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업을 해야 할지 막막할 때면 뜬금없이 당연하게 알고 있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본다. 빈 캔버스 앞에 앉아서 오늘은 ‘예술’이라는 단어를 찾아보았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예술’이란,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이라고 한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 나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시작되었다. 나는 주로 아름다움을 ‘사람’에게서 찾는다.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모든 인간은 외모, 습관, 생각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고지식해서 습관이나 생각이 바뀌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외모만큼은 변한다. 그러므로 내가 사람에게서 찾는 ‘아름다움’은 시시때때로 변한다. 지금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이 시간이 지나, 생각이 달라져 그렇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현재’의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을 통해 작품을 만들고 있다.
갑자기 ‘예술’이라는 단어를 찾다가 ‘아름다움’ 타령을 해 봤다. 그런데 왠지 내가 지금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이 책에 싣게 된 이안 작가님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름다울 사람인 것만 같다. 왜냐하면 도전을 마다하지 않고 다채로운 경험을 온몸으로 맞이하며, 때에 맞는 아름다움을 알고 간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예술’대학에 있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사람이다. 나와 같이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것을 공부한 사람이란 말이다. 그녀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지인에게 소개받은 그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작가님 역시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찾고 배우며 즐기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최경아 안녕하세요. 공간이 너무 아늑하고 좋네요. 선뜻 인터뷰에 응해 주시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의 분위기, 그리고 공간이 이국적이에요. 혹시 해외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이 안 안녕하세요. 글을 쓰고 차(茶)회와 ‘제철 미식회’로 차와 요리를 나누는 이안입니다. 해외 거주 경험은 뉴질랜드에서 1년, 캐나다에서 1년, 이렇게 2년 정도인데요. 저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인지 전 세계 오지를 구석구석 다닌 사람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웃음)
최경아 해외에 거주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이 안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살고 싶었어요. 부모님이 멀쩡히 살아 계신데 입양 가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을 정도로요.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살던 자취방 전세금을 빼서 결국 뉴질랜드로 갔죠.
최경아 가 보시니 역시 해외 체질이던가요?
이 안 네, 예상처럼 잘 맞았어요. 뉴질랜드에서 다시 대학을 가려고 1년 정도 준비했는데, 합격하자마자 입학금을 사기 맞아서 다시 한국에 들어오게 됐지만요.
최경아 아이고. 어린 나이에 큰 경험을 하셨네요.
이 안 그래도 뉴질랜드에서의 경험이 큰 자산이 됐어요. 남섬 끝에서 북섬 끝까지 자동차 여행도 했고, 우연히 골프도 배웠거든요. 한국에 골프 붐이 일기 훨씬 전이니까 꽤 일찍 배운 셈이죠. 그 덕에 한국 들어와서 골프 잡지 기자로 일을 했어요.
최경아 골프 잡지는 좀 생소한데요?
이 안 문예창작학과 출신이라 기자로 취직하는 경우가 흔했는데, 저는 골프도 알고 영어도 되니까 LPGA 선수들을 인터뷰하기도 하고, 나름 적성에 잘 맞았어요.
최경아 그런데 어떤 계기로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요리와 차에 빠지게 되셨나요?
이 안 당시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그럴 운명’이지 않았나 싶어요. 어릴 적부터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뉴질랜드에서도 요리 관련 대학을 가려고 했을 정도로요.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요리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자를 관두고 레스토랑에 취직했어요.
최경아 궁금한 것, 하고 싶은 것은 꼭 해봐야만 하는 성향인가 봐요. (웃음) 어떤 레스토랑이었나요?
이 안 이태원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는데 다양한 외국 식재료를 다루는 곳이었어요. 당시엔 통 하몽이나 30킬로그램이 넘는 휠 치즈 취급하는 곳이 드물었거든요. 생소하고 재밌는 경험을 하면서 일을 하니까 즐거웠어요. 거기서 여러 경험과 공부를 하고 내 식당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죠.
최경아 그래서 식당을 오픈하셨나요?
이 안 아니요. 제 식당을 차릴 인연은 없었나 봐요. 요리 쪽으로 진로를 틀어야 하나 고민하던 때에 책 집필 제안이 들어왔어요.
최경아 역시 인생은 타이밍…? 새로운 경험을 마다하지 않는 성향으로 보아 승낙하셨을 것 같은데요?
이 안 제안을 들어보니 일단 캐나다에서 1년은 살아야 하고, 그러니까 당연히 영어가 가능해야 했고… 기획, 인터뷰, 원고 집필을 전담하고 동시에 사진도 잘 찍는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최경아 그건 그냥 책 전체를 혼자 다 만들라는 말 아닌가요?
이 안 그러니까요. 학과 선배를 통해서 들어온 일이었는데, 저 이전에 여섯 명이 거절했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최경아 그래서 작가님은 하겠다고 하셨나요?
이 안 대학 시절부터 제가 해왔던 경험이 일관성 없이 여러 분야를 기웃거렸던 건데요. 예를 들면 문창과에서 사진 동아리를 했다거나 뜬금없이 전공과는 상관없는 영어 연수를 가고, 직업도 기자 하다가 레스토랑에 취직하고 그러는 거요. 당시에는 주변 사람들이 왜 한 가지에 집중을 못 하냐고 핀잔을 줬거든요. 지금처럼 N잡러의 시대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다양한 경험을 해온 저라서 이 까다로운 조건을 맞출 수 있더라고요.
최경아 그러니까 그 당시 남들이 실패의 경험이라 부르던 많은 일들이 쌓여 그 일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사람으로 작가님을 만들어 놓은 셈이군요.
이 안 그렇죠. 그래서 레스토랑 일을 접고 다음 해에 캐나다로 떠났어요.
최경아 캐나다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지 기대되는데요. 어떤 일들을 경험하셨나요?
이 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죠. 캐나다에서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통찰력’을 선물받았다고 생각해요. 생각나는 에피소드 하나를 말씀드리자면… 현장의 생생한 경험을 들려줄 인터뷰이가 필요했는데, 이건 뭐 거의 사막에서 바늘 찾기였죠. 캐나다에서 동쪽 끝에 있는 작은 섬인 Prince Edward Island라는 곳에 갔었는데요. 그곳은 워낙 외져서 한국 사람들은 잘 안 가는 곳인데 누가 한국 노래로 버스킹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다짜고짜 인터뷰 좀 하자고 했죠.
최경아 저도 이렇게 인터뷰를 하고 있지만, 인터뷰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은근히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더라고요. 그분은 허락하셨나요?
이 안 버스킹을 마치고 바로 다른 일을 하러 가야 해서 시간이 없다길래 무작정 따라갔죠.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하는 한국 친구였어요. 그날 게스트 하우스가 풀 부킹이라고 했는데, 저와 취재 일행이 세 명이었거든요? 도착해 보니 마침 3인실 하나가 취소된 거예요. 그때 느꼈어요. 간절히 원하는 건 진짜 이뤄지는구나. 굳은 의지로 무언가를 하고자 하면 길은 열리는구나.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최경아 저도 간혹 그런 에너지를 느낄 때가 있어요. 온 우주가 나의 의지를 알아주고 도와주는 느낌이요.
이 안 혹시 1989년에 나온 영화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 보셨나요? 그 영화에 ‘믿음의 도약’이라는 장면이 나와요. 성배를 찾기 위해 다리가 없는 협곡을 건너야 하는데, 사실은 다리가 없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었죠. 결국 ‘믿음’에 답이 있음을 깨닫고 주인공은 협곡의 허공에 몸을 내던져요. 착시 효과로 보이지 않았던 다리를 발견하고 결국 성배를 얻죠. 제가 그 책 작업을 하면서 이 대목을 인용해서 서문을 썼어요. 지금 당장은 깜깜하고 보이지 않는 두려운 길이라도 믿음의 첫발을 내디디면, 다음 길이 보인다는 것을요.
최경아 조금 다르게 해석하면 예술가의 직감과 비슷하게 봐도 될까요?
이 안 그럴지도요. 그때 진짜 육감이 생긴 것 같아요.
최경아 그 후 책은 별 탈 없이 잘 출판됐나요?
이 안 사실 그 프로젝트는 의뢰하신 분의 일생일대의 프로젝트였어요. 유학원을 운영하시던 대표님이셨는데, 본인은 직접 갈 만한 상황이 안 되니까 대신 취재하고 집필해 줄 작가를 고용한 거였죠. 거의 억대의 출장비가 든 큰 투자였어요. 저랑 휴학한 대학생 두 명을 보조로 고용했는데, 1년 출장이 끝날 때쯤 일이 터졌죠.
최경아 불안하네요. 그 휴학생들 왠지 마무리 작업 안 하고 도망갔을 것 같은데요….
이 안 빙고! 1년 동안 취재 다니며 이곳저곳 돌아다닐 때는 재밌지만, 아시다시피 책은 마무리 작업이 제일 중요하잖아요. 한국 들어와서 원고 정리, 편집 등의 가장 중요한 작업이 남았는데 둘 다 관두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친구들을 대신할 사람을 찾을 수도 없었어요. 1년간 찍은 몇만 장의 사진을 분류하고 수천 장의 원고를 정리해야 하는데, 함께하지도 않은 사람이 대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최경아 최악이네요.
이 안 일이 그렇게 되니까, 투자하신 분 입장에서는 아예 캐나다에서 일을 제대로 하고 온 건지부터 의심하시는 거예요. 자꾸 저한테 원고를 보여달라는 거죠. ‘정리할 게 너무 많다, 아직 보여줄 수 없다’고 하니 저한테 사기를 당했다며 소송을 거시겠다는 거예요.
최경아 그런 강압적인 상태에서 원고 정리도 쉽지 않았겠어요.
이 안 맞아요. 결국 불안장애도 생기고, 종일 두려움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두피에 종기 같은 염증이 생기고 난리였어요. 하루 종일 작업을 해도 불안감에 머리는 안 굴러가고, 진도도 안 나가고요. 정말 너무 힘든데 말할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 끙끙 앓던 중에 같은 동네에 살던 언니에게 차 한잔 마시러 오라고 전화가 왔어요.
최경아 이렇게 자연스럽게 차(茶)의 세계로 연결되는 건가요?
이 안 (웃음) 그때 언니가 준 차를 마시는데, 따뜻한 차가 마치 내 등을 토닥토닥해주며 ‘많이 힘들었지?’ 하고 위로해 주는 것 같았죠. 그렇게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 차를 마셨더니 정신이 맑아진 거예요. 그래서 처음으로 그 언니한테 제 상황을 말했죠. 소송 당할 위기에 있다고요. 그리고 당장 이 두피 염증 때문에 미쳐버리겠다고.
최경아 두피 염증은 약을 발라도 소용없었나요?
이 안 두피에 닿기도 전에 머리카락에 다 묻으니까 약을 제대로 바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언니한테 삭발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언니가 “삭발하려면 절에 가야지”라고 하는 거예요.
최경아 갑자기요? 절에?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되네요?
이 안 절에 일 년에 네 번, 일반인이 스님처럼 살아보는 ‘단기 출가’라는 프로그램이 있는 거 아세요?
최경아 몰랐습니다.
이 안 그 얘기를 듣고 바로 검색을 해보니까, 또 마침 모집 기간인 거예요.
최경아 와… 진짜 이렇게 우연이 운명처럼 이어질 수가 있나요?
이 안 근데 그 프로그램이 또 경쟁률이 세요.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전국에서 힘든 사람들이 많이 지원을 한대요. 그래도 제가 명색이 문창과 출신인데 말발로는 안 밀리죠. 그렇게 결국 절에 가게 되었습니다.
최경아 아니, 잠깐만요. 그럼, 그 책은 어쩌고요?
이 안 그 투자자분께는 양해를 구했죠. 내가 한 달 동안 어디 좀 다녀올 건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기다려 달라. 다녀와서 결판을 내자. 그랬죠.
최경아 양해가 아니라 거의 협박인데요? (웃음) 어느 절이었나요?
이 안 오대산 월정사요. 월정사가 단기 출가 학교로 워낙 유명해요. 아직 수계를 받지 못한 수행자를 행자라고 부르는데요, 그들과 똑같이 생활했어요. 예를 들면,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 보고, 청소하고, 108배 하고 수업도 듣고요. 저랑 같이 들어갔던 동기 중에 실제로 스님이 된 분도 계세요.
최경아 와… 삭발할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이 안 큰 법당에서 삭발식을 하는데 분위기가 꽤 엄숙해요. 60대 아주머니가 한 분 계셨는데, 정말 대성통곡을 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삭발하고 출가를 할까?’ 하는 분위기인데, 저는 반대로 삭발하며 함박웃음을 지었어요. 너무 개운하고 시원했거든요.
최경아 한 달 끝나고 나왔을 때는 정말 애매한 머리 스타일이었겠네요?
이 안 네. 그때가 2010년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다 쳐다봤었어요. 그때 절에 같이 들어갔던 동기들끼리 놀러 가기라도 하면 펜션 사장님이 조심스럽게 묻곤 했어요. “혹시 감방 동기들이세요?”라고요. (웃음)
최경아 재밌네요. 이후에 그 투자자와는 어떻게 됐나요?
이 안 까까머리에 검은 선글라스, 검은색 정장을 입고 투자자의 사무실에 갔죠.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나타나니까 그분께도 충격이었나 봐요. 그 전에는 제 말을 변명이라며 듣지도 않으셨는데, 그땐 말문이 막히셨는지 경청을 해 주시더라고요. 제가 그랬죠. 그 큰돈을 투자하셨는데 아무 결과물도 없을까 봐 얼마나 걱정이 많으셨냐, 그런데 책 원고 작업이라는 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신 매일 당신 사무실로 출근해서 내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했고, 결국 해냈죠. 그래서 2012년에 큰 출판사에서 책이 나왔어요. 아무래도 다른 유학 책들과는 차별점이 확실하게 있다 보니까 평점도 높았어요. 나중엔 투자자분이 이렇게 잘해줄지도 모르고 처음에 못 믿어서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인세 비율도 나중에는 자기 비율까지 제게 양보하시기도 했고요.
최경아 결국 해피엔딩이었네요?
이 안 네, 사실 얼마 전에 미국 편 써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주셨는데, 이번에는 못 하겠다고 했어요. 그땐 30대였고 지금 40대라고. (웃음)
최경아 책 작업하시면서 많은 경험을 하셔서 그다음부턴 모든 일이 쉬웠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이 안 사실 그 책이 출판되고는 책 관련 일들이 많이 들어오겠구나 싶었는데, 의외로 의뢰가 안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다시 직장에 들어갔어요. 삼십 대 초반이니까 남들처럼 평범하게 결혼해서 아이 낳고… 그렇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였죠.
최경아 그러다 차(茶)회를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이 안 아뇨. 아직이에요. (웃음) 절에 들어갈 때쯤부터 보이차를 꾸준히 마시기 시작했는데요. 차를 마시면 마실수록 평범하게 직장에 다니는 일은 왠지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다 함께 차 마시는 자리에서 한 스님에게 동남아에서 차를 마시면 몸의 안과 바깥 온도가 비슷해져서 몸의 경계가 사라지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는 말을 듣고 혹해서 덜컥 회사를 관두고 발리 가는 비행기 티케팅을 했어요.
최경아 발리에서는 또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나요?
이 안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삶이 좋았어요. 사회가 규정한 보통의 삶, 부모님이 원하는 삶이 아닌, 나라는 사람이 원하는 자연스러운 삶이 뭘까 고민하는 시간이었어요. 그걸 고민하다가 귀농했고요.
최경아 갑자기 귀농이요?
이 안 그러게요. (웃음) 귀농 붐이 불기 전인 2012년이었으니까… 제가 시대를 좀 많이 앞서가죠? (웃음) 홍천에서 2,000평 정도 배 과수 농사를 짓다가 전라도 장수로 가서 500평 농사를 지으며 힐링 스테이 사업도 함께 했어요.
최경아 농사와 스테이라면, 농사지은 농작물로 놀러 온 사람들에게 요리해 주는 숙박업 형태인가요?
이 안 네. 시골집에서 1박 하는 손님들께 직접 키운 작물로 요리를 대접하고 보이차를 내어 드렸죠.
최경아 그때부터 사람들과 함께 차회를 하신 거군요.
이 안 네, 그게 시초였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차로 구사일생한 경험이 있잖아요. 그래서 차의 힘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최경아 그런데 그 사업이 잘 안됐나요? 왜 다시 서울로 오셨어요?
이 안 동업자를 잘못 만난 거죠. 전 재산을 말아먹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어요. (웃음) 또 한 번 그렇게 바닥을 쳤죠.
최경아 와… 작가님 인생이 완전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네요.
이 안 그렇죠?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바닥에서 저를 구해준 게 명상이었어요. 내가 믿고 있던 ‘나’와 ‘내 인생’이 내가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죠. 그동안 내가 얼마나 교만하고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었는지 알게 되면서, 그동안의 내가 무너지고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어요. 그 이후로는 사람을 늘 조심하면서도 배려하려 노력했어요.
최경아 보통은 그런 힘든 시기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떤 시간으로 새 인생을 채우셨나요?
이 안 제가 그 당시엔 드라마 작가 일을 했었거든요. 그때 메인 작가님이 작업실에 배우들과 제작팀을 초대하는 걸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손님을 초대하고 대접하는 법을 배웠죠. 음식이 얼마나 사람들을 이어주고 기쁘게 해주는지를 정말 진하게 경험한 시간이었어요. 또 명상하면서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동시에 저는 점점 투명해지고요. 이전의 저는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었거든요.
최경아 그 경험이 전문 호스트가 된 계기였군요.
이 안 네. 그때기 커뮤니티 플랫폼들이 막 시작하던 시기였어요. 그중 ‘남의 집’이라는 플랫폼을 알게 되었고, 집주인의 취향을 모르는 사람과 공유한다는 콘셉트가 재밌어서 시작하게 됐어요. 집에 보통 친한 사람을 초대하잖아요. 근데 생판 모르는 사람을 집에 부른다는 게 흥미로웠어요. 물론 지원자의 소개글을 보고 저와 취향이 잘 맞을 것 같은 분들을 게스트로 모셨고요.
최경아 아, 게스트도 심사를 받고 초대하는 형태였군요? 생판 모르는 사람의 집에 간다는 것이 호스트에게도, 게스트에게도 신선한 장치인 것 같아요. 마치 몰래 남의 집을 훔쳐보는 느낌이랄까요?
이 안 제가 요리도,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아하니까 평소에 친구들도 많이 초대했거든요. 그런데 반복적인 경험이다 보니 친구들은 식상해서 점점 안 오기 시작한 거죠. 화약이 가득 쌓인 화약고인데 불꽃이 없달까? 그때 마침 ‘남의 집’이라는 불씨를 만나 화려하고 신나는 불꽃놀이가 시작된 거죠.
최경아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팡팡 터지는 불꽃놀이!
이 안 좋은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어요. 제가 만든 음식, 보이차, 그리고 사람들과의 하모니가 정말 완벽했어요. 수준 높은 대화를 하면서도 이렇게 재미있게 놀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너무 즐거웠어요. 그렇게 7년 정도 ‘남의 집’ 플랫폼을 통해 2,000명 이상이 이곳에서 차와 음식을 즐겼죠.
최경아 와, 2,000명이요? 어마어마하네요. 7년 동안 그럼 호스팅만 하신 거예요?
이 안 아니요. 이게 사실 플랫폼에 수수료도 떼어 줘야 하고, 이걸 전업으로 하기엔 힘든 상황이어서 주중에는 회사 나가고, 주말에만 했어요. 그러다 코로나 이후에는 호스팅을 전업으로 바꿨고요.
최경아 2,000명을 만났으면 정말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을 것 같아요. 그 이야기만 풀어도 2박 3일 걸리겠어요.
이 안 사실 그래서 그분들 이야기를 책으로 써보고 싶었는데요. 그런데 의외로 자기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는 것을 꺼리시더라고요. 차를 마시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좀 더 열리게 되는지 많은 분이 어디 가서도 못 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내셨어요. 그렇다 보니 암묵적으로 이 자리에서 한 이야기는 비밀이라는 약속 같은 게 생겼고, 그런 얘기를 세상에 내기는 힘들겠다 싶어 제 마음속에만 간직하기로 했죠.
최경아 이 공간이 대나무 숲 같은 곳이었네요, 그분들에게는.
이 안 맞아요. 그랬던 것 같아요.
최경아 그 많은 분 중에 특별히 작가님께 영향을 주거나 기억에 남는 분이 계실까요?
이 안 모든 분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제가 그분들 덕에 공부를 많이 했죠. 편견 없이 완전히 열린 채로 타인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상대방을 거울 삼아 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어요. 좋은 사람에겐 좋은 영향을 받았고, 좀 힘들었던 사람을 통해서는 저도 모르던 제 역량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쓸모없는 경험 없고, 쓸데없는 사람 없다는 옛말을 몸으로 체감하던 시간이었죠.
최경아 모든 순간이 깨달음을 준 소중한 배움의 시간이었네요.
이 안 호스트를 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거든요. 각각의 사람 모두가 작은 소우주니까 “우주가 스스로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와, 너무 신기해” 같은 말을 많이 했어요. 여러 우주가 만나 서로 연결되는 시간은 거의 기적 같은 느낌이었죠. 지금도 ‘남의 집’을 통해 만났던 분들과 몇 년째 차모임을 하고 있어요. 보물 같은 인연들을 얻은 셈이죠.
최경아 그분들은 왜 이 모임을 좋아하는 걸까요?
이 안 결이 같다고 할까요?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니 너무 잘 통하는 거죠.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곳,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이야기를 편히 하면서 맛있는 음식과 차를 마실 수 있는 곳, 나의 마음을 두고 갈 수 있는 곳이라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요.
최경아 차 중에서도 특히 보이차를 많이 마시고, 갖고 계신 것 같은데요. 보이차를 특별히 좋아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 안 보이차는 미생물 발효차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더 깊어지거든요.
최경아 그럼 성숙도에 따라 맛도 다르고, 가격도 다르겠네요. 위스키나 와인처럼.
이 안 맞아요. 보이차를 접할 때마다 사람 같다고 느끼는 이유가, 사람처럼 보이차도 성장을 하거든요. 10살이 안 된 차는 맛이 쌩쌩하고 떫고 기운이 거칠어요. 그런데 30~40년 되면 “아이고~ 선생님” 하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맛이 깊어지고 훌륭해지죠. 50살이 넘은 보이차는 거의 인간을 넘어 신선이 된 느낌? 50년 넘은 보이차는 삼키지 않아도 입 안에서 스르륵 흡수되어 사라지는 느낌이 들고, 몸 전체로 기운이 사르르 퍼지면서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감동적인 기분이 들어요.
최경아 와… 인간세계를 넘은 신선이 된 차는 어떤 맛과 기운을 갖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보관법도 중요하겠죠?
이 안 저는 보이차를 제 동거인이라 부르거든요? 살아있는 미생물이 발효를 시키는 차니까,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이면 이들에게도 좋아요. 저는 매년 새해 첫날 새벽에 꼭 치르는 리추얼이 있는데요. 저와 동갑인 보이차를 마셔요. 그러면서 ‘1년 동안 그 차는 이렇게 성숙해졌는데 나는 1년간 어떻게 지냈지?’ 생각하고 자아 성찰을 해요. 주로 반성하는 편이죠. (웃음)
최경아 보이차가 사람과 닮아서 매력적이라 유독 더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이 안 네, 그런 것도 있어요. 괴롭고 화가 나거나 아플 때 함께해 주는 유일한 친구죠. 저를 늘 평안하게 해주는.
최경아 좋네요. 말없이 내 얘기를 들어주고, 기운으로 응원해 주는 친구. 차는 그렇다 치고… 요리는 그럼 작가님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이 안 요리는 제게 일종의 창작 행위인 것 같아요. 어떤 레시피를 정해두고 하는 요리보다는 약간의 변주와 창작이 있는 즉흥 요리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최경아 예를 들면요?
이 안 며칠 전부터 자꾸 샌드위치가 눈에 밟히는 거예요. 드라마에서도, 유튜브에서도 자꾸 샌드위치가 나와서 ‘아, 조만간 샌드위치를 먹어야겠다’ 생각해서 캄파뉴 빵이랑 크림치즈를 일단 샀어요. 나머지 재료는 집에 있는 걸로 응용하려고요. 집에 바질이 있길래 거기에 일단 마늘이랑 크림치즈 넣고 스프레드를 만들어서 발랐죠. 그리고 냉장고를 보니 프로슈토가 있어서 넣었고요. 근데 부피감이 없으니 샌드위치가 허전한 거예요. 그래서 한참 전에 술안주로 사두었던 스모크 치즈를 두껍게 자른 후 고기처럼 오븐에 구우니 계란처럼 포슬포슬해지더라고요? 그걸 같이 넣어서 먹었답니다.
최경아 설명만 들었을 뿐인데 침이 고이네요. 정해진 레시피가 있는 게 아니니, 요리하는 순간에 엄청나게 몰입해서 생각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
이 안 네, 그게 마치 저에게는 명상과도 같아요. 그 순간 몰입해서 창의적인 요리를 만들었는데 결과가 맛있을 때 너무 좋아요.
최경아 모든 감각을 다 충족시켜 주는 그런 순간 같은 거군요.
이 안 글 쓰는 건 정말 괴롭잖아요. 작업의 결과물이 나오는 데도 오래 걸리고요. 요리는 순식간에 몰입하고 또 바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나와요. 물론 피드백도 바로바로 오고요. 그게 너무 짜릿해요.
최경아 호스팅을 하시면서 차회와 제철 미식회도 함께 하시잖아요. 오시는 분들과 무엇을 가장 나누고 싶나요?
이 안 제가 힘든 일을 겪으면서 차로 위로를 받은 것처럼, 누구든 말 못 할 일이 있는 분들에게 제가 내어 드리는 차와 요리가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해요.
최경아 드라마로 써도 될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셨는데요. 앞으로는 어떻게 나이 들고 싶으세요?
이 안 그 고민을 참 많이 하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예전에는 누군가를 나의 삶에 맞게 바꿔서 관계를 맺었다면, 이제는 그냥 그 사람 자체를 받아들이는 여유와 유연함이 생긴 것 같아요. 그런 사람으로 계속 나아가고 싶어요.
최경아 앞으로도 차회와 미식회를 하시며 다양한 분들을 맞이한다면 더 넓은 마음의 여유가 생기실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작가님의 인생에 빠질 수 없는 ‘요리’라는 창작 행위에서, 계란이라는 재료로는 주로 무얼 해 드시나요?
이 안 그날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만든 오믈렛을 해 먹습니다! 오믈렛 형태의 요리가 전 세계에 많잖아요. 에그 인 헬이라고 불리는 중동 요리인 샥슈카, 이탈리아의 프리타타 등. 오믈렛이라는 요리는 그 나라의 문화와 재료를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계란이 메인 재료이지만, 다른 재료들을 품어주면서 근사한 한 끼가 되는…. 그래서 저는 그날의 냉장고 재료들과 계란을 섞어 오믈렛을 합니다.
최경아 지금 말씀하신 대목이 딱 작가님의 삶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계란이 메인이지만 나머지 재료도 함께 돋보이는 맛있는 요리.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임을 하면서 그들의 이야기와 삶도 품어주고, 그들과 어울리며 나의 빛나는 온전한 삶을 사는 것이요.
이 안 그렇게 엮으니 재밌네요. 전 고정된 것이 싫어요. 본질은 변하지 않아도 다른 모습으로 늘 새롭게 살아 나가고 싶어요. 제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마음을 어루만지는 차와 몸이 즐거운 음식, 이들과 함께요.
2023.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