만큼 나이가 든 노인들이고, 약방 매출의 대부분은 진통제다. <내복약> 봉투에 담아 주는 이것이 불법인지 아닌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약은 알음알음 소문을 타서 노인들 사이에서는 ‘용한 약’으로 통하고 있다. 나이 든 약사님의 건강 상태를 걱정하는 노인 손님들의 속내에는 적잖이 이 약방이 없어지면 '이 용한약을 구하지 못할까봐'의 안달이 섞여 있다. 그 노인 손님들 중에는 내 모친도 있다. 그런 사연으로 엄마의 주방 서랍 안에는 시골약방의 진통제가 수시로 리필되고 있었다.통증이 심한 날에 그 진통제를 슬그머니 입에 털어넣었다.      


시골 약방 진통제 실물 사진이다.


사실 효과는 잘 모르겠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서 진통제를 먹고 나면 몸이 붓는 터라 이 정체불명의 진통제 역시 먹고 나면 몸이 붓는 것을 보니 ‘진통제가 맞긴 맞구나’ 하고 몸으로 짐작할 뿐이다. 사실 내가 진통제를 털어넣는 행위의 심리적 바닥에는 몸의 효과보다는 일종의 마음의 마지노선이다. 이 적당히 ‘야매’스러운 진통제를 털어 넣을 만큼 내가 아프다는 분명한 확인과 좌절해도 된다는 핑계를 찾는 것이다.          





내가 사는 곳에는 호수와 솔밭이 있다.

오늘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쨍하고 시원한 풍경조차 묵직한 상실감 앞에서 오히려 짙은 헛헛함이 되기도 했던 이유로 한 동안 찾지 않았다. 그러나 운동을 죽도록 싫어하는 내가 그나마 이 길을 걷는 것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최소한의 운동이었다. 그 길을 다시 찾았다. 걸음은 전보다 느렸고, 뻐근하게 밀려오는 통증이 발걸음을 따라왔지만 해가 산 너머로 숨어들기 직전에 땅 위에 남은 따스함과 호수에 잔잔한 무늬를 남기는 바람이 좋았다.     





    


시간을 따라 걷는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우주만큼 큰 세상으로 놓고보면 하나의 시간일지도 모를- 안에서도 빛의 방향에 따라 속속 얼굴을 바꾸는 풍경을 곁에 두고 걷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쭉 '걷는다'.               




어젯밤에는 넷플릭스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내 몸이 사라졌다.> 지금 나에게 시의적절한 영화였다.

영화를 보기 전에 내내 했던 생각은  '넷플릭스에 찜해 둔 영화 봐야 하는데...', ' 아, 웹서핑 그만하고 영화 봐야 하는데...',  '아.. 해야 하는데..' , ' 해야 하는데....' 였다. 당장 하면 되는 일을 두고, ‘해야지’만 반복할 뿐 정작 하고 있는 일은 웹서핑이다. 일단 벌떡 일어나서 웹브라우저를 껐다. 잠시 방을 비웠다가 다시 돌아와 영화를 보았다. ‘해야지’ 대신에 ‘한다.’


그래서 오늘 중에 무엇을 할 것이고, 내일은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는 세우지 않는다. 그저 할 것을 할 뿐이다. '오늘 책 한권을 다 읽어야지..' 라는 결심을 대롱대롱 매달고 겨우 그깟 무게감에 질려서 내내 바라보느니 보다 그저 떠오르는 생각을 따라 책이 읽고 싶다면 풀썩 책장을 펼친다. 당장 책을 펴는 일을 못할 만큼 큰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니니까.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물론 내 앞에 펼쳐질 것들이 웹서핑을 끝내고 영화를 보는 것처럼, 혹은 책 한권을 펼쳐드는 것 처럼 쉬운 일만 있으리란 법은 없다. 당장 할 수 있었던 일들은 어느 새 사라지고 내 눈 앞에 놓인 것은 숨막히도록 힘든 일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당장 ‘하는’ 일이 많아지다 보면 목표가 그저 목표인 채로 머물다가 제풀에 지쳐 좌절하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주렁주렁 썼지만, 다 아는 이야기다. 이미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유별나게 글로 옮기는 것 조차 낯부끄러운 일이다. 아무튼 이제 첫걸음을 다시 떼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걷기를 멈추고 싶어질 수도 있고, 눈 앞의 할 것이 태산처럼 커 보여서 지레 겁먹고 슬쩍 고개를 돌리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좀 거친 아이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다닐 생각이다. 두려움이 닥치는 순간마다 그 아이가 빽! 사납게 소리를 지를 것이다.     


“너 따위 한테 안 진다니까! 꺼져.”          


내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쓴다.          



(덧붙이는 이야기- 진통제를 저렇게 판매하는 것이 불법인지 뭔지를 정확히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약을 팔았고, 주 고객층은 고단한 세월을 닥치는 대로 살아온 시골 노인들이다. 그러니 그들의 세상을 오늘의 시간의 빡빡한 잣대로 판단하지는 않았으면 싶다. 그래서 혹시 모를 노파심에 구체적 지명과 약방 이름은 가능한 노출 하지 않으려 한다.)



'너 따위'시리즈는 간헐적으로 이어집니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 서툰 글쟁이의 늦깎이 여정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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