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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단 Nathan 조형권 Jan 31. 2021

용서

 사는 날이 길어질수록 기억과 경험은 늘어난다. 삶의 지혜도 점차 쌓인다. 반면 안 좋은 기억도 같이 비례해서 늘어난다. 스무 살, 서른 살, 시간이 지나면서 성공의 기억과 실패의 기억이 늘 함께한다. 그런데, 안 좋은 기억은 어느 순간 ‘훅’하고 나에게 들어온다. 그리고 나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재잘거린다.

 ‘그때는 왜 그랬지? 왜 그렇게 바보같이 행동했을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화창한 날씨와 기분 좋은 하루는 이러한 재잘거림으로 순식간에 엉망이 된다. 온갖 후회와 참회로 점철된다. 술을 마시면 더욱 그럴 때가 있다. 처음에는 기분 좋게 음주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나를 마신다. 그러면서 점점 예전의 안 좋은 습관으로 돌아가면서 후회를 하고 나를 원망한다.


 한 마디로 술이 ‘자기 원망’에 대한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다. 누군가에는 폭음이 아니라 폭식, 거식증 등이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살면서 실수를 하고,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예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점점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한다. 우리에게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도 지난 5년간의 일기를 읽어보면, 글 안에서 후회와 반성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독서를 하고, 명상을 하고, 글을 쓰면서 삶의 목표와 가치가 점차 뚜렷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후회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감사의 마음이 이전보다 더 많이 늘어났다.


 마흔이 된 후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용서’다.


 일반적으로 용서는 남을 용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제일 먼저 용서를 할 사람, 용서를 받을 사람은 바로 ‘나’다. 나를 용서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를 미워하고, 싫어한다면 아무리 외형적인 성공을 갖춘다고 해도 성공할 수 없다. 결국 자기 파멸의 길로 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


 나의 잘못과 원망을 바라보고, 지금의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미 수많은 자기 계발서에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모든 행복의 근본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계적인 영적 스승인 루이스 헤이는 ‘미러 워크’를 통해서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강조한다.


 “나는 나 자신을 있을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들인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나를 지지하고, 믿고, 받아들인다.” - 루이스 헤이, 《하루 한 장, 마음 챙김》중에서


 이렇게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훈련하고 연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후회와 미움의 감정보다는 보다 충만한 느낌과 생각이 가득함을 느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감사한 마음이 든다.


 물론 노력이 필요하다. 하루에 거울을 보면서 백번 이상 나를 사랑한다고, 감사한다고 이야기를 한다든지, 감사 일기를 매일 쓴다든지,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쉽지는 않지만 습관이 되면 나의 생각과 느낌이 조금씩 바뀐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이 부분은 결코 쉽지 않다. 사실 우리는 ‘관계’의 동물이다. 우리나 타인이 저지른 잘못과 실수는 결국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말이나 행동을 실수할 수 있고, 반대로 우리는 상대방에게 상처 받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용서하는 것처럼 ‘남’도 용서할 수 있겠는가 라는 점이다.


 성철 스님은 용서라는 것이 애초부터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서’의 존재를 부정했다. 오직 자신의 ‘참회’만이 필요할 뿐이라고 하셨다.


 “용서’란 내가 잘하고, 남이 잘못했다는 것인데 모든 문제의 책임은 결국 ‘나’한테 있는 것이다.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참회’해야지 그를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아는 ‘용서‘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 성철 스님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속아서 금전적인 손실을 입었다면 어떨까? 그것이 친한 친구라면 어떤가? 당연히 친구를 원망하고, 관계가 끊길 수도 있다. 하지만 스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애초에 돈을 빌려준 것은 나이기 때문에 친구가 100% 잘못했다고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돈을 갚지 않는 친구를 사귄 것도 나의 선택이니 말이다. 친구와 관계를 끊더라도 용서하는 것이 나의 마음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서 필요하다.


 결국 누군가를 온전히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남아프리카의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가 말한 것처럼 “용서하되 잊지 말자”를 명심해야 한다.


 지금도 가끔씩 상대방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린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을 원망할수록 나의 마음은 더 각박해졌다. “그 사람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늘 원망의 말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 원인은 나에게 있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기는 했지만 상대방이 질투와 시기를 하게 만든 것도 나였다. 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한 것도 나였다. 과연 나는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을 정도로 문제가 없었는가라는 스스로 질문을 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용서는 결코 쉽지 않다. 내가 루이스 헤이, 성철 스님 등과 같이 오랜 기간 동안 마음과 도를 닦지 않았다면 더욱 힘들다. 하지만 이 분들도 젊은 시절 좌충우돌의 삶을 살고,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고민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관계’를 통해서 겪는 피해의 정도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심각한 것까지 아주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용서하세요 라는 말은 결코 쉽지 않다. 이렇게 글을 쓰는 나조차도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복잡한 감정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흔을 지나고, 오십을 바라보고, 또 주위의 갑작스러운 죽음들을 바라보면서, 나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미워하고, 혐오하는 마음을 갖고 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마음을 바라보고, 한 번 생각해 보자. 먼저 나를 용서할 수 있는가? 상대방의 잘못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인가? 용서를 한다면, 또는 용서를 하지 않는다면 나의 마음과 삶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답은 나 스스로 찾아야 한다. 마흔은 인생의 절반(여든까지 건강하게 산다면)에 해당하는 나이다.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나아가기 위한 나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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