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에 맞지 않은 옷이어도 괜찮아

작가 M, 31세

by Eugene



조상님들은 어찌 그리 정확하신지, 가끔 달력에 표시된 24절기를 보면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백로(白露-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기)가 지나고 나니, 완연한 가을이 찾아왔다.


요즘은 침실의 베란다 창문을 열고 자면 추워서 자다가 깨기 일쑤다. 귀뚜라미 소리가 듣기 좋아서 ASMR 삼아 열어 두고 자다가, 쌀쌀한 공기에 가끔은 코가 시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창문을 닫는다. 얼마 전엔 동계 이불로 교체하면서 애인과의 이별을 대신해 줄 포근한 이불의 맛에 위로받기도 했다.


의식주(衣食住) 중, 주(住)를 제외하면 다양한 의(衣)와 식(食)이 필요한 나라가 좋다. 즉,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서 사는 것이 제철의 옷과 음식이 있어서 돈이 많이 들어간다고 해도 포기 못 하겠다. 봄과 가을은 후드나 맨투맨 티에 머플러를 무심하게 둘러 입고 싶어 기다려지고, 여름은 시크한 점프 수트를 입고 싶어 기다려진다. 그리고 겨울은 멋있는 부츠를 신고 싶어 기다려지기도 한다. (나의 경우엔 사실 옷보다 제철 신발을 신는 재미에 바뀌는 계절을 기다리곤 한다)



여름뿐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평생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취미나 음식, 듣는 음악까지도 한정적일 것 같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하는 스포츠나 취미, 듣고 싶은 음악이 분명 존재하니까. 실제로 뉴욕에 있을 때, 태국에서 유학 왔던 친구가 처음 입어보았던 겨울옷의 맛에 헤어나오지 못해 그 옷들을 태국까지 들고 가는 경우를 보기도 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응용력도 좋아서 코로나가 덮친 2020년의 계절을 제철 마스크로 표현하기도 했다. 주로 황사가 불어오는 봄에만 쓰던 마스크를 여름용 인견 마스크로 만들기도 하고, 면에 다양한 패턴으로 계절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계절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유연성이란.


언제 외투를 꺼내 입어야 할지 고민되는 여름과 가을의 애매한 그 중간의 계절일 때, 외출한 사람들의 아웃핏을 눈여겨본다. 10명 중 5명 이상이 외투를 걸치거나 스카프를 했다면, 조금 두껍게 입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신호이다. 그럴 때, 나는 카디건을 걸치거나, 스카프를 두른다. 마치 영화에서 행인 1 역할을 맡은 경우, 모두가 외투를 입고 돌아다니는데, 민소매 원피스를 입어서 튀어 보이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랄까.


‘저 사람은 빨리 가을이 오기를 바라고 있구나.’

‘저 사람은 여름이 가지 않기를 원하네.’


이처럼, 계절이 바뀌려고 하는 애매한 순간에 사람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2018년 6월 중순쯤, 완연한 여름 이라기엔 밤공기가 조금은 선선했던, 애매한 계절에 그를 처음 보았다. 그 사람은 마치 봄을 놔주기 싫은 듯한 복장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저 더워 보이는 소재의 바지와 재킷이라. 아직 봄인 줄 알고 나왔나? 게다가 저 검정색 서류 가방은 뭘까.’


전시 오프닝 행사에 참여하기 위한 격식 차린 복장이라 해도 내 눈엔 그날의 날씨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아주 튀는 행인 1을 본 기분이었다.


지인의 개인전에서 처음 만난 그와 어쩌다 알코올이 동반된 저녁 식사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물론 지인도 함께. (놀랍게도) 그는 나보다 여러 살 어린, 심지어 90년대생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지인의 후배이자 학생이었다고 했다. 90년대생은 대부분 학생과 선생 사이로 만난 게 다였기에, 그는 나에게 사석에서 처음 말을 섞은 90년대생이었다. 그는 내 지인과 같은 광고홍보학과를 나왔지만, 지금은 글을 쓰는 작가라고 했다. 어쩌다가 글을 쓰게 되었는지, 그 어린 나이에 좋은 직장을 때려 치고 왜 나왔는지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말을 하는 동안 그의 눈은 뜨거웠고, 반짝이고 있었다. 며칠 동안 눈에 아른거릴 정도로. 30년 이상 살아오면서 만난 90년대생 중 이런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감동적인 눈빛을 만난 것이다.


그 이후로 그가 궁금해서, 아니 정확히는 그의 눈빛이 궁금해서 그가 쓴 글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난 느닷없이 그동안 미뤄왔던 글짓기 수업이 듣고 싶어졌고, 반짝이던 눈을 가진 그의 수업을 신청하였다. 이제는 나의 지인과 그의 관계보다 내가 그와 더 자주 (온라인에서) 만나는 관계로 발전하였다. 그는 바로, 나를 에세이의 길로 눈빛 하나로 인도해 준, 독립출판계의 아이돌, OO 작가님이다.


제철 옷을 깜박한 듯한 아웃핏과 소품이 처음 시선을 멈추게 했고, 식사 자리에서 빛나던 그의 눈빛에 매료되어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꾸준히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의 강한 매력을 누군가에게 한 방에 보여줄 수 있다면, 철에 딱 맞는 옷을 입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적어도 그와 같이 잊을 수 없는 눈빛을 가진 사람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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