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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gene Oct 24. 2024

재미를 좇는 시각 관찰자, 시각 실험자_최은철

미술 애호가들은 종종 작가의 완성된 작품이 걸린 전시장이 아니라 작가가 작업을 하고 있는, 다시 말해 창작 과정을 보길 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그들이 찾는 행사가 바로 ‘오픈 스튜디오’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을 위해 공기관이나 사기업에서 제공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를 필수적으로 진행한다. 나 역시 다른 예술가가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듣고, 무엇을 수집하며 작업하는지 궁금해하므로 누군가의 작업실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이 책을 기획하면서 같은 영역에 있는 사람을 한 명 정도는 싣고 싶었다. 다만 회화 작가가 아닌 사람으로. 내가 평면 예술을 하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다른 매체를 다루는 예술가의 작업을 더 흥미롭게 바라보는 편이다. 내가 잘할 수 없는 영역이라 존경심이 들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섭외한 최은철 작가님은 학교에서는 뵙지 못했지만 오랜 시간이 동안 각자 활동하다 만나게 된 선후배 사이이다. 그의 작업실에 처음 갔을 때, 많은 ‘과정’이 눈에 보여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한 가지가 밀도 있게 진행 되고 있는 작업실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주제를 연결하거나 분리해 이것저것 다른 재료로 실험, 혹은 요리하는 연구소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풍경은 작가님과 닮아 있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연구가 지속되고 있는 실험실에서 대화는 시작되었다.


최경아 안녕하세요. 작업실에 다양한 매체(재료)가 보여 흥미롭습니다.


최은철 저는 스스로를 시각 관찰자 혹은 시각 실험자라고 규정하고 있는데요. 작업실을 실험실처럼 쓰고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최경아 다양한 매체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실험실”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네요. 『Pop the Egg!』프로젝트는 다양한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계란이라는 식재료로부터 시작되었어요.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계란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대화집 프로젝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설탕’이라는 감미료로 예술 작품을 구현하는 작가님을 인터뷰이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먼저, 며칠 전 진행하신 <황야의 미식회>[1] 워크숍에 참여한 참여자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최은철 그 전에 제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저는 기후, 환경, 도시, 현대 사회에 대해 관심을 두고 이들이 어떻게 관계되어 작용하고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다양한 매체로 표현합니다. 그중 주재료는 앞서 말씀하셨던 ‘설탕’이고요.


최경아 지난주 <황야의 미식회> 워크숍에서 관람객들과 설탕으로 만든 유물을 망치로 깨서 먹는 행위를 진행하셨잖아요. 왠지 재밌는 후기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최은철 워크숍에 참여한 분들에게 “사물(유물=작가가 만든 예술 작품)에 도덕성이 있을까?”라고 물었던 게 기억에 남아요. 대부분이 ‘그렇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제 생각은 다르거든요. 사물 자체에 도덕성이 있기보단, 인간의 잣대에 의해 도덕성이 부여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이 워크숍이 제가 만들어 놓은 예술 작품(=사물)을 깨트리는 행위였기 때문에 각자의 기준이 만든 도덕성으로 인해 죄책감이 들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아요.


최경아 제가 느끼기엔 이 워크숍 자체가 그 심리를 실험하고자 한 것처럼 보이거든요. 참여자들이 예술가가 만들어 놓은 작품을 깨고 먹으면서 희열을 느낄까, 아니면 죄책감을 느낄까 하는 호기심이요.


최은철 ‘폭력성’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하는 게 적합할 것 같아요.


최경아 인간의 폭력성이요?


최은철 예를 들어, 다른 나라의 아름답고 고결한 문화재를 일부러 훼손하는 야만적인 행동, 특별한 이유 없이 술을 먹고 문화재에 방화를 하거나 낙서를 하는 그런 행동들이요. 유물과 같은 문화재가 훼손되고 복원되는 사이클이 《황야로 도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서, 워크숍에서 이걸 실험해 보고 싶었어요. 근데 그 폭력성과 관련된 질문을 하기도 전에 이미 참여자들이 워크숍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느낀 것 같아요. 도덕성을 거론하면서 부수는 행위를 주저했거든요.


최경아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만 보던 유물 형태를 만지거나 훼손하면 큰일 난다는 걸 우리는 아니까요. (웃음) 저라면 평소에 못 하던 걸 할 수 있으니 신나서 깼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나 봐요.


최은철 하라고 할 땐 안 하다가, 하지 말라고 할 땐 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청개구리 심보 같은 거요. 그 예로, 흰색 각설탕으로 전시 공간에 도시를 연출했던 <설탕 도시>라는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VIP 오프닝 행사에서 우연히 작품에 설치된 각설탕을 누가 집어 먹는 장면을 봤어요. 먹으라고 의도한 작품은 아니었거든요. 재료가 설탕이어서 당연히 ‘먹어도 되나?’ 하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자기가 이슈가 되고 싶어서 먹은 건가도 싶었죠. 사실 그때 받은 충격이 ‘아, 이제 먹을 수 있는 작품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봐야겠다’ 하고 생각한 계기가 됐어요.


최경아 각설탕으로 만들어진 도시 풍경이 있으면 저도 하나쯤은 무너뜨리고 싶은 욕망이 생길 것 같은데요? 어릴 때 누가 쌓아 놓은 도미노 보면 무너뜨리고 싶은 것처럼요. (웃음)


최은철 각설탕은 정육면체인 완벽한 형태의 설탕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먹고 싶을 수 있다고 생각은 해요. 그런데 ‘만약 설탕을 녹여서 작품을 만들어 놓았을 때도 사람들이 그걸 먹고 싶어 할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그 이후로 작품을 통해 미각 실험도 시작하게 된 거죠.


최경아 문화재가 훼손되고 복원되는 과정에 대한 호기심을 ‘설탕’이라는 매체로 표현한 것이 흥미로운데요. 그렇게 연결하게 된 계기나 이유가 있을까요?


최은철 숭례문이 화재로부터 복원되는 과정에 쓰인 아교와 분채, 자재 등이 기존의 것과는 다른 것이 사용됐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잘 모르죠. 완전히 똑같은 재료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개발된, 얼추 비슷한 것이 복원을 위해 쓰인 것이 흥미로웠어요. 저에게는 그 사이클이 마치 작가가 뜬구름 잡는 추상적인 아이디어에서 출발해서 견고한 형태가 있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과정처럼 느껴졌어요. 이 과정을 다시 관람객들에게 돌려서, 소멸시키거나 다른 형태로 파괴하게 한다면 재밌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황야의 미식회> 참여자의 마지막 행위는 설탕 유물을 먹고 혀에 남은 색소를 판화지에 찍는 거였어요. 작가가 입체 형태로 만들어 놓은 유물(작품)을 참여자가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과정을 2D로 재창작하는 방식의 작품인 거죠. 너무 어렵나요?


최경아 아니요. 일단, 문화재가 만들어지고 복원되는 과정을 작가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연결했다는 점이 굉장히 특이합니다. 또한, 관람자의 행위를 통해 재창작된 작품이 탄생한다는 게 생각할 여지를 주네요.


최은철 작가의 비가시적이고 추상적인 최초의 아이디어가 형상이 있는 작품으로 구현되고, 그것이 관람객의 먹고 찍는 행위로 인해 다시 추상적인 상태가 되는 그 사이클을 실험했다고 할 수 있어요.


최경아 몰상식하게 각설탕을 집어 먹은 관람객의 모습으로부터 이런 아이디어가 나오다니, 그분께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 되는 건 아닌가요? (웃음)


최은철 그러게요. 사실 그전에는 제 작업의 큰 테마 중 하나가 ‘환경’이다 보니 설탕이 흰 눈 같기도 해서, 그 시각적인 유사함 때문에 재료로 선택한 이유가 크거든요. 부서지기 쉽고, 녹기 쉬운 물성도 비슷하고.


최경아 그럼 언제부터 그럼 ‘설탕’을 작업의 주재료로 쓰신 건가요?


최은철 사실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어요. 2015년부터 각설탕을 쓰기 시작하면서 작업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해봤죠. 지금도 여전히 실험 중이고요.


최경아 아무래도 예민한 재료를 쓰다 보니, 재료 때문에 생긴 특별한 에피소드 같은 게 있을 것 같은데요?

최은철 설탕이라는 재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때인데요. 작업 환경에 대해 단순하게 건조만 잘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겨울에 전시가 있었는데 날씨가 추우니까 잘 만들어서 밖에 두면 녹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밖에 내놨거든요? 근데 녹은 거예요. 겨울에도 밖은 습하니까 녹아버린 거죠. 그때 알았어요. 설탕이 녹는 데 습도는 쥐약이라는 것을… 그래서 전시 오픈 한 시간 전에 겨우 다시 만들어서 설치했던 아찔한 기억이 있어요. (웃음)


최경아 으악! 전시 오픈 한 시간 전이라니… 엄청 쫓겼겠어요.


최은철 그래서 그 이후론 정확히 목표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무수히 실험해요. 예를 들면, 몇 도에 끓여야 설탕이 단단하게 굳고, 식용색소의 색이 그대로 유지되려면 어떻게 끓여야 하는지 등등이요. 아무래도 먹을 수 있는 재료로 예술 작업을 하다 보니, 요리와 비슷한 지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요리도 정해진 레시피가 아닌 창작 요리를 만들 때는 최고의 맛을 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실험들을 많이 하잖아요. 제 작업도 그런 것 같아요. 설탕이라는 재료로 최상의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무수한 실험이 필요한 거죠. 이젠 어느 정도는 알아냈는데, 여전히 계속 실험 중입니다.


최경아 작업실 안에 엄청 달콤한 냄새가 진동하겠어요.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처음에 말씀하셨던 “실험실”이라는 단어가 매우 적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은철 더 웃겼던 것은, 그 당시에는 한국에 작업실이 없어서 집에서 설탕을 끓이고 있었는데요. 퇴근하고 돌아오신 아버지가 “너 대체 뭐 하냐?”라고 타박을 많이 주셨어요. 그럴 만한 게, 그때 한 달 내내 설탕만 끓이고 있었거든요. 갖다 버린 설탕은 아마 1톤은 될 거예요. (웃음)


최경아 작가님 작업을 보면 예술 작품이라는 ‘사물’ 자체가 스스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제가 작가님 작업에서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지점인데요. 설탕이 때에 따라 녹기도 하고, 관람객의 참여에 따라 변하기도 하니까요. 그걸 보면서,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의 《The Artist is Present》라는 전시가 생각나기도 했어요. 예술 작품이 된 예술가가 전시 기간 동안 같은 곳에 앉아서 변해 가는 환경, 상황, 기분,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흥미로웠거든요. 근데 작가님의 설탕 작품을 보면 작품 스스로가 퍼포먼스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관람객으로 하여금 퍼포먼스를 하도록 유도하기도 해서 그 작품이 연상되었어요.


최은철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예술 작품은 관람객이 몸을 써서 작품을 향유하는 형태를갖잖아요. 그리고 그 몸의 움직임까지 포함된 것이 작품이고요. 제 작품을 대입해 보자면, 작은 움직임이지만 작품을 깨기 위해 몸을 쓰고, 설탕을 먹기 위해 혀를 쓰잖아요. 그리고 결국 그 행위에 의해 최초의 작품이 소멸하고요. 이 과정 자체가 예술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해요.


최경아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파괴되거나 소멸하는 것, 그리고 사람에 의해 믿게 되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요. 이유가 있을까요?


최은철 사실 작품에 사람이 등장하는 건 거의 없는데,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에는 관심이 많아요. 사람들이 사는 도시, 기후 같은 것들이요. 사람을 빼놓고는 할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게 너무 재밌는 게 많지 않나요? 여러 의미에서.


최경아 사람에 의한 이슈 중 최근 흥미롭게 생각하시는 건 뭔가요? 


최은철 얼마 전, 우연히 라디오를 듣다가 접한 사실인데요. ‘우생학’에 관한 내용이었어요. 음악가 하이든이 죽고 난 후, 그의 두개골이 분실되는 사건이 있었대요. 당시 골상학이 유행이었는데, 하이든과 친분이 있었던 요제프 칼 로젠바움(Joseph Carl Rosenbaum)과 공범 한 명이 사람을 써서 하이든의 무덤에서 그의 두개골을 가져오게 한 거예요. 연구 목적으로. 하이든의 가문에서 그의 두개골을 찾기 위해 애를 썼고, 결국 범인은 찾아냈는데, 로젠바움이 하이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두개골을 줬고, 결국 하이든의 두개골은 145년 동안 떠돌다가 돌아왔다고 해요.


최경아 왜 그렇게까지 한 거예요?


최은철 뇌가 정신 작용과 엄청난 상관관계가 있다고 믿어서, 골상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주로 범죄자나 천재의 뇌를 연구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천재였던 하이든의 두개골이 최고의 연구 재료였던 거죠.


최경아 소름 돋네요. 죽어서까지 뇌를 쓴 거나 다름없네요.


최은철 한 인간이 죽은 사람에게까지 한 짓을 보세요. 전 이런 게 흥미로워요. 어떤 사람의 뇌가 우월한지 연구하려고 도굴까지 한 거잖아요. 그들은 이를 ‘우생학’적 관점으로 접근한 건데, 그게 저한테는 굉장히 폭력적으로 느껴졌고요. 아무래도 작업에서 유물을 다루다 보니까, 이런 에피소드를 들으면 재밌어요. 이런 접근은 인문학뿐 아니라 의학이나 도덕적인 것과도 연결될 수 있어서, 다음에는 이런 것을 접목해 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최경아 결국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흥미라고 볼 수 있겠네요.


최은철 소멸하는 것들, 소멸하지 않는 것들. 이것들을 좀 더 집요하게 파보고 싶어요.


최경아 지금 작업하고 계시는 작업은 어떤 건가요?


최은철 12월부터 시작하는《생생화화》전시를 준비 중인데요. 백제 쌍단지를 모티브로 해서 유사유물을  만들고 있어요. 만든 후에 땅에 매장할 거예요.


최경아 땅에 매장…요?


최은철 웃기죠? 아시겠지만 예술가로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생각보다 없잖아요. 근데 백제 쌍단지가 유물 중에 5점밖에 출토되지 않은 좀 특이한 토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일차적으로는 이 희귀한 유물을 재현하는 건데, 만약 나중에 우연히 땅에 묻힌 이 작업이 발견된다면, 도시 재개발 현장에서 나온 유물에 대한 이야기처럼 작업이 이슈가 되고 무분별한 개발을 막을 뿐 아니라 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게 됐어요. 한 개는 땅에 묻고, 한 개는 설탕으로 제작해서 전시장에서 보여주려고 해요. 그리고 땅에 묻는 과정은 비디오로 찍고요.


최경아 그런 콘셉트라면 정말 땅을 깊게 파야 할 것 같은데요?


최은철 그렇죠. 포클레인 동원해서 묻어야 할 것 같아요.


최경아 그럼 전시 때 작가가 만든 유사유물은 어느 지역 어느 땅에 묻었다고 공표를 할 예정인가요?


최은철 네. 그래야 나중에 이슈가 되겠죠. 먼 미래에 정말 누군가가 발견한다면 이게 뭔지는 알아야 되잖아요. 진짜 백제 시대 쌍단지가 아니라는 건 알 테니까, 2023년 시각예술 작가가 만든 것이라는 걸 알아야 재밌는 쟁점을 만들 수 있으니…. 제가 제작한 백제 쌍단지 유사유물 작품이 지금 미술관에 소장되는 것보다 먼 훗날 발견됐을 때 더 경제적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작품이 제작된 후 소비되는 과정 같은 것에 관심이 많다 보니까, 그걸 좀 유머러스하게 나타낸 거죠.


최경아 인간의 도시 개발 욕망으로 인해 언젠가는 꼭 발견되길 바랍니다. 묻을 황무지는 어디로 생각하고 계시나요?


최은철 제가 도자기 작업을 경남 고성에서 할 예정이라, 고성의 황무지에 묻을 거예요. 고성이라는 장소가 공룡 발자국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연결되는 지점도 있는 것 같고요.


최경아 작업 아이디어 및 소재,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작업 매체(재료)가 다 연결이 잘 되어 있어서 기대됩니다.


최은철 근데 과연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효과적으로 잘 표현될지는 의문입니다. 그래도 기대해 주세요!


최경아 이제 좀 사적인 질문을 좀 해보고 싶은데요. 어릴 때 작가님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최은철 말이 많은 아이였어요. (웃음) 그때부터 하고 싶은 말이 많았나 봐요.


최경아 말이 많았다는 건,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는 징표 아닌가요?


최은철 아니죠. 산만했다는 거죠. 다른 생각 많이 하고, 그걸 친구와 공유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최경아 직업을 잘 선택했네요, 그러면.


최은철 그런 셈이죠.


최경아 누가 시킨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만 하고, 그리고 그걸 누군가 들어줬으면 좋겠고… 적극적으로 표현을 하고 싶은 아이였군요.


최은철 중학교 때 저희 반이 너무 시끄러운 반이었어요. 그래서 담임 선생님이 그날 가장 떠드는 학생을 투표하는 제도를 만들었어요. 그때는 체벌 제도가 있었으니까.


최경아 매일 맞으신 거 아닙니까? (웃음)


최은철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맞은 것 같아요.


최경아 그때 쌓인 내공으로 지금 이렇게 재밌고 맛있게 말씀을 잘하시는군요.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하신 것을 좀 찾아봤는데, 자신의 직업을 정의하실 때 ‘예술가’라는 표현보다는 ‘시각 연구자, 관찰자, 실험자’라고 표현하시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최은철 ‘예술가’라는 정의가 뭐랄까… 좀 진부한 것 같아요. 예전에 독일에서 교회에 다니던 때였는데요, 처음 오신 한국 아저씨가 있었어요. 그분께 제 소개를 하는데 “예술가”라고 했더니 픽, 웃는 거예요. 그게 그 당시 저에게는 상처였어요. 비예술인에게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소개하면 좀 거리를 두는 시선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최경아 맞아요. 세상이 많이 달라지긴 했어도 예술가를 여전히 다른 세상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죠.


최은철 특히 제 작업은 회화, 설치, 사진, 비디오까지 다양하니까 ‘메인 작업은 이겁니다’ 하고 말하기도 애매한 거죠. 근데 서양화 전공했다고 그림만 그리는 거 아니잖아요. 그렇게 한 분야로 정의해서 말한다는 게 저한테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요.


최경아 이런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신 게 언제부터였나요?


최은철 서양화과에서 사실 여러 가지를 배우잖아요. 그때부터 다양하게 작업하는 걸 좋아해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한번은 학교 복도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공예과 교수님이 “너는 공예 작업을 해야겠네.” 하신 게 기억이 나요.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전 회화를 제일 좋아해요. 기본은 페인팅이잖아요.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게 또 그림이기도 하고요. 누군가는 조소가 어렵다고 하는데,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조소는 어떻게든 만들면 3차원으로 표현이 되긴 해요. 페인팅은 그렇지 않아요. 캔버스 화면 안에서 공간을 만든다든가, 어떤 서사를 만든다든가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미술 비평하시는 선생님들도 회화를 어려워하는 게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저 역시 회화 하는 분들을 존경하고요.


최경아 모든 예술 매체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회화라는 매체는 특히나 시적인 부분이 많아서 해석의 가능성이 더 열려 있는 것 같아요.


최은철 그만큼 매력이 있으니까 현존하는 예술 장르 중에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지 않을까요?


최경아 다양한 매체를 다루시다 보면 간혹 ‘어라? 이게 최은철 작가 작품이야? 좀 다르네’ 같은 말을 하는 분들은 없나요?


최은철 많았어요. 예전에는 그런 반응을 일부러 즐겼어요. 제한적인 재료를 한결같이 쓰다 보면 제 안에 갇힐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다양한 재료를 쓰면 폭넓은 주제를 다룰 수 있고, 또 그걸 보여줄 기회가 많아지죠. 그리고 이전 전시에서 본 최은철 작품을 기대하고 왔는데 다른 매체로 표현한 제 작업을 보면 재밌어 할 거라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제가 한 가지를 깊게 연구하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죠.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여러 가지로 실험을 해 보고, 언젠가는 정리하면서 살아남은 주제와 매체를 더 발전시키는 시기도 있을 겁니다. 제 성향이나 커리어를 생각하면 한 가지에만 매달리는 게 지금으로선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최경아 저 역시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인터뷰도 하고 있고요.


최은철 피카소도 그림만 그린 거 아니잖아요. (웃음)


최경아 그러니까요. 한 살이라도 젊고 머리 잘 돌아갈 때 다양한 실험을 해보고 스펙트럼을 넓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페인터라는 중심이 흔들리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들 때도 많아요.


최은철 아, 그래요? 저는 그런 고민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최경아 전 그게 신기한 거예요. 이렇게 다양하게 작업을 하면 그런 고민을 해볼 법도 한데 말이죠. 자기 중심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게 자리 잡힌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달까요?


최은철 그냥 전 재밌는 거 하고 싶은 거예요. 질리는 작업은 하고 싶지 않거든요. 여러가지에 관심이 많다 보니 계속 배우고 싶고, 또 그걸 표현하고 싶은 거죠.


최경아 그러면 다시 이 인터뷰 프로젝트의 제목으로 돌아와서, 계란은 다양하게 요리할수 있는 녀석이잖아요. 계란으로는 주로 어떤 요리를 해서 드세요?


최은철 계란이 부푸는 성질이 있어서 베이킹 할 때 많이 사용하잖아요. 부풀어 오르는 그 부피감 때문에 먹고 나면 배불리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독일에서 공부할 때 학생 신분으로 가성비 좋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계란찜을 자주 먹었던 기억이 나요.


최경아 노동 대비 풍족한 결과물을 만들어주는 요리죠, 계란찜.


최은철 네. 맞아요. 그래서 계란프라이보다는 계란찜을 많이 해 먹었어요.


최경아 유학생의 시간과 포만감을 책임져 주는 역할을 했네요. 유학 시절을 포함해서 독일에서 오랜 시간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타국에서 살아보니 어떠셨나요? 스스로 느낄 만큼 변한 모습이 있나요?


최은철 아무래도 낯선 땅에 혼자 있다 보니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독립적인 성향이 많이 강해졌죠. 게으름도 없어졌고요. 게으르면 타국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한국에서는 익숙하게 만나는 사람들, 함께 사는 가족이 있으니, 누군가에게 의존하려는 모습이 있었어요. 웃긴 건, 한국으로 되돌아온 지금, 한국 환경에 다시 익숙해져서 의존형 인간이 된 것 같다는 거예요. 


최경아 환경에 따라 많이 달라지죠.


최은철 네. 저는 왔다 갔다 하더라고요. 최근에 혼자 전주 여행을 했는데요. 그 시간이 너무 행복했어요. 그런 환경과 시간이 너무 오랜만이었거든요. 


최경아 독립적인 시간과 환경이 필요했던 거군요. 


최은철 네. 어쩌면 이게 저의 문제점인데요. 한국에는 주변에 친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 의존할 때가 많아요. 의식적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최경아 주변 사람과 환경에 의해 변하는 건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최은철 저를 포함해서 사람은 일관성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면 상대에게 맞는 캐릭터로서 대하잖아요.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은 늘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게 아닌 거죠. 지금도 작가님의 캐릭터에 맞춰서 응대하는 ‘어떤’ 최은철이거든요. (웃음)


최경아 마치 계란 같은 존재시군요…?! 원본은 하나지만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그런데 ‘일관성이 없다’는 말이 다소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데요.


최은철 부정적이라기보다는 재밌는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지 않나요? 일종의 사회성인 거죠. 혼자 있을 때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가 다른 것처럼.


최경아 그렇다면 언제, 누구와 함께 있을 때의 최은철이 가장 마음에 드시나요?


최은철 음…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요. 상황으로 대답을 하자면, 유쾌한 상황일 때가 제일 좋아요. 유머가 있는 상황? 그럴 때가 행복해요.


최경아 ‘재밌는’ 것을 좇는 사람이라는 것, 이건 일관적인데요?


최은철  그렇네요. 작업도, 사람도, 상황도 재밌는 걸 좋아하니까요.


최경아 마지막으로, 좋은 작가(예술가)란 무엇일까요? 


최은철 독일 교수님으로부터 작가가 가져야 할 태도 같은 것을 배웠는데요. 성실하게 자기 작업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는 자세가 인상적이었어요. 교수라는 직업을 가졌으면 자기 작업에는 사실 좀 해이해질 수도 있는데, 매일 몇 시간씩 쪼개서 자기 작업에 몰두하셨어요. 일종의 작가로서의 자기 관리인 거죠.


최경아 교수님이기 전에 직업으로서의 예술가이시네요. 매일매일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저 역시 그런 성실함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같은 예술가들에게는요.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어떤 규칙을 정해놓지 않으면 백수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작업실에서 딴짓을 하더라도 일단 출근은 해야 한다는 의지 혹은 마음이요.


최은철 작업을 한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당연하게 매일매일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는 시간을 충분히 쓰는 그 태도를 저 역시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최경아  그런 시간 속에서 앞으로도 재밌는 작업 많이 해주시길 바라고 응원하겠습니다.


2023.10.9.


  


[1] 최은철 작가의 개인전 《황야로 도주》,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2023) 연계 워크숍으로, 12명의 참여자와 함께 작가가 설탕으로 재현한 유물을 부숴 먹는 퍼포먼스이다. 참여자들의 행위는 끝없이 반복되는 문명의 성장과 몰락, 예술품을 포함한 유물의 반복되는 유통, 소비 과정을 비유하고 있다. 홍수처럼 마르지 않는 물질문명 세계 속에서 잠시나마 비물질의 태초의 세계, 황야를 떠올릴 시간을 갖는 워크숍이다.

(출처: http://artmoment.org/portfolio-items/education_2023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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