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 듣는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 》의 모토는 ‘좋은 걸 좋다고 말하기’이다. 지인이 이 방송을 듣고 나에게 추천한 이후로 이 모토가 나의 인생 가치관과 닿아 있어 빼먹지 않고 챙겨 듣고 있다. ‘좋은 것’이라는 것 자체가 주관적이지만, ‘좋은 것’을 할 때는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함께 즐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내가 즐겨 찾는 이 방송의 에피소드 7화에 언급된 매력적인 이야기가 있다. 서교동의 호프집 ‘호프마당’ 사장님의 인생 역정 이야기. 내가 사는 성남에서 서교동까지는 큰 숨 한 번 들이키고 가야 할 만큼 먼 거리이기 때문에 언젠가 그 근처에 간다면 꼭 한번 들르고 싶은 곳이었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합정동에서 모였던 날, 드디어 호프마당에 가게 되었다. 평일 저녁 조금은 한산했던 시간, 사장님께서 단정한 차림으로 우리를 맞아 주셨다. 호프집에서 일하는 분의 복장이라고 하기엔 다소 불편해 보일 정도로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구두까지 신고 계셨다. 여둘톡(《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 》의 줄임말)에서 이미 언급된 내용이라 알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놀랄 수밖에 없는 옷차림이었다. 호프집에서 일하기 좋은 복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주로 보던 종업원의 복장과는 확연히 달랐다. 본인의 일을 긴장감 있게 대하는 태도에 반한 나는 용기를 내어 사장님께 말을 걸었다.
“ 사장님, 저 여둘톡 듣고 일부러 찾아왔어요.”
“ 아, 그래요? 고마워요. 선생님 어디서 오셨는데요? 여둘톡 듣고 요즘 많이 찾아와요.”
한참 어린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시던 사장님은 우리 테이블 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으시곤, 여둘톡에 담긴 사장님의 인생 이야기를 두런두런 해 주셨다.
『Pop the Egg!』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가장 먼저 인터뷰하고 싶었던 사람이 바로 호프마당 사장님이었다. 그 술자리에서 갑작스레 들은 이야기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여둘톡에 담지 못한 사장님의 이야기를 더 듣고 잘 기록하여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 데에 조금 더 기여하고 싶었다.
인생을 살다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족에게도, 친한 친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고민과 걱정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내가 가끔 쓰는 방법은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 고민을 털어놓는 것이다. 이름도 신분도 말하지 않고 털어놓고 나면 조금은 후련하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상대가 해결책을 제시할 때도 있다. 호프마당 사장님은 그런 분이었다. 삶이 힘들 때 찾아가고 싶은 어른. 긍정적인 마인드와 심플한 사고로 나의 고민을 훌훌 해결해 주시고, 시원한 맥주 한 잔과 오징어와 감자채가 들어간 맛있는 김치전을 내주시는. 인터뷰를 위한 두 번째 만남에서 그녀는 한 상 가득 갓 만든 수육과 김장 김치를 차려 주셨다. 그 밥상만큼 삶의 여유가 넘치는 즐거운 인생을 사는 참어른을 만났다.
최경아 안녕하세요. 제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를 통해 알게 된 호프마당 사장님과 인터뷰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최정현 호프집 사장이기 전에 한 사회의 일원, 한 가정의 엄마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는 최정현입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기보다, 제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책임과 의무는 하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어요. 선생님이 즐겨 들으신다는 팟캐스트의 황선우 작가님이 쓰신 책 제목이기도 한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왜냐하면 최선을 다하면 대가를 바라게 되거든요. 하지만 책임과 의무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만 되는 일이요.
최경아 사장님께 그런 책임과 의무는 무엇인가요?
최정현 내가 태어난 이상, 내 상황을 탓하지 말고 어쨌든 잘 살도록 노력해야죠. 저는 다섯째로 태어났어요. 위로 언니 셋, 오빠 하나이고, 아래에는 여동생이 하나 더 있어요. 남아 선호 사상이 있던 때라 부모님은 제 위에 아들을 낳고 한 명 더 아들을 낳고 싶으셨다는데, 제가 태어났죠. 그리고 혹시나 해서 또 임신해서 낳으신 게 제 여동생이었고요. 막내 여동생과 저는 네 살 차이인데요. 형제가 많고 집안이 넉넉지 않았으니 막내 돌보는 건 자연스럽게 온전히 제 몫이 되었어요. 그래서 동생이 아프거나 울기라도 하면 제가 혼났어요. 그때는 부모도 아닌 내가 왜 동생을 돌봐야 하나 황당하기도 하고 억울했지만, 그게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 마음이 습관처럼 단단해져서 나에게 주어진 일이 있을 때 모든 상황에 늘 책임감 있게 잘 해내려고 했고요.
최경아 지금 생각하면 고작 네 살 차이 나는 언니가 아기를 돌봤다는 것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데요, 위로 형제가 많은데도 어쩌면 사장님에게서 동생을 잘 돌볼 것 같은 면모가 보여서 부모님께서 동생을 맡기신 게 아니었을까요?
최정현 무수리처럼 허드렛일은 주로 제가 맡아서 했죠. 그리고 책임감 있게 잘 해냈고요. 조선시대 최장수 임금인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도 무수리 출신이에요. 출신은 낮았지만 왕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죠. 이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이 변변치 않더라도 본인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다 보면 출세할 수 있잖아요. 저도 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내 상황에서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솔선수범해서 그냥 성실히 하자는 생각이요.
최경아 사장님 위로 언니 셋, 오빠 한 명이었는데 형제들은 전혀 도와주지 않았나요?
최정현 언니들하고는 나이 차이가 워낙 많이 났고, 오빠는 대학 가야 하니까 공부하느라 그럴 여력이 없었죠. 엄마가 공부 못 하게 제 책가방을 갖다 버린 적도 있어요.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빠뿐이었죠. 어린 마음에 그게 억울했는지, 뚝방 낭떠러지에 버려진 가방을 겁이 많았던 제가 어떻게 가져왔는지 모르겠지만 오기로 겨우 찾아서 집으로 가져왔어요.
최경아 와, 대단하시네요.
최정현 엄마가 그렇게까지 행동했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버려진 제 가방을 보고 말문이 막혀버렸어요. ‘실어증이 이래서 걸리는구나’ 할 정도로요. 그 이후로 말을 잘 안 했어요. 매를 맞아도 대들거나 울지도 않고 그냥 맞았어요.
최경아 어쩌면 그 가방 사건이 어린아이가 너무 일찍 성숙해 버린 계기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최정현 그럴지도요. 그래서 사실 제 어린 시절은 썩 유쾌하진 않았어요. 그래도 아무리 속상하거나 화가 나도 밥을 굶지는 않았어요. (웃음)
최경아 그렇죠. 다 잘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요. (웃음) 그럼, 결혼은 언제 하신 건가요?
최정현 그 당시 우리 집은 스무 살 넘으면 바로 시집 보내려는 분위기였어요. 그렇다 보니 언니들은 일찍 결혼했죠. 근데 사실 전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일반 사무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다니던 회사의 거래처 사장님이 시아버지가 되었죠. 저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제가 워낙 눈치도 빠르고 센스 있게 일을 하는 스타일인 데다가, 거래처 사장님이 아버지 또래셔서 제가 아버지한테 하듯 깍듯하게 했어요. 그러다 사장님이 나이가 드시고 아들이 와서 일을 이어받아서 했는데, 그 사람을 도와주다가 결혼하게 된 거죠. 시아버님이 절 많이 예뻐하셨어요. 남편이 아들만 셋인 집의 막내아들이었거든요. 시아버님이 절 유독 좋아하시기도 하셔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어요. 시댁이 잘살아서 그 당시에 진공청소기도 있었고, 차도 있어서 사는 데 어려움은 없었어요.
최경아 결혼 잘하셨네요.
최정현 네. 그런 셈이죠. 친정보다 훨씬 좋은 집에서 부족하지 않게 살았으니까요.
최경아 그러면 결혼하시고 나서는 직장생활을 안 하셨겠네요?
최정현 네. 안 하고 애들 키웠죠.
최경아 그럼 음식 장사를 하시게 된 계기가…?
최정현 IMF 때 직격탄을 맞았어요. 그래서 저도 일을 안 할 수 없었죠. 남편 회사도 부도가 나서 남편은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됐어요. 같이 살 수가 없어서 서류상 이혼을 하고, 제 이름으로 된 재산은 어떻게든 지키고 애들도 키워야 하니까, 살던 집을 제 이름으로 경매하고 전세금 받아서 작은 평수로 이사를 갔죠. 그러고는 일을 해야 하는데, ‘뭘 하지?’ 하는 고민이 들었죠.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요. 당시 갈빗집을 하는 친구가 있어서 먼저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해봤는데요. 할 일도 많고, 주방장이랑 사장님이랑 트러블도 있고, 손님들도 까다롭고…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 같은 교회 다니는 친구 소개로 보험 회사를 다녀봤는데, 그건 더 못 하겠더라고요. 성격상 누구한테 부탁하는 게 맞지 않아서….
최경아 조금 힘들더라도 혼자 일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겠네요.
최정현 맞아요. 애들 유치원 보내고 나면 시간이 있잖아요. 저는 워낙 배우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인지라 IMF 전에는 동사무소나 구청 같은 데서 여러 가지 수업을 들었거든요. 그때 조리사 자격증도 땄죠. 그래서 혼자서 음식 장사를 해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마침 지인이 연남동 쪽에 작은 자리가 하나 있는데 해보겠냐고 제안을 해서, 그렇게 시작하게 됐습니다.
최경아 워낙 센스가 좋으셔서 처음부터 손님이 많았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최정현 그 자리가 좋았던 게, 사람이 많이 안 다니는 거리였어요. 그래서 좋았죠. 왜냐면, 장사도 처음이고 혼자 하는데 사람이 많으면 너무 힘들 것 같았거든요. 애들도 신경 써야 하니까 이것만큼 자유롭고 편한 일이 없었어요. 그리고 다른 알바보다 수입도 좋았고요.
최경아 그때 자녀분들이 몇 살이었나요?
최정현 딸이 중학생이고 아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어요. 어느 정도 컸으니, 누나가 동생을 많이 돌봐줬죠. 제가 제 여동생한테 그랬던 것처럼. 우리 딸도 우스갯소리로 남동생보고 자기 아들이라고 해요. 지가 다 키웠다고. (웃음)
최경아 사장님의 책임감을 따님이 많이 닮으셨나 봅니다. 남매간의 우애도 돈독하겠네요.
최정현 네, 딸이 아직도 남동생을 많이 예뻐해요. 다행이죠.
최경아 오후부터 밤까지는 장사하시느라 바쁘셔서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못 보내셨을 텐데, 그때 일과가 어땠나요?
최정현 애들이 중고등학교 입학했을 때는 아침에 무조건 차로 데려다줬어요. 학교 가는 길 차 안에서 미리 만들어 놓은 아침 먹으면서 이야기 나누는 10분~15분이 참 소중했어요. 학교 보내고 저는 다시 집에 와서 좀 쉬다가 장 보고, 애들 밥 만들어 놓고, 오후 4시쯤 나와서 장사를 하고, 영업 끝나면 집에 들어갔죠.
최경아 엄마한테 엄청나게 고마워하겠어요. 자녀분들이.
최정현 그러니까 지금도 제가 큰소리치죠. (웃음) 지금도 돈 벌고 있으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엄마의 책임과 의무는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로서 책임감이 없었다면 이렇게 큰소리 못 치죠. 그러고 보면 저는 어릴 때부터 독립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제가 놀고 먹을 때 쓰는 돈은 알아서 버는 거고요. 친구들이 자식 걱정할 때도 그러지 말라고 충고해요. 아이는 아이의 인생이 있으니 너는 스스로 네가 행복한 일을 찾아서 하라고 하죠.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 원하는 것을 강요하는 게 잘못된 사고방식 같거든요.
최경아 혈연관계일 뿐,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서양식의 독립적인 마인드!
최정현 그 대신, 제가 철저하게 아이들한테 지키라고 했던 건 성실함이었어요. 그래서 두 아이 모두 결석 한 번 안 했어요. 아플 때도 제가 학교에 다 데려다줬거든요. (웃음)
최경아 사장님도 이 호프집을 개업한 이래로,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문을 닫은 날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연남동에 계시다가 서교동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되신 건가요?
최정현 연남동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는 바람에 다른 자리를 알아보다 여기로 오게 됐어요. 옮긴 지 10년이네요. 원래 호프집이었기 때문에 많이 고칠 필요도 없었고, 돈도 많이 안 들었어요.
최경아 호프마당이라는 호프집 이름이 특색 있어요. 직접 지으신 건가요?
최정현 연남동에서 처음 장사 시작할 때 받았던 가게 이름이 호프마당이었어요. 그걸 그대로 받아서 한 건데, 지나고 나니까 ‘마당’이라는 말이 참 좋더라고요.
최경아 워낙 성실히 사셔서 아는 분도 많고, 찾아와 주시는 분들도 많아서 ‘마당’이라는 단어가 사장님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최정현 그런가요?
최경아 네. ‘마당’의 사전적 의미 중에 “어떤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사장님의 삶은 늘 주체적이고 재밌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거든요. 잘 어울립니다. 그런 사장님에게 어떤 일을 이루실 때 꼭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최정현 글쎄요.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혹은 따르고 싶은 마음가짐을 옮겨 놓은 듯한 글이 있는데요. 피천득 작가의 <구원의 여상>입니다. 이 글이 너무 좋아서 메뉴판에도 써 놓고, 시간 날 때마다 계속 보기도 해요. 손님들한테도 읽도록 권유하기도 하고요.
최경아 그 수필 중 사장님을 연상시켰던 구절이 있었는데요. “그는 아름다우나 그 아름다움은 사람을 매혹하게 하지 아니하는 푸른 나무와 같습니다. 옷은 늘 단정히 입고 외투를 어깨에 걸치는 버릇이 있습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나 가난을 무서워하지 아니합니다.” 처음 제가 손님으로 호프마당에 왔을 때, 사장님께서 편한 신발을 신고 밖에서 통화를 하고 계셨는데요. 제가 가게로 들어가는 첫 손님이라는 것을 확인하시고는 얼른 구두로 갈아 신으시던 것을 봤어요. 오래 서서 일을 해야 하는 호프집의 특성상 구두를 신고 일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옷매무새, 심지어 신고 있는 신발까지도 신경을 쓰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최정현 혼자서 장사라는 것을 처음 하니까, 나름대로 규칙을 만들었어요. 옷을 단정하게 입자. 손님이 술을 권하더라도 절대 취하지 말자.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씨를 곱게 하자는 거예요.
최경아 혼자 호프집 운영하시다 보면 술 마시고 진상 짓 하는 손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럴 때는 어떻게 대처하세요?
최정현 대체로 두 부류의 진상으로 나뉩니다. 나를 좋아해서 진상 짓 하는 사람, 그냥 양아치처럼 진상 짓 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를 좋아하는 부류한테는 오히려 큰소리치면 돼요. ‘좋아하면 많이 팔아줄 수 있겠네?’ 하면서 돈 많이 내고 가라고 하고요. 양아치 진상한테는 오히려 더 잘해줘요. 그러면 그런 대접이 처음이니까 민망해하면서 당황해요. 저까지 말을 험하게 할 필요 없잖아요. 제가 말을 예쁘게 하면 상대도 보통은 그렇게 되더라고요.
최경아 현명한 방법입니다. 말씨를 곱게 하자는 사장님의 철칙이 잘 지켜지는 순간들이네요. 화나거나 싸울 수 있는 상황에서도 지혜롭게 피해 가는 방식이고요. 일하시면서도 당구, 우쿨렐레, 파크 골프 같은 많은 취미 활동도 하시는데요. 그것들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최정현 전 일상의 작은 행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큰 행복이 있으면 당연히 좋죠. 하지만 그것을 맛보면 작은 행복의 가치를 우습게 여길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우고, 맛있는 것을 나누는 이런 활동들이 너무 행복합니다. 제가 어려울 때 많은 분에게 도움을 받았어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여기 오는 사람들이나 제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고 있어요. 그것 또한 제 행복이에요.
최경아 사장님의 별명 ‘연남동 수봉 언니’는 어떻게 지어진 건가요?
최정현 제가 심수봉 씨 노래를 좋아하고, 잘하기도 하고요. 특히 <백만 송이 장미>를 참 좋아해요. 아까 말한 피천득 작가의 <구원의 여상>처럼, 이 노래의 가사처럼 살고 싶기도 해요.
최경아 그러고 보니 인상도 약간 닮으신 것 같기도 하고, 그 노래 가사와 사장님의 삶도 많이 닮았네요.
최정현 그 가사는 보험 회사 다닐 때 우연히 보고 너무 좋아서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거였는데요. 그러다 보니 언제 노래를 불러도 가사를 하나도 잊지 않고 부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고 싶다는 목표가 생기면 노력해야 하잖아요. 저에게는 그 예술 작품 두 개의 글귀가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메뉴판처럼 시도 때도 없이 볼 수 있는 곳에 써 놓고, 시간 될 때마다 계속 읽었어요. 그러다 보니 그 글귀와 비슷하게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최경아 오랜 시간 동안 성실하게 가게를 운영하시면서, 제대로 된 휴가도 못 가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최정현 2024년 7월에 우쿨렐레 공연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하와이에 일주일 동안 가요. 처음으로 긴 시간 동안 가게를 닫는 셈이네요.
최경아 그 공연을 계기로 자주 놀러 다니시면서 휴가를 보내시면 좋겠네요. 사장님의 소소한 행복의 삶을 늘 응원하겠습니다.
2023.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