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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무으야우 Jan 11. 2024

유전자의 힘

축복이거나 저주이거나

유전자의 힘에 대해서 실감할 때는 현재 딱 두 가지 정도인 것 같다. 유전자의 축복이거나 유전자의 저주인 거나. 인간은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이라는 말을 귀에 닳을 정도로 들었지만, 어떤 상호작용의 결과들은 환경보다 유전의 힘이 크게 지배한다. 조금은 위험한 발언으로 해석될지는 모르나 나는 유전의 힘이 더 크다고 믿는 사람이다. 환경은 매번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리는 초심자가 애쓰는 것이라 생각이 들지만, 유전자의 힘은 전혀 애쓰지 않고 능수능란한 경력자의 힘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유전자의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면, 유전자의 축복이라 단번에 깨닫는 건 역시나 외모인 것 같다. 연예인들의 빼어난 미모는 결국 어디서 저 외모가 왔을까 궁금하게 된다. 그 뿌리가 어딘지 찾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뿌리가 결국 유전에 의한 것일 때 더 환호하는 분위기다. 그저 유전자의 승리를 다 같이 기뻐함과 동시에 본인 외모의 주관적(혹은 객관적) 부족함은 어쩔 수 없었다며 안도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덧붙여 유전의 빛나는 산물들은 외모뿐만 아니라 건강과도 연결 지을 수 있다. 작년에 한 금융서비스에서 무료로 유전자 체취를 통해 건강을 예측하는 검사를 하는 것이 인기였는데,  상대적으로 남들보다 악력이 뛰어나다든지, 불면증에 강하다든지 등의 여러 신체건강 지표들을 그저 유전자만으로도 예측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일 테다. (물론 예측에서 무조건 100퍼센트는 없다.) 이렇듯 보이는 것 외에도 우리가 단번에 바로 알 수는 없지만 유전자는 생각보다 우리가 가진 능력들을 크게 좌지우지하고 있다. 건강한 신체에서 파생되는 능력의 가짓수는 기하급수적이다.


유전자의 저주는 정말 지독한 것들이 세대를 거듭할 때 그리고 그것을 바꾸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할 때 쓰인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테레자는 자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를 피해 도망가려 하지만, 아무리 도망가도 결국 어머니도 자신과 같은 존재이며, 어머니처럼 본인도 우울하고, 버림받을 불안에 떠는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렇듯 삶의 원형이 같은 것도 나는 어쩌면 유전자의 힘 같다. 테레자와 어머니의 성장배경은 결코 똑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거의 같은 삶을 산다. 우린 상당한 부분 인지하지 못하지만 혈족에게 많은 것을 상호 복제한 채 산다. 환경 즉, 보는 것이 같기 때문이라고 단박에 설명하기엔 부족한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혈족과 내가 피든 물이든 결국 연결된 이유는 같은 재료에서 우리가 발현됐기 때문일 거다.


유전자의 힘을 계속 떠들다 보면 현재 내가 놓여있는 세계에서 무기력해질 수 있다. 이미 이 세계에 놓여 있는 이상 내가 다시 태어나서 다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 글러먹었단 생각이 든다면 나는 이 세계의 패배자일까. 하지만 이러한 패배는 우리가 타인을 인식하는 생물인 이상 계속 겪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뒤틀기 어려운 삶의 궤도를 계속 어떻게든 뒤틀어보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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