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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단 Nathan 조형권 Sep 14. 2020

우리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없다

나를 바르게 하고, 나의 에너지는 좋은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자 

 子曰 :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자왈 : 불여향인지선자호지 기불선자오지 
 공자가 대답했다. “가장 좋은 사람은 고을 사람 중 좋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나쁜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늘 인기가 많은 사람들을 좋아하면서 부러워한다. 그만큼 그나 그녀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만약 나의 상사, 동료 또는 후배인 경우는 어떨까? 상사는 내가 선택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와 함께 일하거나 또는 일을 시켜야 할 때 능력이 있고 인품이 훌륭한 사람과 같이 일한다면 정말 좋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막연하게 인기투표를 따를 것인가? 


 이럴 때는 아무래도 주변에 의견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저 사람은 어떤가요?” “일은 잘하나요? 성품은 어떤가요?” 이렇게 여기저기 의견을 듣고,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결정을 내린다. 확률은 50대 50이다. 생각보다 뛰어난 사람일 수 있고, 반대로 아닌 경우도 많다. 

 이럴 때 공자가 제안한 방법이다. 

 “어느 날 자공이 이렇게 물었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아직 부족하다.’ 
 다시 자공이 ‘고을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때 공자는 명쾌하게 답을 제시했다. “가장 좋은 사람은 고을 사람 중 좋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나쁜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다.”라고. 즉 ‘인’과 ‘덕’을 갖춘 사람이라면, 선한 사람들은 당연히 환호할 것이고, 악한 사람들은 그를 험담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관리가 한 고장의 수령이면, 백성들은 안전하고 공정한 사회라고 태평성대를 외칠 것이다. 반면 부도덕한 사람들은 이 관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러한 악한 사람들은 교묘한 유언비어를 퍼트려서 청백리를 조정에 모함한다. 자신의 악함을 감추기 위해서 다른 관리에게는 겉으로 자상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으로 위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판단을 하는 입장에서는 헷갈린다.

출처 : Pixabay

 “방귀 뀐 놈이 성낸다” 


 악한 사람들이 제일 잘하는 방법이다.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을 모함하는 경우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잘했고, 못했는지 잘잘못을 따지기가 힘들다. 법정에서 ‘증거’가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를 법정 증거주의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증거도 교묘하게 조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다시 우리의 생활로 돌아와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인기인이 되고 싶은가? 아니면 미움을 받더라도 나의 소신을 지키고 싶은가? 아니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상관없는가? 


 사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들에게서 인기를 얻을 수 없다. 분명히 어딘가에는 나를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다. 억울하게 모함을 받을 때도 있다. 그래서 ‘포퓰리즘’을 사용해서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고 말도 안 되는 말과 행동들을 남발하는 것은 나에게 오히려 부담을 주는 행위다. 마케팅에서 흔히 타깃 고객을 선정하는 것처럼 우리도 타깃 대상 위주로 상대해야 한다.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나의 행동이 ‘인’과 ‘예’의 원칙에 입각하는가이다. 공자가 수제자 안연에게 말한 것처럼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며, 말하지 말고, 행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나의 마음과 행동이 떳떳하다면 누군가 나를 중상모략 해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출처 : Pixabay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다.”


 사랑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더라도 미움을 피할 수 없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뜬금없이 모함을 받았다.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하고,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딘가에는 나로 인해서 피해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이해관계에서부터 시작해서 아주 사소한 질투까지 다양했다. 당시에 나는 충격을 받았고, 사람에 대한 배신감을 크게 느꼈다. 그렇다고 그것을 갖고 잘잘못을 따지기에는 내가 너무 초라해 보였다. 그렇게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니, 주변 사람들은 잘못된 소문을 믿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오히려 나에게 와서 이러한 거짓이 있다고 알려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잘못된 것은 주위에 소명하면서, 묵묵히 내가 믿는 가치를 지키며,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진흙탕 싸움이 체질에 맞지는 않았다. 그렇게 교묘하게 사람을 골탕 먹이는 데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다행인 것은 그래도 여전히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현재까지 경험상 약 20% 정도는 나를 헐뜯고 비방하고, 60%는 나를 지지하고, 20%는 관심이 없다. 


  단지 20%의 사람들 때문에 나의 에너지를 그곳에 쏟아부을 필요는 없다. 먼저 나 자신을 바르게 하고, 내가 믿는 가치를 향해서 나아가면 된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무시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 에너지를 쓰는 것보다 좋은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더 쏟는 편이 낫다. 악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이 너무 커지거나 법적인 문제가 되기 전까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냥 그런 사람들이다. 수많은 악플러들도 마찬가지다. 법적인 다툼이 될 때까지는 어둠 속에 숨어서 자신의 손가락에 의지한다. 


 앞서 언급한 좋은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것도 이와 같다. 먼저 나 자신이 바른 길을 가야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정당한 충고를 해 줄 수 있다. 주변에 파리밖에 없다면, 그중에 누가 선과 악을 판단해 줄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인’과 ‘예’를 지키면서, 나의 소중한 에너지는 좋은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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