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레 Apr 24. 2023

마나롤라의 할아버지

06. Manarola

  친퀘테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마나롤라(Manarola)다. 전날 트레일에서 만난 바 직원에게 수영하기 좋은 곳을 알려 달라고 했더니 추천해 준 곳도 이곳이었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여유롭게 햇볕을 쬘 생각으로 옷 안에 수영복을 갖춰 입고 비치타월을 챙겨 갔다. 도착해 보니 색색깔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아래로 깎아지른 절벽과 수면 위로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그 아래 영롱한 푸른빛의 깊은 바닷물이 가장 친퀘테레다운 풍경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도 가장 많아서 자리를 찾으려 바다사자처럼 빽빽하게 붙어 누운 사람들 틈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어 끄트머리까지 가야 했다. 그런데 마침 운이 좋게도 바위 뒤편에 있던 사람들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어서 잠시 기다렸다가 그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여서 옷과 마스크를 벗고 수영복 차림으로 마음 편히 일광욕을 즐겼다.


  남편은 그해 첫 수영을 개시했다. 힘차게 뛰어들었지만 물이 너무 차가워서 버티지 못하고 금방 나왔다. 물에 뛰어든 순간 경악하는 남편의 표정이 정말 볼 만했다. 리구리아 주의 바다는 차갑기로 유명한 데다 아직 5월이었으니. 그런데도 10대 후반, 20대로 보이는 몇몇은 추운 기색도 없이 수영을 하고 바위 위로 올라가 다이빙도 하면서 거침없이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현지 아이들로 보이는 몇 명을 제외하면 거의 다 외국 사람이었는데, 국적은 다 달라도 젊음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의 젊음을 부러워하다 문득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활기 넘치던 때가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던 것 같다. 십대에도 이십대에도 나에게는 저런 에너지가 없었다. 나는 늘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주어진 삶을 그저 견뎌왔을 뿐이었다. 어렸을 때 좀 더 과감하고 신나게 즐겨 볼걸 하는 아쉬움은 늘 있었지만 예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내가 같은 나인 한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내가 이토록 무모한 일을 저지르다니, 새삼 놀랍고 신기했다. 그저 나중에 이 여행의 끝에 선 나는 지금과는 어딘가 다른 사람이기를, 푸른 바다가 눈앞에 있을 때 망설임 없이 풍덩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면서, 맑고 푸른 물빛이 수없이 겹쳐 만들어진 투명하면서 동시에 짙푸른 바닷물을 들여다봤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물에, 여전히 소심했던 나는 발만 살짝 담가 봤다. 머리끝이 찌릿할 정도로 차가웠다.


  두 시간 정도 느긋하게 햇볕을 쬐며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고 이제 슬슬 일어날까 싶던 차에 마침 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있어 자리를 내주고 일어났다. 그곳을 벗어나 바닷가를 따라 오르막길로 이어지는 짧은 산책로를 걷다가 높은 절벽 위에 다다랐을 때였다. 눈앞에 펼쳐진 탁 트인 전망을 감상하다가 저 먼 바다에서 빨간 점을 하나 발견했다. 처음에는 부표 같은 게 떠 있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사람이었다. 망망대해에서 별다른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 배도 보이지 않는데 어디에서부터 헤엄쳐 오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고, 훈련 중인 수영 선수인가 대단하다 싶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을 헤엄쳐 이윽고 뭍에 도달한 사람은 세상에, 일흔은 족히 넘어 보이는 자그마한 몸집의 할아버지였다. 물에서 나오는 동시에 허리가 힘없이 굽어지고, 수모를 벗자 하얗게 센 머리가 햇빛에 반짝였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물에서 나온 할아버지는 평범한 노인이 되어 천천히 마을 방향으로 멀어져 갔다. 그 모습에서 조금 전까지의 모습은 흔적도 찾을 수 없어서 더 놀라웠다. 경이로움에 한참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이 시리게 푸르고 깊고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그분이 이곳의 깊고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어 보냈을 시간들의 오랜 축적을 생각했다. 매일 반복해 몸에 새긴, 무자비한 세월도 빼앗지 못한 무언가를.


  내가 노인이 됐을 때 나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그날 마나롤라를 떠나며 내내 마음에 떠올랐던 질문이다.



이전 06화 고생을 해야 진짜 여행이라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